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 슬레이어 (3) >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의 연회 초청을 받아 지휘 막사로 향하는 길.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함께 걷던 겔베르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근데, 전쟁이 아예 끝난 것도 아니고 고작 오늘 하루 승전한 거 가지고 연회를 여는 건 좀...”
“왜? 너무 설레발 떠는 거 같아?”
“... 예.”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겔베르트의 말에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의 승리 자체가 브렌도르프 군에겐 그 정도로 간절했다는 의미 아니겠냐?”
“음...”
“더구나 오늘은 브렌도르프 측이 그토록 원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의 머리를 얻은 날 아니냐. 수뇌부 측에선 더더욱 오늘의 승리를 축하할 필요가 있어. 그동안 브란트의 존재감에 짓눌렸던 브렌도르프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아하.”
“연회 자리에 너를 초청한 것만 봐도 영주가 오늘의 승리를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지. 영주가 벌이는 연회에 초대받는 건 용병대장인 나도 지금껏 몇 번 경험한 적 없는 자리거든. 그리고 아마 오늘 연회는...”
거기까지 말을 마친 겔베르트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눈빛을 하는 거지?
“크흠, 아니다. 여기서 그런 말 해서 뭐하냐.”
“예? 아니, 지금 뭔 소리...”
“아무튼,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진짜 고생 많았고... 다른 놈도 아니고 데미언 너야 영특하고 눈치가 워낙 빠르니 내가 큰 걱정은 안 한다. 다만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어떤 겁니까.”
“우리가 가는 연회, 마냥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자리는 아닐 거다.”
“...!”
“브렌도르프의 주인인 영주를 비롯해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다. 그들이야 자신들의 집 안방이니 뭘 하든 괜찮겠지만, 우리는 아니야. 너나 나나 귀족인 영주의 눈엔 그저 돈 받고 칼을 빌려주는 천한 용병일 뿐이야. 귀족의 말 한마디면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지.”
“... 권력자들과 함께하는 자리인 만큼 행동과 말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시죠? 꼭 명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흡족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 요 신기한 새끼. 진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니까? 크하하하!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났지?”
그의 목소리엔 부하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관으로서의 마음과 제자의 성장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마음이 모두 담겨있었다.
“어디서 나타나긴요. 대장님이 절 발견했고, 푸른 방패로 데려왔고, 지금까지 잘 키우셨죠.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겁니다.”
그가 나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나도 그를 믿고, 의지하며, 존경했기에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크흠! 거 참, 새끼가... 나이도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가지고... 후우우, 아! 날이 참 덥네! 땀이 절로 난다, 절로 나!”
뜬금없이 날씨 타령을 하며 손 부채질을 하는 겔베르트.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열일곱 소년일 뿐 속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영혼인 나는, 겔베르트의 그 부채질이 땀을 식히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았다.
‘남자가 나이 먹으면 소녀 감성에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크흠!’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겔베르트를 보며,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나였다.
***
겔베르트와 내가 지휘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한 손에 술잔을 든 클루게 남작이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왔구려! 자, 다들 박수를 보냅시다! 우리 브렌도르프의 자존심을 세워준 사나이에게 이 자리의 영광을!”
짝짝짝짝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먼저 말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내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이야! 정말 감탄했네!”
“크으, 어린 나이에 대체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게 된 건가? 검을 가르친 스승이 따로 있는가?”
“브란트 놈의 머리가 솟구칠 때 나도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제 나이 열일곱이라고? 허, 내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에 어찌 그리 강할 수가 있는지?”
“자자, 내 잔부터 받게나. 이리 오시게!”
“어허!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친구에게 술은 무슨 술인가!”
“아직 성년이 아니라지만 이토록 대단한 영웅에게 그깟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슬며시 뒤로 빠진다.
나에게로 향한 저들의 관심과 찬사를 온전히 내가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리라.
참나, 나는 왜 이런 게 다 보이지?
아무래도 지난 생에 사회생활을 너무 열심히 했나 보다.
“어허, 이 사람들이!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법도가 있거늘! 영주인 나를 제쳐놓고 젊은 영웅과 먼저 연을 만들려 하는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웃음 띤 얼굴로 지켜보던 클루게 남작이 짐짓 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분이 좋은 와중에 나온 짓궂은 농담이었다.
“어이쿠, 이런! 저희가 이런 결례를...! 죄송합니다, 영주님!”
“하하하! 우리 브렌도르프를 구한 젊은 영웅에게 몰래 줄을 대보려 했는데... 과연 영주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데미언이라고 했지? 자자, 이쪽으로 앉게나. 자네는 여기 앉을 자격이 있네!”
당연히 연회장의 말석(末席)에 놓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자리가 놀랍게도 영주의 바로 옆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겔베르트의 자리는 연회장 가장 구석, 출입문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내 입장에선 너무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 배치.
민망함 담은 시선으로 겔베르트를 바라보는데,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저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겔베르트의 끄덕임이었다.
어차피 내가 앉기 싫다고 해서 다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짜인 상황에 내 몸을 맞추기로 했다.
“예. 그럼, 감사히...”
