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트베르크를 향해 (1) >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끝나고,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리트베르크(Rittberg) 영지로 향하는 길.
나와 겔베르트, 그리고 푸른 방패의 동료들은 지금 막 벨가르트의 남부 국경선 너머에 발을 디뎠다.
“아으, 이제 끝이네! 염병할 벨가르트, 정말 지긋지긋했다!”
가장 먼저 일행의 앞으로 나선 엔리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엔리케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기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벨가르트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 용병대는 영지민들의 적의(敵意)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이길 거라 믿었던 브렌도르프와의 영지전.
그 전쟁의 승패를 뒤바꾼 것이 바로 우리 용병대였기 때문이다.
패배한 그들의 입장에선 원수와 다름없는 놈들이었으니, 죽일 듯이 노려볼 수밖에.
“참나, 우리는 그냥 받은 돈값하려고 열심히 싸운 것뿐인데! 뭘 그렇게 죽일 놈처럼 쳐다보는지... 원망을 하려면 전쟁을 먼저 일으킨 벨가르트 영주를 원망했어야지! 그게 맞는 거 아닌가?”
툴툴거리며 걷는 엔리케에게 내가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벨가르트 영주... 이름이 스벤 모라벡(Sven Moravec) 남작이었나요? 그 양반이 필사적으로 소문을 냈을 거예요. ‘푸른 방패 용병대, 그 망할 놈들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 이렇게요.”
내 대답을 들은 엔리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굳이 왜 그래야 하지? 그래 봤자 우리 명성만 올려주는 거 아닌가?”
“명성이라... 악명(惡名)도 명성의 일종이긴 하죠.”
“악명?”
“예. 생각해보세요. 전쟁의 승리로 벨가르트가 구리 광산의 소유권을 얻고, 전쟁배상금을 타낸다 한들 그게 평범한 영지민들과 관련이 있을까요?”
“어... 그다지?”
“그렇죠. 전혀 상관없죠. 영주가 전쟁배상금 타서 영지민들한테 나눠 줄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그저 전쟁터에 끌려간 자신들의 아버지와 아들, 남편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뿐이에요.”
“음...”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전쟁에서 이기는 게 좋겠죠? 이겨야, 가족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확률이 커질 테니까. 근데 벨가르트는 전쟁에서 졌어요. 그럼 그 원망이 어디로 갈까요?”
여기까지 설명하자, 엔리케도 대강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네 말은, 벨가르트 영주가 이 전쟁으로 인한 영지민들의 원망을 우리에게 돌리려고 한다는 거지?”
“그렇죠. 아마 우리 용병대는 벨가르트 영지민들 사이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쓰레기로 소문이 나 있을 거예요. 전쟁 패배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달래기 위한 영주의 술책이랄까?”
“그 술책을 일컬어 다른 말로, 정치(政治)라고 하지.”
마지막 말을 한 건 뒤쪽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겔베르트였다.
그 말을 꺼낸 직후 겔베르트는 감탄한 어조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 그나저나... 데미언 너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칼로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 머리로 싸우는 것도 우리 용병대 최고가 되겠어.”
“으음? 지금도 거의 최고 수준인 거 같은데요? 대장이랑 메이슨 정도만 빼면?”
나의 너스레에 반응한 것은, 의외로 엔리케였다.
“어어? 막내 너 이 새끼, 우리 멍청하다고 까는 거지 지금?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아아아!”
“어후, 이럴 땐 또 눈치 빠르시네?”
“야이씨!”
늘 그렇듯 한바탕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우리는 델멘부르크(Delmenburg) 영지에 도착했다.
***
델멘부르크 영지는 가진 돈이 너무 많아 이른바 ‘황금백(黃金伯)’이라 불리는 바덴하임(Badenheim) 백작의 봉신 중 하나인 로베르트 페르반(Robert Pervan) 남작의 영지였다.
영지의 크기 자체는 작았지만 너른 평야 지대가 많았고, 온화한 왕국 남부 지방 특유의 날씨 덕에 농업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 그래서, 영지 크기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지. 델멘부르크에 살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니까?”
야영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사냥을 잡은 토끼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차였다.
델멘부르크 출신인 용병대 동료의 고향 자랑(?)을 듣고 있는데, 문득 허전해진 빈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석 달가량 진행되었던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의 전쟁.
그동안 양측 병력을 모두 합쳐 총 이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기 위한 수라장에 내던져졌다.
그 전쟁에서, 우리 푸른 방패는 총 네 명의 동료를 잃었다.
거기에 더해, 일곱 명의 동료가 더는 용병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브렌도르프 영지 측에게 용병 대금을 받은 대장 겔베르트는 다른 대원들의 의견을 모은 후, 부상으로 은퇴를 결정한 동료들에게 본래 받을 몫보다 5할의 돈을 더 챙겨주었다.
은퇴한 동료들이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을 잘 건사하길 바라는 의미였다.
“... 다들 고향엔 잘 도착했으려나?”
“잘 도착했겠지. 대장이 마차 타고 가라고 따로 돈도 챙겨줬잖아.”
