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 슬레이어 (2) >
전장에 뛰어들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벨가르트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썰어 넘겼다.
몇 명이나 상대한 걸까.
열? 열다섯? 아니면 서른?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적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느낀 바가 있었다.
‘... 다르다, 몸이 완전히 달라졌어!’
검에 실리는 힘이 다르고, 생각에 반응하는 몸의 속도가 달라졌다.
체력도 좋아졌다. 계속해서 격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너끈하다는 듯 평온한 심장의 모습이 너무나 든든했다.
“이 개새끼야! 뒤져라아아!”
휘웅!
벨가르트의 병사 하나가 뒤쪽에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뒤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재빠르게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 공격을 피해냈고,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었다.
내가 해놓고도 놀랄 만큼 대단히 빠른 반격이었다.
“... 끄르륵!”
잘린 목을 틀어쥔 채 맥없이 쓰러지는 벨가르트의 병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박이네, 뒤에서 덤벼드는 게 다 느껴지잖아?’
접근한 상대가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나는 위험을 간파했다.
등 뒤에서 뿜어지는 맹렬한 살기(殺氣)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검성의 진전을 이은 후 안 그래도 예민했던 감각이 구원의 성배를 얻은 이후 훨씬 더 날카로워졌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눈을 감고도 싸울 수 있겠는데?’
물론,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이었던 검성(劍聖)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내 수준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그건 비교 기준을 검성에 두었기에 그런 것이지, 지금의 내 수준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절대 모자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한 후 육체적인 능력 자체가 서너 배 가까이 뛰어오른 느낌.
그런 나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준 것이 바로 벨가르트 영지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요한 브란트와의 대결이었다.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네 놈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기사 두 명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브렌도르프의 군 지휘관들을 쓰러뜨린 브란트.
그를 상징하는 깃발이 전장에 등장하면, 용맹하게 잘 싸우던 브렌도르프 병사들도 칼을 거꾸로 잡은 채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만큼이나 브란트가 보여준 실력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아, 새끼 더럽게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나 바빠, 빨리 끝내자. 참고로 난 용병이다.”
“... 이, 이 무례한 놈!”
하지만 그런 브란트조차 구원의 성배를 집어먹고(정확히는 성배에 담겼던 물을 마시고) 신체 능력이 몇 배나 뛰어오른 나의 검을 막지 못했다.
물론, 일부러 놈의 속을 긁는 도발적 발언으로 방심을 유도하긴 했다.
근데 누가 그런 말에 흥분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전쟁터에선 부모 욕, 자식 욕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다.
애초에 서로 죽이자고 칼 들고 뛰쳐나온 판국에 무슨 말인 듯 못할까.
거기에 눈 돌아가서 평정심을 잃으면, 그저 제 명줄만 짧게 할 뿐이다.
방금 내 검에 머리가 날아간 브란트처럼 말이지.
“어, 으어어...”
땅바닥을 나뒹구는 브란트의 머리통을 본 벨가르트 병사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다.
자신들의 영지를 대표하는 최강의 기사가 한낱 용병에게 목이 떨어졌다.
그 자체로도 너무나 충격이었는데, 이제 그 용병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불쑥 솟아오른 두려움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시발! 뒤, 뒤로 빠져! 저리 비키라고 이 새끼야!!!”
누군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야이, 시발! 뒤로 가라고 빨리!”
“도망치지 마라! 전원 자리를 지켜라!!!”
“이 개새끼야, 너나 지켜! 난 갈 거야!”
“그럼 네가 저 괴물이랑 싸우던가! 난 못해, 못 한다고!”
“이런 미친 새끼들이! 정신 차려라, 정신! 적과 싸워라!”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병사들과 용병, 그런 그들을 말리는 지휘관의 고함이 뒤섞여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단하게 전열을 유지하며 브렌도르프 군을 몰아붙이던 벨가르트 군이었는데, 내가 칼질 한 방에 브란트의 목을 날리는 것을 보고선 다들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자기들끼리 서로 밀고 밀치며 알아서 전열을 무너뜨리는 꼴이 참으로 한심했다.
“어딜 도망가냐, 이 새끼들아!”
이 천우신조의 기회를 그냥 보고 넘길 내가 아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앞으로 세워 든 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익! 오지마아아아!”
휘웅! 훙!
나에게 따라잡힌 벨가르트의 병사 하나가 들고 있던 창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잔뜩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창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카앙!
눈앞으로 휘둘러진 창을 검으로 막아낸 뒤 그대로 창대를 따라 검날을 밀었다.
스르르르르르르릉!
검날이 창대를 타고 흐르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으으! 으아아아아!”
푸화악!
마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창대를 타고 쏘아진 내 검이 울부짖던 병사의 얼굴을 반으로 쪼개버린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핏물을 유연한 몸동작으로 피해내며 두어 걸음을 전진한 내가 뻗었던 검을 잡아당겨 몸 왼편에 수직으로 세웠다.
카아앙!
내 옆구리를 베어낼 생각으로 휘둘러졌던 적의 칼날이 미리 버티고 서 있던 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상대의 공격이 그리 올 줄 알았던 것처럼, 나는 검을 세워둔 것이다.
“큭!”
내 검을 투박한 펄션으로 후려친 벨가르트의 용병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무거운 충격에 한껏 얼굴을 구긴다.
누가 봐도 자신의 펄션이 내 검에 비해 두껍고 묵직한 무기였다.
하지만 튕겨 나가는 것은 자신의 무기였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그대로 비어 있는 놈의 목을 찔렀다.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번개 같은 찌르기였다.
푹, 촤악-!
