< 두 번째 히든 피스 (4) >
“으으음...”
눈을 떴다.
캄캄한 어둠 속, 나무로 만든 여관방 천장이 보인다.
등이 딱딱한 걸 보니 침대가 아니고 바닥에서 그냥 널브러져 잠이 든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러고 바닥에서 잤더라?
“아, 맞다.”
그래, 생각났다.
에셀바흐 대성당 정원 연못 바닥을 뒤져 찾아온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
그 힘을 흡수하기 위해 성배에 따른 물을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밖이 시끌시끌한 거 보니 아침 됐나 보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걸 보니 동료들이 한창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없다.
내가 연못 바닥을 열심히 뒤져서 찾아온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사라졌다.
“...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첫 번째 히든 피스였던 ‘검성의 낡은 롱소드’도 내가 힘을 흡수한 이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구원의 성배 역시 마찬가지인 걸 보니, 이렇게 힘을 흡수하면 해당 히든 피스 아이템은 사라지는 듯했다.
“스으읍... 하아아!”
눈을 감고 누운 상태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
“후우우우...”
다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의 몸 상태를 차분하게 되짚었다.
“일단 아픈 곳은 없는 것 같고...”
혹시 모르니 누운 상태에서 팔다리를 차례로 들어 올려보고, 어설프게 기억나는 요가 자세를 잡아보며 통증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 뭔데 이거.”
아프긴커녕 온몸에서 힘이 펄펄 넘쳐나고 있었다!
“허... 구원의 성배. 이거 완전 보약이네, 보약.”
기이할 정도로 좋은 몸 상태였다.
아마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가장 좋은 몸 상태이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숙면도 이런 숙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자고 일어난 날의 컨디션이라면 조금 이해가 쉬울까?
“... 아니지, 이건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지난 2년간 용병 일을 하며 꽤 많이 다쳤다.
칼에도 찔려봤고, 화살도 맞아보고, 몬스터 토벌 의뢰에 나갔다가 코볼트에게 물려도 보았다.
언덕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적도 있고, 매복해있던 나무에서 떨어진 적도 있으며, 몰려드는 적들을 피해 건물 2층에서 뛰어내리는 경험도 해봤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수라장을 겪으면서도 장애가 남거나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심한 부상을 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유증은 많이 남았다.
몸 전체에 크고 작은 상처가 수두룩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한번 부러졌다가 붙었던 손목이 시큰거렸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부러졌던 뼈가 금세 다시 붙었지만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언덕에서 구를 때 삐끗했던 허리도 자주 쑤시고, 조금이라도 무리한 날이면 등이며 어깨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 고사하고... 아예 새로 태어난 기분인데?”
내 느낌만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변화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저 누워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는 동작 하나를 한 것뿐인데도 벌써 변화가 느껴졌다.
몸을 일으킬 때의 균형감각, 굽혔던 다리를 쭉 펼 때 느껴지는 허벅지 근육의 힘, 그리고...
“... 뭐야, 왜 다 보여?”
지금 내 방은 한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두웠다.
전날 구원의 성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방문 틈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빛 하나 없는 이 컴컴한 방 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 보인다.
마치 영화나 게임 속에 나오는 특수부대의 야간투시경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심지어 야간투시경의 시야는 진한 녹색, 혹은 푸른색의 빛깔로 보이는데, 나는 그런 게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내 본연의 시야 그 자체였다.
“아, 아니... 이게 왜 보여? 어? 왜 이러는 건데? 나 올빼미 된 거야?”
안 보여서 문제인 게 아니라 보여서 문제인 상황.
그렇게 한동안 어둠 아닌 어둠 속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일단 나가보자.”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섰다.
“...!”
이번에도 놀랐다.
왜냐고?
“왜... 눈이 안 부셔?”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갑자기 나온 상황이었다.
급격히 진행된 명(明)순응 과정에서 당연히 눈이 시리고 아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뿐인가, 시력 자체도 월등히 좋아져서 여관 바닥과 벽면에 달라붙은 먼지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보였다.
“이게 무슨... 허!”
이래저래 당황스러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으니 결과적으론 기뻐할 일이었다.
“... 이,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왜인지, 다른 날보다 더욱 허기가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
“어이, 막내. 잘 잤냐?”
툭, 누군가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테이블 옆자리에 앉는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하니 우리들의 대장, 겔베르트였다.
“엇, 대장.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지. 너무 잘 자서 탈이 날 지경이다. 후우... 넌 피곤해서 어제 일찍 자겠다더니, 몸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대장, 지금 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고요!
“다행이네. 갑자기 몸 안 좋다고 해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던 겔베르트가 문득 질문을 던진다.
“근데 막내야.”
“예, 대장.”
“너... 원래 이렇게 피부가 좋았냐?”
“... 예?”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뭔 피부 타령?
“아니... 너 원래 잘 생긴 놈인 건 알았는데, 오늘은 좀 정도가 과한데? 거짓말 조금 보태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한다.
“어, 그러고 보니 막내 얼굴이 느낌이 좀 다른데? 피부가 되게 매끈해진 것 같아!”
“오오, 완전 도자기 피부인데?”
“데미언 이 자식 피부는 원래 좋았...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와, 피부 진짜 살벌하네! 파리가 앉았다가 미끄러지겠다 인마!”
“지금 보니 막내 이 자식 눈썹도 엄청 진해지지 않았냐? 봐봐! 내 말 맞지?”
“어제 잠 잘 잤다더니, 진짜 잘 잤나 보네. 얼굴 이목구비 자체가 좀 진해진 것 같아. 뭐지? 붓기가 빠졌나?”
“턱선도 엄청 날렵하... 아, 여긴 원래 이랬나?”
