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의 시작 (1) >
리트베르크(Rittberg).
신성교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펠리노어 왕국 최남단의 영지.
영지의 크기 자체도 작은 편이었고, 구리나 철, 금이나 은 같은 이렇다 할 광물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리트베르크는 늘 부유한 살림을 유지해온 영지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 리트베르크는 왕국에서 육로를 통해 신성교국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 조건이죠.”
일행의 중간에서 리트베르크 영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겔베르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니콜라오 부제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겔베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보였다.
존댓말을 쓰는 겔베르트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애초에 이 이야기는 그에게 들려주기 위한 설명이었다.
‘... 어이구, 뭔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 듣는 손자 같은 표정이네.’
니콜라오의 저런 표정이 이해는 갔다.
지금껏 아르닌 교의 울타리 내에서 신(神)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듣고 살았으니,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다.
‘... 신부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위치까지 가려면, 신앙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지.’
세상 모든 조직이란 게 다 그렇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선 정치력과 금력(金力)이 필요한 법.
지금 겔베르트가 해주는 이야기 속엔 왕국 남부의 보잘것없던 작은 영지 리트베르크가 어떻게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땅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듣는 니콜라오에게 달린 것이겠지.
아무튼, 겔베르트는 저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매년, 아니 매달 왕국 각지에서 출발한 성지순례객들이 신성교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듭니다. 하지만, 과거 리트베르크의 영주들은 그걸 보고도 별생각을 하지 못했죠. 뭐, 사실은 조금은 귀찮아했을 겁니다.”
“귀찮... 아 했다고요?”
성지순례객들을 ‘귀찮아’했다는 표현에 놀란 니콜라오 부제가 눈을 크게 치뜨며 되물었다.
마치 대단한 신성모독이라도 들을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본 겔베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성직자가 듣기엔 조금 거북한 표현일 수 있겠군요. 하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입장에서 성지순례객이란 너무나 신경이 쓰이는 존재죠. 영지민도 아닌 자들이 성지순례라는 무시할 수 없는 명분을 가지고 내 땅을 함부로 돌아다니니까요.”
“아...”
“그래서, 과거 리트베르크의 영주들은 아예 성지순례객들을 도시 안으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 땅에 머물지 않고 지나갈 목적인 사람들이니까요. 대신, 도시 바깥에 임시로 천막을 세워주고 그곳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신성교국 측에게 밉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그 관례를 깬 사람이 나타났죠. 그가 바로 리트베르크의 전전대 영주, 데틀레프 아르펜 남작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얘기에 끼어든 나를 보고 겔베르트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말을 자른 것에 대한 짜증보다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라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 왜요?”
“아, 아니... 데미언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어떻게 알다뇨?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고... 이런 건 책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얘기잖아요? 왕국 남부 지역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데, 이런 기본 상식은 챙겨둬야죠.”
내 입에서 나온 ‘기본 상식’이라는 표현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겔베르트였다.
상식이란, 보통의 용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내 용병대 부하 놈 중에 상식을 따지는 놈이 나올 줄이야... 상식, 상식이라... 허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혼잣말을 중언부언 떠드는 겔베르트를 뒤로 하고, 나는 눈을 빛내고 있는 ‘학생’ 니콜라오를 위해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남작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일 같이 자신의 땅으로 몰려오는 성지순례객들을 ‘손님’으로 대하면 어떨까?”
“손님이요?”
“예. 데틀레프 이전의 영주들은 성지순례객들을 그저 말 안 듣는 불청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어요. 그는 성지순례객들을 신성교국이라는 ‘여행지’로 향하는 길에 리트베르크라는 ‘여관’에 들린 손님으로 생각한 거죠.”
“아...”
“생각의 전환은 완전히 다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성지순례객들을 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이 땅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생겨났죠. 바로...”
스윽, 니콜라오를 바라보던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니콜라오도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델멘부르크나 노이베른 등 주변의 다른 영지들과 비교해 작은 넓이를 지닌 리트베르크.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저 도시는 델멘부르크의 주도 민슈타트(Minstadt)나 노이베른의 주도인 토르비스(Torbis)에 비해 훨씬 큰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 저기 보이는 저 도시,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이 바로 그 가능성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어, 어떤 일이 있었죠?”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니콜라오.
한참 동생뻘인 나에게 답을 구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뭐, 사실 저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 계속 아는 척하는 게 좀 민망한데... 원래는 저 도시가 있던 자리에 순례객들을 위한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네요.”
“와아...”
내 말을 들은 니콜라오의 입에서 감탄이 터진다.
“데틀레프 아르펜 남작이 발상의 전환을 한 후 3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성지순례객들을 위한 천막이 세워져 있던 그 땅에 리트베르크 최대의 도시가 들어서게 되었죠. 도시의 성장을 가속하기 위해 전대 영주인 막스 아르펜 남작은 아예 영주성을 리트렌으로 옮기기까지 했다네요.”
