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 슬레이어 (1) >
브렌도르프 영지 남부, 멘하우 요새 근방의 너른 평원.
수비 측인 브렌도르프 군 주둔지의 한 가운데 세워진 지휘 막사에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후우... 현재 병력 상황은?”
회의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병력 상황을 묻는 중년 사내.
그가 바로 브렌도르프의 영주인 라이너 클루게(Rainer Kluge) 남작이었다.
“뭘 기다리나? 빨리 보고하라니까!”
“예, 옛!”
브렌도르프 영지의 주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기사이기도 한 클루게 남작.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영지의 명운을 건 전쟁에 최고 지휘관의 신분으로 직접 참전해 싸우고 있었다.
“예! 우리 영지군 병력이 삼백이십팔 명, 불러모은 용병이 이백삼십삼 명으로 도합 오백육십일 명입니다.”
“잠깐, 용병이 이백삼십삼?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용병 삼백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이...”
격분한 남작의 반응에 병력 현황을 보고하던 군 지휘관이 식은땀을 흘린다.
“가, 간밤에 탈영한 병력이 있었습니다. 용병이란 놈들 자체가 워낙 근본이 없는지라...”
“탈영?”
“예, 그... 전투 중에 대장이 전사한 용병대 소속 인원들 몇 명이 그냥 도망쳐버린 것 같습니다.”
“뭐? 몇 명? 지금 몇 명이라고 했나?”
콰앙!
격분한 남작이 주먹으로 회의 테이블을 후려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하룻밤 사이에 칠십이 넘는 병력이 사라지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걸 두고 ‘몇 명’이라고 표현을 해? 지금 정신이 나간 건가? 어?”
“제, 제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용서를...”
“애초에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데려다가 계약을 맺은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전쟁터에서 도망이라니!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죽어도 모자랄 놈들이! 내 이놈들을 당장!!!”
주변에 앉아 있던 지휘관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격노한 영주를 달랬다.
“여, 영주님 고정하십시오!”
“어차피 용병 놈들이야 있어봤자 숫자 불리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갈 놈들이면,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영주님! 그깟 용병 놈들 있으나 없으나 큰 의미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겐 용맹한 브렌도르프 병력이 삼백 넘게 남아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끓어오른 남작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아, 우리 브렌도르프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한낱 용병 놈들마저 우릴 업신여기는 꼴이라니!”
“...”
침통한 남작의 모습에 덩달아 고개를 떨구는 브렌도르프 군의 지휘관들.
벨가르트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내어준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의 잘못인 것만 같아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털썩-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남작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 지난 겨울 몬스터 토벌로 영지군을 너무 많이 잃은 게 패착이었어.”
“영주님...”
“내가... 그때 내가 몬스터 토벌을 말리던 자네들의 의견을 들었어야 해. 영주랍시고 이 자리에 앉아서 어리석은 고집을 부린 게야.”
어딘가 넋이 나간듯한 그의 목소리에 크게 놀란 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아닙니다, 영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영지민들의 안전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몬스터를 토벌하고자 했던 그 마음을 저희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맞습니다, 영주님! 자책하지 마십시오!”
“잘못이라면 벨가르트 놈들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몬스터 토벌로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치고 들어오다니... 어찌 이리 간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라앉은 남작의 기분을 달래려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지휘관들.
침울했던 지휘 막사의 분위기가 다시금 달아오르던 그때,
“저, 영주님.”
“... 무슨 일이냐.”
지휘 막사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근위병 하나가 조심스럽게 상관들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주둔지 경계를 서던 병사가 보고 드릴 일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어찌합니까?”
“주둔지 경계병이?”
근위병이 전한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남작.
주둔지 경계에서 전할 소식은 보통 적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런 남작을 대신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휘관 하나가 입구 쪽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인지 먼저 알아보고 정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영주님.”
“음... 그렇게 하라.”
“예, 영주님!”
잠시 후, 막사 안으로 돌아온 그가 남작에게 보고를 올린다.
우려했던 일은 아닌 듯, 조금은 밝은 목소리였다.
