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29화 (112/197)

< 리트베르크를 향해 (2) >

겔베르트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부하들과 오랜만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는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곳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오는 비명과 창칼의 소음에 시달리고, 잘려나간 팔다리와 더운 김이 솟는 붉은 피 웅덩이가 사방에 가득한, 인세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니, 꽤 많이 달랐다.

“아니, 새끼야! 내 말 좀 들어봐! 진짜 그 애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다니까?”

“아, 예, 예! 물론 그러시겠죠.”

“어라 시발? 이 새끼 이거 사람 말을 안 믿네? 진짜라니까? 내가 고백만 하면 바로 넘어올 분위기였다고!”

“아니 대체 그 분위기의 기준은 뭡니까? 예? 조장 혼자만의 착각 아니고요?”

“와아, 진짜 환장하겠네! 이 고독한 크라벤의 늑대, 엔리케 님의 매력을 의심하는 거냐 지금? 으아아!”

“고독한 늑대는 무슨... 그냥 못생긴 똥강아지 같구만.”

“뭐? 너 이 새끼 말 다했냐아아아!”

지금 겔베르트의 곁엔 가족처럼 아끼는 (얼간이) 부하들의 웃음소리와 찌르륵거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잔혹한 죽음의 냄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달콤한 한여름 밤의 여유였다.

“... 좋네.”

그는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부하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소금 뿌려 잘 구운 토끼 고기의 맛이 좋았고, 델멘부르크 산 밀알을 양껏 넣어 든든하게 끓여낸 죽도 먹을 만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얼마 마시지도 않은 싸구려 벌꿀주에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있지도 않은 술을 더 마시겠다며 징징거리는 부하들을 (주먹으로) 설득해 잠자리로 보낸 겔베르트가 자신의 야영 텐트에 몸을 뉘었다.

누운 상태에서 위를 바라보니, 이곳저곳 찢어진 자리에 천을 덧대 기운 허름한 텐트 천정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의 모습을 잃고 엉망이 된 듯 보였으나, 그래도 자신의 몫을 어떻게든 해내는 모습이었다.

‘하, 꼭 내 인생 같네.’

그것은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져 버린 옛이야기.

세상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리라 믿었던 치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명성 높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자신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입이 마르도록 그의 실력과 인품을 칭송했고, 과연 드높은 가문의 명성에 어울리는 인재라는 평이 자자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지금껏 그러했듯, 앞으로도 장밋빛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날들.

하지만 그 행복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찰나였다.

“... 시발, 늙긴 늙었나 보네. 오라는 잠은 안 오고 별 거지 같은 생각만 떠오르는 걸 보니...”

마치 떠오르는 생각의 끈을 잘라내듯, 겔베르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부스럭-

‘...!’

텐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오랜 용병 생활로 배어버린 본능은 곤히 잠들었던 그의 몸을 벼락처럼 깨웠다.

“... 누구냐.”

그렇게 묻는 겔베르트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은 것을 보아, 부하 중의 한 명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 데미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텐트 밖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겔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남짓이 된 막내.

그러나 어느새 대원 모두가 가장 의지하게 되어버린 녀석.

데미언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영리했으며, 빼어난 실력까지 갖춘 진짜배기 재능이었다.

“무슨 일이냐.”

겔베르트의 물음에, 텐트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크가 나타났습니다. 숫자는 열둘, 야영지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에서 접근 중입니다.”

“... 산에서 내려온 놈들이군.”

짤막하게 대답한 겔베르트가 곁에 풀어두었던 자신의 무기를 챙기며 텐트 밖으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달빛도 옅어진 이 깊은 밤에 그 먼 거리에 있는 오크를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걸까?

하지만, 겔베르트는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의문을 지웠다.

‘하긴, 이 녀석이 말도 안 되는 걸 보여준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피식,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웃음을 잠시 지었던 겔베르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히 굳어진 표정으로 야영지의 한 가운데로 향한다.

뒤이어, 그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 푸른 방패, 모두 기상.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온 것 같다.”

***

“도, 도망쳐! 무조건 달려어어!”

“제, 제발... 크헉!”

“뛰어, 빨리 뛰어! 멈추면 안 돼! 계속 뛰어어어어!”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꺄아아악!”

남녀노소, 약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길을 알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었다.

“크롸아아아악!”

그런 그들의 뒤에서 기세 좋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은 녹색의 근육질 피부를 가진 포악한 몬스터, 오크(Orc)였다.

“아르닌이시여! 그대의 어린 양을 구해주소서!”

자신의 늙은 몸으로는 오크의 추격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노인 하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노인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크롸아아악!”

노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오크 역시, 그가 믿는 신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었다.

휘우우웅- 콰직!

달려온 기세를 담아 힘껏 내리친 오크의 도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던 노인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잘익은 수박처럼 갈라진 노인의 머리에서 시뻘건 피와 허연 뇌수가 튀었다.

“크륵! 크롸롸!”

도끼날의 묻은 피를 혀로 핥은 오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산속 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오크들에게 인간이란 가끔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늘 맛볼 수 있는 산짐승들과 달리 훨씬 여리고 부드러운 식감을 지닌 인간의 고기.

오랜만에 맛보게 된 별미(別味)에 오크는 기쁨의 함성을 내지른다.

“크롸아아아아아!”

***

“아니, 저 인간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위험하게 산 옆에다가 야영지를 깐다고? 그것도 불까지 피워가면서?”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오크들에게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엔리케가 분노와 착잡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산이나 깊은 숲 옆엔 야영지를 설치하지 않는다.

