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27화 (25/197)

< 나이트 슬레이어 (5) >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나의 대답에 지휘 막사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충성을 바친 대상이 주 아르닌이라니?

이 무슨 성당의 사제나 할 법한 대답이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준비해두었던 대사를 청산유수로 읊기 시작했다.

“저는 텔마르크 남부의 화전민 마을 출신입니다. 너무나 추웠던 겨울의 어느 날, 먹이를 찾아 내려온 버니언 산맥의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했고 그 날 제 부모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 모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 나이 아홉 살의 일입니다.”

“...”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끔찍한 비극의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한 목소리로 꺼내놓고 있었다.

남작을 비롯한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저는 마을 창고로 쓰던 허름한 초가집에 숨어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제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피바다였습니다. 유독 저에게 친절했던 나무꾼 폴 아저씨도, 몸에 좋은 거라며 늘 제게 알 수 없는 풀을 챙겨주시던 약초꾼 한스 할아버지도 모두 놈들에게 죽었습니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몸을 잘게 찢어 게걸스럽게 먹던 그 괴물 놈들의 모습이 아직도 꿈에... 흐으윽!”

나에게 이 정도로 배우의 재능이 있었던가?

술술 나오는 거짓말도 모자라 눈물까지 터져 나오자 장내의 모두가 안타까운 한숨을 터트렸다.

“어허,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겪었구만...”

“버니언 산맥의 몬스터들의 흉폭함이야 워낙 유명하지 않은가?”

“헌데, 저 친구는 어찌 그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아홉 살짜리 꼬맹이의 몸으로 말이야.”

모두가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가운데, 내가 무엇엔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 그분이 나타났습니다. 눈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은 채 홀연히 마을 입구에 나타난 그분의 정체는...”

“성기사! 성기사가 나타났구나!”

‘눈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었다는 말에, 누군가가 비명처럼 그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주 아르닌의 뜻을 따르는 성스러운 전사들... 그분은 성기사였습니다!”

나는 깍지 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신실한 아르닌 교도로서의 모습으로 보일 만큼, 완벽한 기도 자세였다.

“그분께선 우리 마을을 습격한 몬스터들을 모두 물리친 후, 저를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의 용병 길드로 데려다주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자신의 지인에게 저를 맡기며 양육비로 적지 않은 돈까지 내어주셨지요. 그리곤...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아르닌께서 나를 보내 너를 구원하도록 이르셨다’라고...”

“허어!”

“오오, 주 아르닌이시여!”

지휘 막사에 모여 있던 사람 중 믿음이 깊은 몇 명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슬쩍 감았던 눈을 떠 남작을 바라보니, 그 역시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 오히려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무려 신(神)의 이름이 나왔다.

이보다 확실하고, 그럴듯한 거절의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 그래서, 성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인가? 주 아르닌의 빛을 수호하는 전사가 되기 위해, 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각하. 저기 있는 저희 용병대의 대장도 저의 사연을 알고 있습니다. 성년이 되면 용병대를 떠나 신성교국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남작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우... 내가, 하마터면 크나큰 불경을 저지를 뻔했군. 감히 주 아르닌을 따르는 성기사의 재목을 가로채려 했으니 말이야. 아니 그런가? 하하하하!”

“마, 맞습니다! 영주님!”

“오히려 영주님과 저희 모두가 저 친구에게 그토록 반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아르닌께서 점지하실 정도의 재능이었으니, 저희가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가? 역시! 우리 눈이 틀리지 않았던 거구만, 하하하하!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하는 남작과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멘트를 날리는 부하들.

그렇게 한참 동안 뻔한 말들이 오갔고, 마침내 남작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말이 떨어졌다.

“아쉽지만... 그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신의 것은, 신의 곁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겠지.”

“예, 각하.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

“어허, 당치도 않은 말! 더는 이 일을 언급하지 말게나. 세상 모든 일은 아르닌께서 정하신 순리대로 흐르기 마련인 것. 자, 모두 잔을 들어라!”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틀어막은 클루게 남작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놀라운 재능을 신을 위해 쓰기로 한 데미언을 위해 건배하도록 하지. 자아, 모두 잔을 들게나. 우리의 용맹한 ‘나이트 슬레이어’를 위하여!”

“위하여어어!!!”

***

연회를 마치고 용병대 막사로 돌아가는 길.

한참을 말없이 걷던 겔베르트가 내게 물었다.

“야, 막내야. 너 정말이냐?”

“예? 뭐가요?”

“아까 말했던 그 얘기들... 화전민 마을 출신에,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그런 얘기들 말이야.”

“아, 그거...”

푸른 방패에 합류해 겔베르트와 연을 맺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서로의 개인적인 사연은 잘 알지 못했다.

용병이란 애초에 워낙 사연 많은 인간들이었고, 그 사연이란 게 보통은 상처로 남아 있는 부분이기에 굳이 후벼 파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겔베르트는 내가 고아였고, 어쩌다 용병 길드에 맡겨져 그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몰랐다.

그런데 오늘 그토록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으니 놀랄 수밖에.

물론, 그게 다...

“뻥인데요?”

“뭐?”

“뻥이라고요, 뻥! 화전민 마을은 무슨... 저 용병대 들어오기 전까진 평생 크라벤 도시 성벽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어요.”

“그, 그럼 아까 클루게 남작한테 했던 얘기는 뭐야?”

“아, 그거야 뭐... 어떻게 해야 그 불편한 상황을 그럴듯하게 잘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막 굴리다 보니 저절로 그럴듯한 사연이 나오던데요? 하하하! 저도 놀랐어요. 용병일 하지 말고 음유시인이나 연극배우 같은 걸 할 걸 그랬나?”

“너 그럼, 원래 성기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는 것도...”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에게, 나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답했다.