“아하? 그럼, 원래 리트렌이 영지의 주도가 아니었다는 소리네요?”
“네. 예전의 주도는 좀 더 북쪽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니콜라오와 내가 리트렌의 역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우리 일행은 도시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이미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이나 복잡했는데, 가죽 갑옷에 기다란 할버드를 손에 쥔 병사들이 2인 1조로 늘어서서 도시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우, 저거 또 기다리려면 한나절 걸리겠네. 경비병 새끼들 빨리빨리 일처리 안 하나?”
길게 늘어선 줄을 본 엔리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투정이 이해는 간다.
한시라도 빨리 여관에 들러 오랜 야영 생활에 지친 몸을 누이고 싶겠지.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짜증을 내다가 경비병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아주 고달픈 신세가 될 텐데...
“... 입 다물어라.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일행 전체 엿 먹이지 말고.”
아니나 다를까, 엔리케의 뒤에 서 있던 부대장 메이슨이 묵직한 목소리로 경고를 전했다.
“아, 알겠슴돠... 크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메이슨의 말이다 보니 금세 찌그러드는 엔리케였다.
“후우,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은데... 그전에 들어갈 수 있을... 엥?”
메이슨에게 한 소리를 듣고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엔리케의 눈에, 성문 앞 경비병 쪽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니콜라오 부제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대장! 저 양반 말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저러다가 경비병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그런 엔리케의 걱정과 달리 니콜라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겔베르트의 얼굴은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겔베르트를 대신해서 내가 나섰다.
“아이참, 조장!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니콜라오 부제가 그동안 우리한테 신세 진 거 갚겠다고 저렇게 나섰는데, 그걸 눈치 없이...”
“잉? 신세를 갚아? 아니, 이제 처음 이 동네 와본 양반이 뭘 안다고 저렇게 나서? 괜히 큰일만 치르는 거 아냐?”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아는 사람이죠.”
“음? 그게 뭔 소리야?”
말 대신 직접 보라는 의미로, 나는 멀리 니콜라오 부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 음? 경비병들 표정이 나쁘지 않은데?”
“아마 니콜라오 부제는 자기가 성지순례객들을 인솔해온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을 겁니다. 리트렌은 기본적으로 성지순례객들에게 친절한 도시이니, 경비병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을 수밖에요. 거기에 니콜라오 부제가 교에서 서품을 받은 정식 성직자이니, 운이 좋으면 그와 함께 온 일행에 대한 신원 확인 절차도 간소화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침착한 설명을 들은 엔리케가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막내 너는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보자마자 하냐? 진짜 똑똑한 것 같아.”
“제가 똑똑한 게 아니라 조장이 좀 모자라는 거 아닐까요?”
“뭐? 아니, 이 새끼가!”
나에게 놀림을 받은 엔리케가 버럭 하려던 차,
“허억, 허억! 됐습니다! 경비병이 저희를 들여보내 주겠다네요! 저를 따라오시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리 곁으로 돌아온 니콜라오 부제가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와아, 여긴 무슨 여관이 이렇게 많냐?”
도시 안으로 들어선 우리의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끈 것은, 거리 양쪽으로 가득한 여관들의 간판이었다.
‘신성한 맥주’, ‘성전(聖戰)의 다락방’, ‘축복의 이부자리’, ‘신탁의 보금자리’...
누가 성지순례객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여관들 아니랄까 봐 죄다 이름에서 종교적 색채가 느껴졌다.
그중에서 우리 용병대의 선택을 받은 곳은 ‘축복의 이부자리’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잠자리가 고팠던 우리의 소망을 반영한 선택이었다.
“자, 그럼...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리트렌에 도착한 이후, 우리는 함께 온 성지순례객들과 자연스럽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감사의 눈물을 보이며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액수나마 성의로 받아달라며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의 인사말을 제외한 그 어떤 돈이나 물품도 받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 받아 챙기느니 푸른 방패 용병대의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온 모든 성지순례객을 떠나보낸 이후 우리는 니콜라오 부제와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부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더욱 훌륭한 성직자가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겔베르트 대장님. 푸른 방패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절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여기저기 소문 좀 내어 주십시오. 용병대 푸른 방패가 신실하고 정의롭다는 얘기로요.”
“물론입니다. 교에도 이번 일을 보고하여 푸른 방패의 선행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하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겔베르트가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린다.
한편, 나는 여관 ‘축복의 이부자리’에 짐을 풀고 주변 구경을 하러 거리로 나와 있었는데...
“... 음?”
여관 근처에 자리한 도시 광장 분수대 주변에서 내 눈길을 확 잡아끄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혹시 저 꼬맹이...”
나와 비슷한 금빛의 머리칼을 지닌 작은 여자아이.
그저 뒷모습만 바라보았을 뿐인데, 나는 그 아이에게서 운명과도 같은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 모든 것의 시작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