두 지형 모두 몬스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몬스터가 없다 하더라도 늑대나 곰, 들개 따위의 야생 동물과 마주칠 확률이 높기에, 야영의 경험이 많은 이들은 가능한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자리를 잡고 밤을 보냈다.

“... 대강 복장들을 보아하니, 신성교국으로 가는 성지순례객이군.”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던 겔베르트의 말이었다.

“대장,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크 열두 마리면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언제나 진중하고 침착한 사나이, 부대장 메이슨이 특유의 저음으로 물었다.

“오크 열둘이라... 확실히 쉽지 않긴 하네.”

우리 용병 업계의 기준으로, 오크 한 마리를 문제없이 상대하려면 은패 용병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했다.

지난 브렌도르프-벨가르트 영지전 참여로 열한 명의 동료를 잃은 우리 용병대의 현재 전력은 총 열넷.

그중 은패 이상의 실력을 지닌 사람의 수는 모두 다섯이었다.

대장 겔베르트, 부대장 겸 1조장인 메이슨, 2조장 엔리케, 거기에 나와 한 명의 선배를 더한 숫자였다.

이 기준대로라면 은패 이상의 실력을 지닌 우리 다섯이 각각 오크 한 마리씩을 상대하고, 남은 오크 일곱 마리를 나머지 대원 아홉이 상대하는 그림이 된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상당히 아슬아슬한 그림이었고, 얼마 전 많은 동료를 잃었던 우리에겐 상당히 심적인 부담이 되는 구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아... 데미언?”

“예, 대장.”

내 이름을 부르는 겔베르트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불안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오크 한 마리를 문제없이 상대 가능한 멤버 다섯 명 중에, 홀로 열 마리 이상을 잡아낼 수 있는 기사 급의 실력자가 둘씩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 중의 하나는, 당연히 나였다.

“너 먼저 가서 딱 절반만 조져 놔. 그 이상은 무리할 필요 없다. 나도 밥값은 해야지.”

“하하, 알겠습니다.”

“나머진 나를 따라온다. 우측면에 보이는 큰 나무를 끼고 돌아갈 거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의 명령에 대답하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파파파파팍!

캄캄한 어둠 속, 나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려 퍼진다.

상관없다.

지금 나는 누구를 암살하려 조심스럽게 잠입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의 움직임은 명백한 돌격(突擊)의 자세.

맹렬한 기세로 들이닥쳐 적을 분쇄하는 과정에 은밀함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크롹?”

“크와아아아아!”

나의 접근을 알아차린 오크 몇 마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기괴한 울음을 토해낸다.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울음소리엔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기운이 담겨있다.

흔히 판타지 세계를 다룬 소설과 게임 속에 등장하는 ‘피어(Fear)’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워 이 돼지 새끼들아!!!”

오크 따위의 어설픈 외침에 제압당하기엔, 나의 정신력이 너무나 강했다.

푸화악-!

달려온 기세를 담아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오크의 상체를 쪼갰다.

내게 도끼를 내리치려던 자세 그대로, 수직으로 곧게 갈라지며 뒤로 넘어가는 오크.

힘이 풀린 놈의 손아귀에서 녹슨 도끼 한 자루가 떨어져 나온다.

터억-

바닥으로 떨어지는 도끼를 왼손으로 잡아낸 후 그대로 정면을 향해 투척했다.

평소 던지던 투척용 손도끼와 달리 큼지막한 도끼의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후웅- 후웅- 후웅- 퍼억!!!

“크르륵!”

내가 던진 도끼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오크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뒤통수를 처박는다.

도끼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런지 확실히 적에게 주는 데미지 자체가 달랐다.

“자, 두 마리 잡았고!”

눈 깜짝할 새에 동료 둘을 잃은 오크들이 성지순례객들을 사냥하던 걸 중단하고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좋았다.

“크롸아아악!”

슈웅-!!!

오크가 있는 힘껏 휘두른 도끼가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남들이 보기엔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겠지만, 검성에게 이어받은 초인적인 감각으로 딱 필요한 만큼의 회피 동작을 한 내 입장에선 전혀 불안할 일이 아니었다.

“흐읍!”

공격을 피한 후 등 뒤로 돌아가 훤히 열린 놈의 후방을 공격한다.

촥, 촤악, 푸화아악!!!

양쪽 무릎 뒤의 힘줄을 끊어 놈을 주저앉힌 뒤 깔끔하게 목을 베어냈다.

이어,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떨어지는 오크의 머리통을 붙잡아 측면에서 덤벼드는 다른 놈에게 집어 던졌다.

“크롸악! 칵!”

갑자기 눈앞으로 동료의 머리통이 날아오자 놀란 놈이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시야를 가리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콰지직!

마치 복싱에서 어퍼컷을 때리듯, 가려진 시야 아래에서 솟구친 나의 검이 놈의 목울대를 뚫고 들어가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케륵, 컥컥...!”

머리통이 꿰뚫린 상황에서도 본능은 남아 있는 것인지, 허우적거리며 검을 뽑아내려는 오크.

하지만,

으득, 으지직!

나는, 놈의 목에 꽂혀 있던 검을 측면으로 힘껏 돌려 목뼈 자체를 부숴버렸다.

“다음 돼지는 어딨냐! 덤벼, 이 새끼들아!”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오크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린 뒤, 나는 남아 있는 오크를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 리트베르크를 향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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