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트베르크를 향해 (3) >
우리가 성지순례객 야영지를 덮친 오크 열두 마리를 도륙 내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차 한잔 마실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나 혼자서 오크 아홉 마리를 잡았고, 후방으로 돌아간 대장과 메이슨, 엔리케가 각각 한 마리씩을 잡아 체면치레를 했다.
“고생했다, 데미언.”
“아닙니다. 고생은요.”
겸손한 척한다고 꺼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 홀로 오크 아홉 마리의 멱을 따는 일 정도는 그다지 고생스러울 것도 없는 수준의 ‘잡무’가 되어버렸으니까.
‘고유특성 무골지체(武骨之體)... 이름값 제대로 하네.’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해 신체강화를 이뤄냈고, 그 결과 부실했던 약골의 몸을 ‘싸우기 위해 태어난 몸’, 무골지체로 벼려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검에 실리는 힘이 달랐다. 예전 같으면 머리통만 쪼개고 말았을 공격이 오크 몸뚱이 전체를 과일 자르듯 쫙쫙 베어냈다.
체력도 몰라보게 늘었다. 오크씩이나 되는 괴물을 아홉 마리나 상대하는데 숨이 거칠어지는 정도로 끝났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힘들어서 목에서 쇠 맛이 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을 덴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체력 회복 자체도 빨라진 것 같네.’
헉헉거리던 숨이 빠르게 잦아들고, 지쳐버린 몸에 산소를 공급하려 쉴 새 없이 부풀었던 가슴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추가로 체력 관련 히든 피스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
‘... 잠깐, 그게 왕도에 있었던가?’
히든 피스의 주인이 된 이에게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선사하는 ‘그 물건’의 위치를 떠올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지는 나였다.
한편, 오크들의 습격으로 얼이 빠진 성지순례객들을 이끌어 안전한 우리 용병대의 야영지로 데려온 겔베르트가 누군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그런 겔베르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그 상대는 나 역시도 계속 신경을 쓰고 있던 인물이었다.
“저, 신부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겔베르트의 질문을 받은 이는, 성지순례객 행렬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사내.
입고 있는 복장과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아르닌 교의 성직자였다.
그는 얼핏 봐도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강 추측건대, 한 스물 대여섯 정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제 고작 열일곱인 나랑 비교하면 한참 어른이라 불릴 나이긴 했다.
“아, 저는 다행히 다친 곳 없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민망한 얼굴을 한 어린 얼굴의 성직자가 겔베르트에게 재차 입을 열었다.
“... 저는 아직 신부가 아닙니다. 부족하나마 부제(副祭)의 신분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니콜라오라고 합니다.”
“어쩐지, 앳된 얼굴을 하고 계시더니만... 부제님이였군요. 실례했습니다.”
부제(副祭)란 교회에서 주교와 신부, 즉 사제(司祭)들을 보조하는 성직자를 이르는 말.
그 말인즉, 이 성지순례객 행렬을 이끄는 책임자는 따로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못해도 오십 명은 될 법한(물론, 오크 떼의 습격으로 그 숫자는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다) 성지순례객 행렬의 지도를 나이 어린 부제에게 맡길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함께 오신 분이 계시겠군요. 어디에 계신지...?”
“아, 그게... 사실, 제가 모시고 온 신부님이 계셨는데...”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는 니콜라오.
그 끝에, 천을 얼굴에 덮은 채로 누워있는 시신 한 구가 보였다.
오크의 도끼에 맞아 머리가 쪼개진 중년의 사내였는데, 아마도 그가 니콜라오가 따르던 신부(神父)였던 모양이다.
“아이고, 이런... 이거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 또한 주 아르닌의 뜻이겠지요. 후우...”
존경하고 따르던 신부의 죽음에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부제.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겔베르트가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주 아르닌께서 신부님을 당신의 곁에 두고 중히 쓰시기 위해 남보다 조금 일찍 천상으로 불러들이신 걸 겁니다... 간절한 마음을 다해, 고인에게 주의 축복을 바라겠습니다.”
“...?!”
슬쩍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 내가 깍지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겔베르트.
저 양반, 지난번 클루게 남작의 연회가 끝나고 나왔을 때도 저런 표정으로 나를 봤었다.
하긴 뭐, 평소 신앙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의 입에서 신실한 교인이나 할 법한 대사가 술술 나오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얼굴을 확인한 부제가 어두웠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 가장 먼저 달려와서 저희를 구해주셨던 그분이시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 부제님. 저는 푸른 방패 용병대의 데미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감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송할 뿐입니다.”
“죄송하다뇨?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희가 조금 더 빨리 왔다면 희생자가 줄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내 모습을 보며 니콜라오 부제가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데미언 형제님과 동료 분들 덕에 나머지 순례객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문득,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나의 얼굴을 확인한 부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데미언 형제님께선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
“아,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내 나이를 들은 부제가 입을 벌리며 놀라는 게 보인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감정 표현이 참 솔직하네, 이 친구.
“예, 내년에 성년이 됩니다.”
“허... 제가 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보통 형제님 나이에 오크를 잡아내는 것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그 잡아내기 힘든 오크를 홀로 아홉 마리나 쓰러뜨렸다.