“에이, 성기사는 무슨... 저처럼 믿음 없는 놈이 그런 거 한다고 나서면 신께서도 마음 불편해하실걸요?”

“허...”

옮기던 걸음마저 멈추고 넋이 나간 얼굴을 하는 겔베르트.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말이 없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왜 남작의 제안을 거절했던 거냐? 귀족의 눈에 들어 기사 자리를 받는 건 모든 용병들의 꿈일텐데... 더구나 남작이 그 귀한 검까지 내어주면서 제안을 했잖아?”

“기사 자리가 뭐 그리 대수라고 부모, 형제 같은 사람들까지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런 거.”

“...!”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짐작하건대, ‘부모’라는 표현 때문이겠지.

“뭐해요, 안 와요?”

혼자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겔베르트가 따라오질 않고 있었다.

어딘가 굳은 표정이 되어 서 있는 그에게, 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솔직히, 그 타마르쿠스 롱소드 못 받은 건 진짜 아깝긴 하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대장이 돈 많이 벌어서 그런 거 하나 사주세요. 그래야 내가 푸른 방패에 남은 보람이 있지 않겠어요?”

“막내 이 새끼...”

그제야 굳어 있던 발을 뗀 겔베르트가 내게 걸어오며 대답한다.

“그걸로 되겠냐? ‘자식’한테 줄 선물인데, 더 좋은 걸 사줘야지.”

“하하하! 지금 하신 말, 저 기억합니다? 까먹지 마세요!”

“그래, 인마. 안 잊어먹게 어디 적어두고 나중에 꼭 사달라고 해라. 하하하!”

단순한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닌,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지내온 겔베르트와 나.

그랬던 우리가, 사제(師弟)간의 정을 넘어 이번 생엔 결코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따뜻한 부자(父子)의 정을 느끼게 된 날이었다.

***

3주 뒤,

벨가르트 북부에 위치한 요새 울름바흐(Ulmbach).

울름바흐는 남쪽에 위치한 벨가르트의 주도 벨리움(Bellium)과 사흘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사실상 벨가르트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바로 그 울름바흐의 성벽 위에, 벨가르트가 아닌 다른 영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브렌도르프으으으! 우리가 승리했다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성벽 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승리 선언에 요새 성벽 아래 집결한 수백의 군사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쁨, 이제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었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요.”

기뻐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시원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워낙 많았던지라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 이건 뭐 전쟁광도 아니고... 전쟁이 끝난 걸 두고 아쉬워하면 안 되지. 크흠!’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리는데,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생 많았다. 네 덕분에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에이, 그건 진짜 과언인데요?”

“하하하! 민망하냐? 그럼 우리 용병대 모두의 활약이라고 하자.”

“오, 그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그래. 오전에 벨가르트의 사신이 와서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했다더라. 걔들 입장에선 답이 없으니까 뭐.”

겔베르트의 말처럼,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브렌도르프 측에 납작 엎드린 벨가르트였다.

지난 3주간 패퇴만을 거듭한 벨가르트에겐 더는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 중반까지 우수한 기병대의 기동력을 앞세워 전쟁의 승기를 잡았던 벨가르트.

하지만 직접 전장에 나선 브렌도르프 영주 이하 군 지휘관들의 분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푸른 방패 용병대의 활약이 더해지며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라 불리던 요한 브란트를 포함해 지난 3주간 내 손에 죽거나 사로잡힌 기사의 수가 무려 여섯이나 됐다.

참고로 전쟁 시작 전 벨가르트가 보유했던 기사의 수는 총 아홉 명이었다.

헌데 그 절반이 넘는 수가 내 손에 박살이 났으니, 제대로 된 전쟁 수행이 될 리가 없었다.

“처음 전쟁을 시작한 건 벨가르트였지만, 끝을 낼 권리는 브렌도르프가 잡았으니 이제 털릴 일만 남은 거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구리광산의 소유권은 브렌도르프 쪽으로 가겠네요.”

“당연하지. 그리고 전쟁 배상금도 엄청날 거다. 아무리 못해도 5만 골드는 될걸?”

“5만 골드라...”

대강 오백억 정도 된다는 소리였으니, 앞으로 벨가르트 영지는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후우... 전쟁은 돈으로 한다더니, 그 말이 진짜네요.”

“그래. 영주들이 칼 들고 싸우는 게 무서워서 전쟁을 안 하는 게 아니야. 그 뒤에 날아올 청구서가 무서워서 전쟁을 안 하는 거지.”

거기까지 말을 마친 겔베르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영주한테 용병 대금 돈 받으면, 곧바로 떠날 거야. 너도 준비해라.”

“예, 대장 텔마르크로 돌아가는 거죠?”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너 때문에.”

“...?”

의아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며 겔베르트가 싱긋 웃는다.

“너 인마, 이번에 너무 잘 싸웠어. 한동안 이 주변 지역의 영주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려고 말이지.”

“저는 이미 성기사가 될 거라고 소문을 냈는데요?”

“소문은 그렇게 났지. 근데, 귀족들이란 게 자기가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거든. 만약에 갖지 못한다면... 그냥 부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어.”

“...!”

“그래서 한동안 영주들의 눈에서 피해 있으려는 거다. 그러려면, 별 탈 없이 조용한 동네에 가 있는 게 좋겠지? 어차피 이번에 돈 많이 벌어서, 한 두어 달은 쉬어도 될 거야.”

“그럼 어디로 가실 계획인지...”

조심스럽게 묻는 나의 질문에, 겔베르트가 시원스럽게 답한다.

“최대한 먼 곳으로 가보자. 저 멀리, 남쪽 끝 리트베르크(Rittberg)로.”

< 나이트 슬레이어 (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