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 슬레이어 (4) - (수정) >
타마르쿠스 강철(Tamarcus Steel).
어딘가 낯익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스트 킹덤> 속 타마르쿠스 강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금속 중 하나인 다마스쿠스 강철(Damascus Steel)에서 모티브를 따 만들어졌다.
역사 속 다마스쿠스 강철과 마찬가지로 게임 속의 타마르쿠스 강철은 보통의 강철과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견고함을 지니고 있었다.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무기는 일반 강철제 무기를 내구성 면에서 압도했다.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면 이가 빠지고 실금이 가는 일반 강철제 무기와 달리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무기는 내리 일주일을 싸워도 날이 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토록 대단한 강철의 산지(産地), 타마르쿠스는 멀리 왕국 동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베니라이 강(Venirai River) 너머에 있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그곳이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쿠르페리안 제국의 영토라는 것.
펠리노어 왕국과 제국은 지난 수백 년간 창칼을 맞대고 싸워온 사이였다.
영토 분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은 주(主) 아르닌을 믿지 않는 간악한 이교도들의 국가였다.
같은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던 것.
이런 사정으로 인해 왕국 소속의 상단은 타마르쿠스 지역에 출입할 수 없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으로 물건을 구할 경로가 막혀버린 상황.
왕국 내에서 타마르쿠스 강철이나 타마르쿠스 강철제 무기를 구하려면, 제국과의 국경에서 목숨 걸고 밀수를 하거나 전쟁터에서 흘러나온 전리품을 사 모으는 방법뿐이었다.
‘... 괜히 아이템 등급에 희귀(Rare)란 단어가 붙은 게 아니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은 더럽게 비싸니까.’
찾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파는 물건의 숫자는 한 줌이었다.
수요와 공급의 말도 안 되는 불균형에, 물건의 가격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여기 있습니다, 영주님.”
“그래, 수고했다. 이만 나가보거라.”
근위병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친 검을 남작이 검집째로 들어 올린다.
외관 자체는 평범한 검이었지만, 상태창을 통해 아이템의 진면목을 확인한 내 입장에선 그 평범한 모습마저 비범하게만 보였다.
‘후우... 저건 대체 얼마나 하려나?’
얼마 전 내가 큰맘 먹고 구매한 고급(Advanced) 등급 롱소드의 가격이 90실버였다.
내 첫 무기였던 일반 등급의 숏소드가 8실버(깎아서 6실버에 샀지만)였던 것을 생각하면, 무려 10배가 넘는 가격.
고작(?) 고급 등급의 무기도 가격이 이럴진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희귀 등급의 무기는 대체 얼마나 더 비쌀 것인가?
“오, 세상에!”
“여, 영주님! 그 검은...”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롱소드! 그 귀한 것을 정녕 내주시는 겁니까?!”
“영주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검일진대...!”
남작의 손에 들린 검을 알아본 브렌도르프 군 지휘관들이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을 보인다.
연회 시작 후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대부분의 반응은 사전에 남작과 상의하여 준비된 것이었지만, 지금의 반응은 아니었다.
저들은 정말로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고, 나는 그들의 반응에서 남작의 진심을 읽었다.
‘남작이 기사 출신이라더니... 확실히 무인(武人)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네.’
이토록 귀한 검을 내주면서까지 인재를 얻으려 하다니.
대충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주절거리다가 ‘너,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 따위의 헬조선 식(?) 엔딩을 예상했던 내게 이 같은 남작의 행보는 실로 파격적이라 할만한 수준이었다.
“몇 년을 투자해서 어렵게 구한 물건이지. 순수하게 검의 가격만 해도 250골드를 주었으니... 허허!”
“...!”
검의 가격이 250골드라는 남작의 말을 듣고 살짝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250골드면, 25000실버? 미친... 칼 한 자루에 그 돈을 꼬라박는다고?’
<로스트 킹덤> 속의 화폐 가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대략 1실버가 1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남작의 손에 들린 저 검의 가격이 지구의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뭔 놈의 칼 한 자루가 페라리 가격이냐?!’
지난 생의 경제 감각을 아직 온전히 떨쳐내지 못한 내 입장에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귀족의 돈 씀씀이였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산 검을 나에게 주려고 준비했다는 건데...’
물론 공짜로 주려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저런 어마어마한 상품(?)을 준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배포였다.
“... 데미언.”
“예, 남작님.”
별안간 목소리를 착 깔며 내 이름을 부르는 클루게 남작.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 역시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간악한 벨가르트의 기사를 꺾고 ‘나이트 슬레이어(Knight Slayer)’의 위명을 떨친 자여! 그대는 나 브렌도르프 남작, 라이너 클루게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오라. 와서, 너의 검을 잡아라!”
“...!”
아니,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저 대사는 뭐란 말인가?
‘게다가 이 분위기는 또 뭐고...?’