검에 문외한인 부제가 보더라도 확실히 평범한 수준은 아니게 보일 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운이 좋은 이라고 한들 주의 품을 벗어난 흉폭한 마수들을 아홉이나 홀로 상대할 순 없을 겁니다. 데미언 형제님께서 저희를 구하셨습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대장님을 비롯해 저희 용병대 동료 전원이 함께한 결과였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르닌의 자식으로서, 그의 어린 양을 구하는 일에 어찌 주저함이 있겠습니까?”
“하아...”
내 입에 쏟아져나오는 대답을 들은 니콜라오 사제가 진심 어린 감탄을 터트린다.
“데미언 형제님께선 매서운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마음의 땅까지 단단하게 다지셨군요. 이토록 어린 나이에 어찌 이런 성취를... 거듭 놀라울 뿐입니다.”
“성취랄게 있겠습니까? 그저 주 아르닌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그의 첫 번째 종이었던 ‘선지자’ 하인델 님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옆에 있는 겔베르트의 입이 점점 더 벌어지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애써 그 모습을 모른 척했다.
“오늘 데미언 형제님께서 오크를 쓰러뜨리시는 모습은 마치 성기사(聖騎士)들의 영광된 검을 보는 듯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기사라니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말씀이십니다. 저의 부족한 실력이 어찌 성스러운 아르닌의 검에 비하겠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우신 말씀입니다.”
오크를 잡아낸 나의 활약을 성기사에 비유하는 부제에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성기사에 비견될만한 대단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는, 어린 나이의 검사(劍士).
심지어 그런 이가 성직자조차 감탄할 만큼 신실한 믿음을 지녔다.
이건 뭐 영웅 신화에나 나올법한 그런 인물의 이야기 아닌가!
‘크으, 진짜 내가 생각해도 개 멋있는 캐릭터다!’
스스로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에 나조차 취해있던 그때, 내가 하는 꼴(?)을 어이없이 지켜보고 있던 겔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 부제님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다친 분이 워낙 많아서, 이대로 순례를 계속하시긴 힘들 것 같은데...”
“아, 그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고민하고 있던 니콜라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겔베르트에게 물었다.
“으음... 사실 제가 이 지역 지리를 잘 몰라서,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혹시 조언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니콜라오의 목소리에서 지금껏 보여준 성직자로서의 엄숙함 대신 도움을 바라는 이의 간절함만이 느껴졌다.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이후 부제가 되어 성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니콜라오.
하지만 신실한 성직자로서의 경험을 빼놓고 본다면, 아직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성지순례 행렬 도중 오크 떼의 습격이란 갑작스러운 횡액을 당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신부를 잃고, 서른 남짓 남아 있는 성지순례객들을 이끌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상황.
그러던 중 자신들을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베테랑 용병대장의 존재는 실로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불빛 같았으리라.
“음... 일단은 다친 분들을 치료하고 이런저런 상황을 챙겨야 하니, 가까운 마을에 들러 재정비를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 그렇다면 어디로...?”
“여기서 남동쪽으로 두어 시간 이동하면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델멘부르크 영지의 주도인 민슈타트(Minstadt)와 가장 가까운 마을인데, 규모가 꽤 커서 다친 순례객들이 충분히 치료받고 쉴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날이 밝는대로 움직이시죠.”
“아, 그럼 혹시... 저, 그...”
무슨 말을 하려는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니콜라오 부제.
그 모습을 지켜본 나와 겔베르트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 이거, 받아야겠지?’
‘받으세요. 어차피 가는 길 아닙니까?’
‘좋아.’
찰나의 의견 교환 후, 겔베르트는 니콜라오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성지순례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리트베르크 영지를 거쳐 신성교국으로 향할 계획이셨겠지요?”
“아! 예예, 맞습니다.”
“마침 저희도 리트베르크 영지에 일이 있어서 그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기왕 이리된 거... 저희 용병대와 동행하시죠. 그러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그,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저희야 너무 감사하지만...”
겔베르트의 반색하던 니콜라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다시 어두워진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용병대의 보호를 받으며 리트베르크로 가는 건 너무나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절대 공짜로 자신들의 능력을 빌려주지 않는 이들 아닌가?
요컨대, 지금 니콜라오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 건 돈 문제였다.
하지만 겔베르트는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일반적인 용병과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땅 위에서 종교가 지닌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용병 대금에 대한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부제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
평소엔 보기 힘든, 무척이나 인자하고 신실한 미소를 지으며 겔베르트가 말했다.
“성지(聖地)로 향하는 주 아르닌의 어린 양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어찌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오오! 감사합니다, 대장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푸른 방패 용병대에게 신의 가호가 내릴 것입니다!”
감격한 니콜라오가 겔베르트의 손을 잡으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별말씀을. 하하하!”
그리고 그런 니콜라오의 인사를 받는 겔베르트의 얼굴엔, 어딘가 나를 닮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그로부터 열흘 후,
“... 하아, 드디어 왔네.”
우리는 신성교국과 맞닿아 있는 왕국 최남단의 영지,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Rittren)에 도착했다.
< 리트베르크를 향해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