“영주님, 다름이 아니라... 웬 용병대 하나가 우리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우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 용병대가?”
“허어!”
“오오, 사실인가?”
용병대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회의실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반가움을 담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패색 짙은 전황에 기존 계약한 용병들은 물론 영지군 병사들까지 야반도주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 발로 여길 찾아와 브렌도르프 측에 합류하겠다는 용병대의 소식을 들었으니 놀랄 수밖에.
“... 그래. 찾아왔다는 용병대의 이름이 뭔가?”
침착한 얼굴로 찾아온 용병대의 이름을 묻는 남작.
그런 그에게, 병사의 보고를 전한 지휘관이 대답했다.
“예, 영주님. 본인들을 텔마르크에서 온 푸른 방패 용병대라고 소개했습니다!”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 각하. 용병대 푸른 방패를 이끄는 겔베르트라고 합니다.”
브렌도르프 군의 지휘 막사를 찾아온 겔베르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자세로 꿇어앉아 귀족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영주인 클루게 남작을 비롯해 브렌도르프 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기에, 출입을 허락받은 건 오로지 겔베르트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네. 고개를 들게나.”
“예, 각하.”
‘고귀한 푸른 피’라 불리는 귀족의 입장에서 천한 용병 놈을 만나 반가울 일이 뭐가 있겠냐 만은, 지금 겔베르트에게 건넨 남작의 말은 진심이 묻어 있었다.
이미 남작은 자신의 지휘 막사를 찾아온 이 사나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를 기다리며 여기 있는 케러 경에게 지난 얘기를 들었네. 두 사람은 구면이지?”
겔베르트가 슬쩍 시선을 돌려 남작의 곁에 서 있는 인물,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 그간의 고생을 짐작하게 했다.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건넨 겔베르트가 남작에게 대답한다.
“예, 각하. 케러 경을 멘하우 요새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 멘하우 요새가 고립되어 있을 때 텔마르크 영지의 의뢰를 받아 군수 물자를 전달해준 것이 푸른 방패라지?”
“예, 그렇습니다.”
“자네들의 수고가 무색하게 요새는 벨가르트 놈들의 손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지난 일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해야겠지. 고생했고, 고마웠네.”
“그저 용병으로서 맡은바 의뢰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존귀하신 분께서 그리 말씀해주실 정도의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지난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남작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겸양을 표하는 겔베르트.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남작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자네는 보통의 용병대장과 좀 다르군?”
“...”
“마치 귀족의 예법을 배운 이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지금 용병대장이랑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기사랑 대화 중인지 헷갈릴 정도야.”
“... 과찬이십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담담하게 대답하는 겔베르트.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남작이 턱을 쓸어내린다.
“그래,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나 보군. 그 얘기는 우리가 좀 더 친분을 쌓은 뒤에 나눠보도록 하고...”
탁,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분위기를 바꾼 남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용병이 전쟁터를 찾아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참전 계약을 원하나?”
“예, 그렇습니다.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울 영광을 얻길 바랍니다, 각하.”
“우리로서도 환영할 일이지. 다만,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이야.”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남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겔베르트에게 묻는다.
“... 케러 경이 참전 제안을 했을 땐 왜 거절했던 건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한데?”
겔베르트는 남작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함을 읽었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사실상 ‘그때는 발 빼고 도망쳤던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온 거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던 것.
대답에 따라 눈앞의 남작이 크게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겔베르트는 당황은커녕 가벼운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각하, 저희 푸른 방패는 질 싸움에 목을 걸지 않습니다.”
“...!”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남작의 눈이 커진다.
그의 말이 지닌 의미는 명확했다.
‘멘하우 요새는 지킬 수 없었지만, 이 전쟁은 결국 브렌도르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하하하하!”
그저 일개 용병의 의견일 뿐이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썩 마음에 들었던 남작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나 라이너 클루게는 푸른 방패 용병대가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울 것을 허락한다! 가장 위급한 순간 찾아와 우리 곁에 선 그대들의 헌신을 브렌도르프는 잊지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 흡족한 남작의 말을 들으며, 겔베르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누가 감히 나와 맞서겠느냐!!!”