남작의 웅장한 대사(?)가 읊어지기 무섭게 흥겨웠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던 것!
심지어 연회장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술을 들이켜던 겔베르트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대열에 동참했다.
말 그대로 ‘발을 뺄 수가 없게’ 되어버린 분위기였다.
“큼, 크흠! 데미언! 그대는 무엇을 망설이는가? 어서 검을 잡고 모두의 앞에서 맹세하라아아아! ‘나이트 슬레이어’의 이름을 가진 자여! 비록 그대는 비루한 용병이었으나, 영광된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 한 명의 위대한 기사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아아!”
내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자 남작이 조금 당황한 듯 목소리가 커지는 게 보였다.
더 꾸물대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이걸 어떻게 한다?’
***
‘흐흐흐, 그렇지. 제깟 놈이 이런 분위기에 안 나오고 배겨?’
검을 손에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브렌도르프의 영주, 라이너 클루게.
그는 쭈뼛거리며 일어나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데미언의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 열일곱에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몇 년 후엔 왕도에서도 탐낼 정도의 어마어마한 놈이 될 거야.’
그 자신이 검을 들었던 기사 출신이기에, 클루게 남작은 데미언이 지닌 무지막지한 잠재력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특히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를 베어낼 때 보여준 한 수는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모자라.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조차 하기가 힘든 수준이야!’
검 쓰는 실력과는 별개로 아직 성년도 안 된 어린 애였다.
저렇게 똥오줌 못 가리는 나이일 때 정신없이 몰아쳐 발목에 족쇄를 걸어놔야 했다.
‘영주인 내가 직접 이리 나서서 분위기를 잡는데, 감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을 거다. 흐흐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장의 한 수로 아끼고 아끼던 타마르쿠스 롱소드까지 꺼냈다.
무려 250골드짜리 희귀 등급의 무기로, 그 자신조차 아까워서 실전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검이었다.
‘... 앞으로 족히 30년은 써먹을 수 있을 재목이다. 나는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우리 브렌도르프의 기둥이 되어 줄 거야.’
영지의 미래를 좌우할 30년짜리 투자라고 생각하니 250골드의 무게가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남작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그의 앞으로 다가온 데미언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상황이 생각대로 흘렀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 된 남작이, 천천히 준비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데미언. 앞으로 그대는 브렌도르프의 기사로서 언제나 정의로울 것이며...”
“각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는 이 검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 뭣?!”
***
남작의 손에 들린 타마르쿠스 롱소드가 너무 아까워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브렌도르프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
게임의 원작 소설인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점이 단 5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는 상황.
그 전에 난 푸른 방패 용병대와 함께 펠리노어 왕국 남동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영지, 리트베르크(Rittberg)로 가야 했다.
‘지금 여기서 코 꿰면 앞으로의 계획이 틀어진다. 거절해야 해.’
문제는 어떻게 남작의 제안을 ‘뒤탈 없이’ 거절하느냐는 것.
아직 성년도 안 된 열일곱 살짜리 용병 나부랭이에게 무려 희귀 등급의 검까지 내어주며 등용을 제안한 상황이었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귀족인 클루게 남작의 면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명백한 신분의 격차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푸른 피의 귀족과 그런 식으로 원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할 일!
‘남작의 면을 세워줄 만한 적당한 명분이 뭐가 있을... 아, 그렇지!’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이, 이... 이놈이 감히!”
설마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던 남작의 입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던 찰나,
철퍼덕!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내가 지휘 막사 바깥까지 다 들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각하! 저는 이미... 충성을 바칠 대상을 정하였나이다!”
“...?!”
내 입에 나온 충격적인 선언에 지휘 막사의 분위기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충성을 바칠 대상이 있다니?
이미 누군가에게 등용된 채로 용병 생활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내가 소속된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 겔베르트에게 향한다.
“...”
하지만 겔베르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크으, 역시 우리 대장...!’
솔직히 감탄했다.
겔베르트 역시 지금 내가 꺼낸 말에 크게 당황했을 텐데, 겉으로 보기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
‘그 믿음에 충실히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대장.’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숨긴 채, 나는 다시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검을 팔아 먹고사는 비루한 용병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사내의 몸으로 어찌 두 주군을 섬기겠나이까? 저의 하늘엔 오로지 하나의 태양만 떠 있을 뿐입니다, 각하!”
“...”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선 채로 잠시 말이 없던 남작.
그가 간신히 입술 떼어 내게 물었다.
“자네의 주군이 누군가? 저기 있는 용병대장은 아닐 것이고, 혹시... 그게 텔마르크 남작인가?”
푸른 방패의 주요 활동지가 텔마르크 영지였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린 추측이었다.
“아닙니다, 각하.”
“그럼 대체 누군가? 누가 자네의 검을 샀단 말인가!”
조금은 격앙된 남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저의 충성을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 전능하신 주 아르닌이십니다.”
“...?!”
< 나이트 슬레이어 (4) -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