검이 빠져나오자마자 쏟아지는 붉은 피.
“커흑! 크으읍!!!”
왈칵 쏟아져나오는 피를 막으려 들고 있던 무기까지 집어 던지고 목을 틀어막아 보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퍼억!
꺽꺽거리는 놈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차 멀리 날려버린 후,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하지만 이미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는 벨가르트의 병사들은 나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도망치고 있었다.
“하, 이 새끼들... 빠르네.”
이미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까지 도망친 적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필사적으로 도망가는지, 순간적으로 달려가 잡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잊을 정도였다.
하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도망치는 게 당연한가?
“후, 오늘 장사는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뭘 팔았길래 장사 소리를 하느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언덕 위에 모여 선 브렌도르프 군의 수뇌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용병대 푸른 방패의 쇼케이스 현장이었습니다. 하하하!”
***
“오오오! 그 브란트를 일격에 쓰러뜨리다니!”
“어찌 일개 용병이 저 정도의 실력을...”
“저자가 진정 용병이 맞습니까?”
“허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주 아르닌이시여!”
모두가 난리였다.
지난 열흘간 브렌도르프 군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란 브란트.
자타공인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그가 무명(無名)의 용병과 겨루어 단 일 합에 목이 떨어졌다.
충격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저 용병이, 브렌도르프의 쟁쟁한 기사들보다도 강하단 말인가?
영주인 클루게 남작을 포함해 브렌도르프 군 수뇌부 모두가 눈 앞에 펼쳐진 충격적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홀로 돌아가는 전황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던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가 힘주어 소리쳤다.
“영주님, 기회입니다! 적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 이 상황을 놓치지 마소서!”
“...!”
바로 옆에서 들려온 케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이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기병대를 출격시켜라! 퇴각하는 벨가르트 놈들의 뒤통수를 들이쳐라!”
“예, 알겠습니다!”
뿌우우우우우-
영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브렌도르프의 기병대 전력이 득달같이 달려나갔다.
전쟁 기간 내내 명성 자자한 벨가르트의 기병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가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까지 주눅이 들어 있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모조리 죽여라! 포로를 잡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라!”
“와아아아아아아!”
“기병대 돌격! 벨가르트 놈들을 잡아 죽여라아아아아!!!”
그동안 쌓였던 설움을 폭발시키듯, 맹렬하게 돌진한 브렌도르프의 기병들이 벨가르트 병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
“으아, 피곤해 죽겠다!”
“야, 우리 중에 혹시 죽은 놈 있냐?”
“미친... 죽은 놈이 대답을 어떻게 해?”
“다행히 없슴돠, 제가 아까 인원 확인했어요!”
“아오, 나 이쪽 팔 조금 베였는데...”
“그거 살짝 베인 것 가지고 뭔 엄살을... 야, 때려쳐!”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였다.
결과는 대승(大勝).
승리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우리는 용병 주둔 구역에 배정된 우리 용병대의 막사에 들어섰다.
“어? 뭐야, 여기 우리 막사 맞아?”
“미친, 대박!!!”
“와, 이게 다 뭐냐? 어?”
한껏 들뜬 엔리케의 목소리.
뭔가 해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니, 큼지막한 테이블 위에 술과 음식이 한가득 마련되어 있는 게 보였다.
“헐, 이게 웬 거야? 술도 있네?”
“와, 이씨! 고기에서 김 올라오는 거 봐! 방금 요리한 건가 본데?”
“술도 그냥 술이 아니야! 이거 포도주라고! 으와아아아!”
“이야, 브렌도르프 영주님 성격 화끈하시네! 이렇게 보상이 바로바로 나오나? 하하하하!”
어젯밤까지도 볼 수 없었던 아니,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
한낱 용병에게 귀한 술과 고기를 챙겨준다니?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용병대 모두는 이 같은 브렌도르프 측의 대접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야, 막내야! 네 덕분에 우리가 호강한다! 으하하하!”
“근데 대접 진짜 대단하네, 이렇게까지 해주나?”
“야, 그럴 만하지, 그 벨가르트 기사 놈 때문에 브렌도르프 애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냐? 근데 그놈 머리통을 한 칼질에 날렸으니, 속이 얼마나 시원하겠어?”
“으하핫! 아무튼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막내! 덕분에 잘 먹으마!”
“아우, 내가 차린 것도 아닌데 왜 다들 나한테... 됐어요, 알아서들 드세요!”
쏟아지는 선배들의 목소리에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한 나는 막사 한쪽 구석에 놓인 큼지막한 물통으로 다가갔다.
이 역시도 우리를 위해 브렌도르프 측에서 준비해준 것으로, 보통은 주둔지 근처 물가에서 알아서 물을 길어다가 써야 했다.
특히나 물을 길어다 놓는 것은 용병대 막내인 나의 몫이었기에, 브렌도르프 측의 배려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푸우우...”
촤르륵...
적의 피로 물든 얼굴과 머리를 물로 깨끗이 씻어낸다.
주변 다른 사람들은 전투로 허기진 배에 술과 음식을 채워 넣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아주 꼼꼼하고 확실하게 얼굴과 머리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배고프지 않냐고?
‘하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네...’
당연히, 배고팠다.
오전 일찍부터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전투, 배가 고픈 게 당연할 수밖에.
하지만 지금의 나는 먹는 것보다 씻는 것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왜?
“어이! 막내야, 준비 끝났냐? 안 끝났어도 빨리 나와! 늦으면 안 돼!”
막사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장의 목소리.
“예, 거의 다 됐습니다!”
그의 말에 힘주어 대답한 나는 젖은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낸 후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연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 나이트 슬레이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