흑색의 갈기를 휘날리며 전장을 휘젓던 벨가르트의 기사, 브란트가 천둥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적의 기사를 붙잡아 두둑한 몸값을 벌 생각에 눈이 먼 브렌도르프 측 용병 몇 명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간 직후의 상황이었다.
“또 저놈이냐! 이런 빌어먹을!”
멀리 언덕 위에서 전황을 살피던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이 발을 구르며 분노했다.
요한 브란트는 명실공히 벨가르트 영지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자.
그는 벨가르트 영주가 매우 아끼는 인물로 열흘 전 지원군과 함께 전장에 도착했는데, 그의 참전 이후부터 브렌도르프 군은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브란트의 검에 죽거나 다친 브렌도르프의 고위급 지휘관이 한둘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 중엔 기사도 둘씩이나 섞여 있었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내 갑옷과 말을 끌고 와라, 어서!”
“여, 영주님! 참으십시오!”
“안 됩니다, 영주님! 부디 침착하십시오!”
“어찌 코볼트 잡는데 오우거 잡는 칼을 쓰려 하십니까! 절대 안 됩니다!”
성질을 못 이겨 뛰쳐나가려는 클루게 남작과 그를 말리는 부하들.
젊었을 적 한가락 했다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전장에서 검 휘두를 나이는 지나버린 남작이었다.
장담컨대 지금의 남작이 저 눈앞의 기사 놈과 검을 겨룬다면, 채 열 합도 나누기 전에 남작은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리라.
“이익, 놔라! 저놈이 우리 영지를 모욕하는 꼴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직접 검을 들고 나아가 저놈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
“귀하신 몸이 어찌 위험한 곳으로 가시려 하십니까! 영주님, 고정하십시오!”
허나, 그 소동을 보고도 브렌도르프 측에선 브란트를 상대하겠다는 이가 나오질 않았다.
이미 지난 열흘간의 전투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실력을 지닌 자인지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진정 아무도 없는 것이냐? 저 건방진 놈을 무릎 꿇려 내 앞에 데려올 이가 없냐는 말이다!”
여전히 반응 없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남작이 호통을 치려던 그때,
“어?”
“저게 누구냐?”
“아니, 저, 저...!”
검 한 자루를 어깨 위에 걸친 채 천천히 브란트를 향해 걷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머리는 본디 찬란한 금발이었으나, 적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터라 지금은 시뻘건 적발이 되어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전장은 묘한 고요함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렸던 브렌도르프 군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기사 브란트의 활약을 기대한 벨가르트 군이 둥글게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저절로 만들어진 대결의 무대, 말 위에 올라탄 브란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검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네 놈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브란트의 말과 행동은 실로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듯 당당하고 늠름한 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 새끼 더럽게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나 바빠, 빨리 끝내자. 참고로 난 용병이다.”
“... 이, 이 무례한 놈!”
상대의 대답에 분노한 브란트가 그 즉시 말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이이잉!!!
주인의 분노를 알아챈 군마가 크게 포효하며 대지를 박찼다.
기사씩이나 되는 인물을 등에 태우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내달리는 속도, 땅을 박차는 힘이 여느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콰콰콰콰콰콰콰!!!
말발굽에 패여 나간 흙덩이가 브란트의 뒤쪽으로 무섭게 흩날렸다.
원래도 그리 멀지 않았던 서로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다.
“죽어라!!!”
분노 가득한 브란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하늘 높이 치솟았던 그의 검이 번개가 쏘아지듯 떨어졌다.
감히 기사를 능멸한 용병의 머리통이 보기 좋게 쪼개지리라 생각하던 그 순간,
푸화아아아악!!!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붉은색의 안개.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별안간 떠올랐다가 추락하는 무언가.
털썩-!
모두의 시선이 땅바닥에 떨어진 그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
“헐... 저게...”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머, 머리가 잘렸다고?”
피범벅이 되어 땅을 구른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 브란트의 머리였다.
< 나이트 슬레이어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