헤어진 동료들의 생각을 나만 했던 것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그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지전에서의 활약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용병대의 규모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 허전함은 모두의 가슴 속에 상처를 남겼고, 여전히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에이, 야! 우울한 소리들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자자, 잔을 채워!”
낮에 지나온 마을에서 산 벌꿀주 통을 들어 올린 엔리케가 직접 걸어 다니며 동료들의 잔을 채웠다.
아, 참고로 나는 술을 받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 술을 안 마시냐고?
‘...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네.’
씁쓸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모두에게 말했다.
“자, 그럼... 막내인 저는 불침번 경계 가겠습니다. 재밌게 노십쇼, 선배님들.”
죽상을 하고 일어서는 내 얼굴 본 엔리케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야, 막내야! 조금만 더 고생해라! 리트베르크 가면 대장이 신입 뽑아준댔어. 그때까지만 뺑이치자, 알았지?”
“예, 예, 알겠슴돠아!”
떠들썩한 모닥불 곁을 빠져나온 나는 불침번 경계 장소로 점찍어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랐다.
높이가 꽤 되어서, 우리 용병대의 야영 텐트는 물론 주변 지역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참... 별은 언제 봐도 많네.”
이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있다면, 바로 쏟아질 듯이 많은 별을 품은 밤하늘의 풍경이었다.
대기 오염으로 얼룩져 기껏해야 한두 개의 별빛밖에 볼 수 없었던 지난 생의 밤하늘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였다.
“크흠, 어디 보자... 상태창.”
그렇게 멍하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 내가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를 꺼내 보았다.
팟-!
『 데미언 / Lv. 43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 무골지체(武骨之體)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오크 가죽 갑옷(고급 등급) 』
브렌도르프-벨가르트 영지전에 참전하기 전과 비교해 놀라울 정도로 치솟은 레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벨가르트의 기사를 비롯해 고위급 지휘관들을 여럿 때려잡았고, 거기서 경험치를 많이 얻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성장의 가장 큰 요인 뭐니뭐니해도...
‘... 구원의 성배 덕이겠지. 크, 히든 피스 효과 달달하다!’
성지(聖地) 에셀바흐에서 얻은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하면서, 나의 성장 속도는 가히 폭발적인 수준으로 변했다.
‘기본적으로 몸 자체가 효율이 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지.’
구원의 성배가 지닌 가장 위대한 권능은 바로 ‘신체강화(身體强化)’였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물론, 지금도 어리긴 했다), 부실한 영양 섭취를 통해 나약한 신체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나다.
첫 번째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를 통해 4백 년 전 대륙 최강의 무인이었던 검성(劍聖)의 경지를 이어받았지만, 부실한 신체 탓에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원의 성배를 통해 신체강화를 이룬 뒤, 내 성장의 효율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상태창에도 표기된 나의 새로운 고유특성, ‘무골지체(武骨之體)’였다.
무골지체, 쉽게 표현하면 ‘싸우기 위해 태어난 몸뚱이’ 정도 되려나?
그 전에는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근육 붙는 속도가 더뎠는데, 요즘은 조금만 땀을 흘려도 근육이 쫙쫙 갈라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 한 번 확인을 해볼까?”
상태창을 조작해 간단한 신체 현황 정보를 불러왔다.
어차피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팟-!
『 데미언 / 신체 현황
신장: 179cm
체중: 78kg
시력: 좌 8.0 / 우 8.0
골격근율: 40%
부상 여부: 없음 』
‘... 이건 뭐, 그냥 괴수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한 지 고작 두 달가량이 지났는데, 전반적인 신체 능력의 지표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했다.
이제 내 키는 용병대 내에서도 평균 이상에 속했고(이 부분에서 엔리케한테 괜히 미안했다), 체중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무서운 점은 그 불어나는 체중이 단순히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순수한 근육의 증가 때문이라는 점.
팔, 다리, 어깨, 등, 배,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강철 같은 근육이 들어찬 탓에, 이제 단순한 주먹질만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박살내어 주저앉힐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다른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영역인데, 시력은 대체...’
이게 정녕 사람의 시력인가?
왼쪽 눈 8.0에 오른쪽 눈 8.0이라는 괴랄한 수치는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흔히 눈 좋은 사람을 일컬어 ‘매의 눈’이라고 하는데, 그 잘난 매도 이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야간투시 능력도 생겼으니... 이정도면 6백만 불 아니, 6백억 불의 사나이쯤 되겠네.’
아재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을, 옛날 옛적 외화 시리즈의 제목을 떠올리며 홀로 낄낄거리던 그때,
“...!”
사방에 거미줄처럼 뻗어진 나의 감각이 위험 신호를 울렸다.
‘서쪽!’
내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그 감각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을, 저 먼 거리에 솟은 산속 깊은 곳에서 우르르 떼로 몰려나오는 무언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나의 입술이 흥미롭게 비틀린다.
“저 새끼들... 오크잖아?”
< 리트베르크를 향해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