시커먼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 얼굴을 놓고 품평하기 시작한다.
“아니, 다들 미쳤나?! 왜 이래! 아잇, 만지지 마요! 손 치우라고오!!!”
여자들이 이렇게 달려들어도 질색할 판국인데 땀내 나는 사내들이 이러니 정말이지 곤욕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고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응...? 잠깐, 이건 뭐... 야, 데미언! 너 인마 일어나봐! 빨리!”
“예? 아이, 저 아직 밥도 다 못 먹었는데...”
“잔말 말고 새끼야! 빨리 일어나봐, 빨리!”
갑자기 내 뒤에서 달려들더니만 자리에서 일어나라며 닦달하는 엔리케.
‘하아, 이 양반은 또 왜 이러는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 같은 선배의 말을 앉은 채로 뭉갤 수는 없는 일.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씨근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헐, 맞네. 이 새끼... 너 이거 뭐냐?”
“...?”
앞뒤 없이 질문을 던지는 엔리케의 얼굴을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데...
어라?
‘응? 뭔가 이상한데?’
어떤 점이 이상하냐고?
내가 늘 바라보던 엔리케의 모습과 지금 바라보는 모습이 묘하게 달랐던 것!
‘... 대체 뭐가 변한 거지? 시력이 좋아져서 그런가?’
내가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엔리케가 큰소리로 외쳤다.
“막내 너, 혹시 키 컸냐?”
“예?”
“딱 보니까 알겠는데? 너 원래 나보다 작았잖아! 근데 지금 보니까... 야, 아니다. 지금 나랑 키 대보자. 빨리!”
“예? 어어... 예.”
엔리케의 말을 따라 우리는 서로 등을 지고 뒤통수를 맞댔다.
부모님 두 분이 키가 다 작으셔서 본인도 키가 작을 수밖에 없다는 엔리케.
아버지는 본 적도 없는 데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내력까진 모르겠고, 원체 못 먹고 자라서 키가 작은 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키가 더 작은 내가 용병대 내의 ‘최단신’을, 엔리케가 ‘그다음 단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 막내가 더 큰데?”
“와, 대박! 막내야 역전이다! 역전!!!”
“푸하하! 이제 조장이 꼴찌네요?”
그 순위가, 오늘부터 뒤집혀 버렸다.
“거의 뭐 새끼손톱만 한 차이이긴 한데, 막내가 더 커!”
“어디 봐. 오...! 그러네, 막내가 진짜 키가 컸나 봐!”
“확실히 막내가 어리긴 어리네. 아직도 이렇게 키가 크나?”
“에이, 당연하지! 이 자식 이제 열일곱이라고!”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하룻밤 새에 키가 이렇게 큰다고? 이게 말이 돼? 나는? 나느은?!”
내가 키가 커지는 바람에 용병대 내 최단신의 명예(?)를 차지하게 된 엔리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지만,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아이고, 조장! 억울해서 어떡해요? 푸흐흐!”
“아니, 애초에 키 한창 자라는 어린 애랑 비비려고 하는 게 말이 돼?”
“맞아. 막내가 무슨 자기처럼 삼십 대인 줄 아나?”
“추하다, 추해! 늙은이의 노욕!”
“추리케야, 엔하다! 푸하하!”
“너 이씨, 지금 뭐라고 했어? 너희들은 안 늙을 줄 아냐? 으아아아!”
억울해하는 엔리케의 모습을 보며 사방에서 동료들이 낄낄거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것은 엔리케 때문에 웃은 게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눈이 좋아지고, 키도 자랐다.
아직은 더 이것저것 실험해봐야겠지만, 높은 확률로 체력과 지구력, 유연성 같은 부분들도 성장했으리라.
‘... 보약 따위가 아니라 무협지에 나오는 공청석유였네. 으하하하!’
이것이 바로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
신체강화(身體强化).
지난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신체적 약점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
며칠 후,
“그래, 다들 모였냐?”
이른 아침부터 대장 겔베르트의 부름을 받아 여관 1층 식당에 모인 푸른 방패의 대원들.
다들 무슨 이유로 모이게 되었는지 알고 있기에, 평소처럼 정신없이 떠들며 잡담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
평소엔 나사 몇 개 빠진 놈들처럼 헛소리하느라 바쁜 놈들이었지만, ‘일’ 앞에선 세상 진지한 게 푸른 방패의 사나이들이다.
“짐은 다 챙겼지?”
“예, 빠뜨리는 것 없도록 두 번, 세 번 확인 시켰습니다.”
“좋네.”
푸른 방패의 서열 2위, 부대장 메이슨의 보고를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의 얼굴을 쭉 둘러본다.
“뭐... 따로 할 말 있는 놈 있냐?”
“없습니다!”
“그래, 이 상황에 따로 할 말이 있을 놈이면 어젯밤에 튀었겠지. 안 그래?”
“아, 맞네! 그냥 어제 튈걸... 에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따라가야겠다! 시발!”
“푸흐흐!”
“아, 진짜... 엔리케 조장 똘끼는 대단해!”
동료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해가며 농담을 던지는 엔리케.
그 노력이 아주 의미 없지 않았는지, 대원들 모두 굳었던 얼굴을 풀며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 중엔 나도 있었고.
“어이, 막내야.”
“예, 대장.”
“너 영지전에 정식으로 합류해서 싸우는 건 처음 아니냐? 기분 어때?”
겔베르트의 시선이 이번엔 나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 모든 대원들이 나를 바라본다.
우려와 기대, 걱정과 믿음의 감정이 골고루 드러나는 그들의 눈빛.
그 모든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완벽하게 달라진 육체만큼이나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저, 컨디션 최곱니다. 다들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하하!”
< 두 번째 히든 피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