영주를 비롯해 여러 군 지휘관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영주의 혼잣말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
연회 자리가 한껏 무르익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지휘 막사 안으로 전해지는 술과 음식들.
술이 불콰하게 취한 영주와 군 지휘관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 가관이네, 정말.’
하지만 그 정신없는 연회의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난 그저 불편하고 피곤할 뿐이었다.
‘고기를 이렇게 처먹을 거면 병사들이나 좀 챙겨줄 것이지. 지휘관이라는 것들이... 에휴!’
이 세계에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대장은...’
지휘 막사 저 구석, 가장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는 우리 대장, 겔베르트.
제대로 된 대접은커녕 영주와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는 겔베르트.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내 시선에 그가 피식 미소를 보인다.
‘나 괜찮아, 인마’
뭐 이런 느낌의 미소랄까?
“그때 이 친구가 어깨에 검을 탁 올리고 천천히 걸어나가는데... 느낌이 딱! 오더구만. 일을 내겠구나, 저 어린 친구가 우리 브렌도르프를 위해 중한 일을 해주겠구나!”
“하하하! 맞습니다!”
“영주님께서도 그러셨습니까? 저도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자자, 우리 브렌도르프를 구해낸 젊은 영웅을 위해 다시 한번 건배!”
“건배에-!”
그 와중에 내 옆자리에 앉은 영주와 브렌도르프 군 지휘관들은 쉬지 않고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 계속해서 이런 흐름이었다.
내가 정말로 열일곱 먹은 어린 애였으면 이 분위기에 취해서 헤헤거리며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으스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끼들 뭔 꿍꿍이로 이렇게 이빨을 까는 거지?’
지난 생애 회사 고위 임원들을 모시고 수십, 수백 번 불편한 회식 자리를 가졌던 나는 이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회생활의 관록으로 따진다면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인 내가 아니던가?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위기감에 오히려 더 정신이 멀쩡해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접들을 떠는지, 내 한번 지켜봐 주지.’
***
하인이 내온 와인을 천천히 들이키며 클루게 남작은 옆자리에 앞은 데미언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다, 이 하찮은 어린놈아.’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라고 했다.
짬도 얼마 되지 않은 비루한 용병 놈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인가?
연회가 열리는 장소가 조금 허름했을 뿐, 내어오는 음식이나 술 모두 귀족인 자신의 취향에 맞춰진 훌륭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음식의 맛과 술의 향취에 정신이 녹아나고 있을 터.
‘자, 슬슬 시작해볼까?’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클루게 남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주변의 군 지휘관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으흠, 큼! 이보게 데미언,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친구가 한낱 용병 일을 하는 건... 이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야. 그렇지 않은가?”
“하! 이 친구가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구만! 나도 같은 생각이네.”
“자네 같은 친구는 큰물에서 놀아야지. 그런 실력으로 용병 일을 한다? 이건 시장 바닥 아낙네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걸세.”
“그 대단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를 일수에 꺾은 영웅 아닌가! 그 정도면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다녀도 모자람이 없을 실력이고 말고, 암!”
“...”
쏟아지는 사람들의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아무 말이 없는 데미언의 모습을 보며 클루게 남작은 슬슬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자, 밖에 누구 없느냐? 젊은 영웅을 위해 준비한 그 선물을 가져오너라!”
오늘 이 연회 자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선물’이 등장할 시간이다.
***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이 연회가 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나 꼬시려고 만든 자리구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칭찬을 퍼부어 대는데, 내가 등신 호구 새끼도 아니고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장이 아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가?’
이 연회 자리에 오는 길에,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겔베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미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다.
‘전투에서 귀족의 눈에 띄어 기사로 등용된다... 모든 용병들에게 꿈만 같은 상황이지.’
그 사실을 알기에, 겔베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낱 남작 나부랭이(?) 밑에서 허드렛일 하기엔, 내 꿈이 좀 크단 말이지.’
애초부터 내 목적은 겔베르트를 따라 운명의 흐름대로 움직이다 ‘그 녀석’을 만나는 거였다.
원작 소설에서 그닥 언급도 되지 않는 브렌도르프 영지의 기사 자리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얘기다.
‘남작의 면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거절할 수 있는 핑계를 찾아봐야겠는데... 흐음, 뭐가 좋을까?’
내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남작이 별안간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자, 밖에 누구 없느냐? 젊은 영웅을 위해 준비한 그 선물을 가져오너라!”
선물?
‘어허, 그런 것까지 준비했어?’
클루게 남작 이 양반, 그래도 꽤 성의가 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긴 하지만, 뭔 선물을 준비했는지 구경이나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
지휘 막사 밖에 있던 근위병의 두 손에 곱게 들려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선물의 정체는...
팟-!
『 타마르쿠스 롱소드(희귀 등급)
: 대륙 최고 품질로 유명한 타마르쿠스 지역의 철광석을 이용해 벼려낸 롱소드. 보통의 강철 롱소드와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강도를 지녔다. 』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처음 보는 희귀 등급(Rare) 아이템이 등장한 것이다!
‘허, 클루게 남작 이 아저씨...’
... 나한테 완전 진심이었구나?
< 나이트 슬레이어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