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2화 (28/197)

< 모든 것의 시작 (2) >

“아가씨, 곧 해가 질 겁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시지요. 너무 늦으면 영주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칫! 또 그 얘기 하는 거야? 이제 그런 속임수는 안 통한다고 내가 지난번에 분명 말했을 텐데?”

리트베르크 영주성 앞에 만들어진 도시 광장의 한 가운데.

쉬지 않고 맑은 물을 뿜어내는 대리석 분수대에 걸터앉아 입술을 비쭉 내미는 소녀가 있다.

예쁘고,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미(美)를 묘사하는 세상 모든 수식어를 다 가져다 늘어놓아도 과하지 않을 외모를 지닌 소녀였다.

아직 여인이라 부르기엔 한참은 어린 나이임에도,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고 끌어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뾰로통한 모습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엔 빈틈없는 단호함이 떠올라 있을 뿐이다.

“속임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이곳이 영주성 코앞이라고는 하지만 집 밖에 나간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시는 겁니까.”

소년은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깊고 진한 검은 눈동자엔 총명함이 깃들어 있고, 탄탄한 근육이 올라붙은 길쭉한 팔다리에 훤칠한 키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모습이다.

소년의 이름은 아드리안(Adrian).

올해 열여섯이 된 그는, 리트베르크 영지의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軍務官)인 데론 베르켈의 종자이자...

“아무튼 싫어! 영주성은 답답하단 말이야. 밖에 나오면 이렇게 경치도 좋고 재미난 것도 많은데...”

분수대 위에 걸터앉아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떼를 쓰고 있는 영주의 열두 살 난 외동딸, 니나 아르펜의 호위를 담당하는 이였다.

사실, 정식으로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한낱 종자에게 영주의 천금이라 할 수 있는 외동딸의 호위를 맡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영지 최강의 기사, 데론 베르켈이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소년.

아직 설익고 부족한 면이 분명 있었지만, 소년은 그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아 지금의 임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방금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아드리안이 니나에게 말한다.

“리트렌 거리 곳곳에 영주성 안에서 느끼지 못할 새로운 즐거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초에 전 이 거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아, 맞네! 아드리안은 베르켈 경의 종자가 되기 전엔 영주성 밖에 살았지?”

“예.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영주성에 들어왔고, 그 전까진 도시 서쪽의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엄청 춥고, 늘 배고팠던 시절이죠.”

“아...”

아드리안의 입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미안한 감정이 차오른다.

“그, 미안해. 아드리안.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평소엔 또래 꼬마들과 다를 바 없이 떼를 쓰고, 말을 안 듣는 일이 잦은 소녀 니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소녀.

그런 니나의 모습에 아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제 다 지난 일인 걸요. 아무튼... 도시의 거리는 재밌고 신나는 일들로만 가득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험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일들이 언제건 벌어질 수 있지요. 그걸 알고 계시기에 영주님께서도 늘 걱정하시는 거고요.”

“우웅...”

“저를 비롯해 믿음직한 호위병들이 늘 곁에서 아가씨를 지키고 있지만, 위험은 예측할 수 없기에 위험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언제든지 제가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아가씨도 꼭 아셨으면 합니다.”

“응, 아드리안. 고집부려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이제 영주성으로 돌아가실까요?”

“응! 얼른 가자.”

언제 말을 안 들었냐는 듯, 걸터앉아 있던 분수대에서 내려와 영주성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니나.

바로 그때,

‘... 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묘한 시선.

아드리안은 급히 니나의 등 뒤에서 그녀의 몸을 가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

돌아선 아드리안의 눈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명의 소년이 보였다.

자신의 등 뒤에 선 소녀, 니나의 머리칼과 비슷한 금빛의 머리를 지닌 소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살짝 갈색빛이 도는 니나의 금발과 달리 눈앞의 소년은 눈부실 정도의 진한 금빛 머리를 가졌다는 것.

뉘엿뉘엿 성벽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한낮의 환한 빛을 잃었음에도, 소년의 머리는 그 한풀 꺾인 노을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소년은 잘 손질된 가죽 갑옷 차림에 팔꿈치 보호대를 하고 허벅지 부근에 검은 묵빛의 단검을 꽂고 있었다.

기다란 장검이나 도끼 같은 위협적인 날붙이는 아니었지만, 세상엔 단검 한 자루로 한 무더기의 사람을 쓰러뜨리는 실력자도 존재한다.

혹시 저자가 영주의 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접근한 자라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벤다!’

본디 호위의 기본이란 아주 작은 위험의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검이 매여진 허리춤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간 아드리안이, 큰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물으려던 그때...

“... 어?”

무언가를 발견한 아드리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가, 갑자기 저게 무슨...’

허리춤으로 향하던 아드리안의 손을 멈추게 할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 우, 울어? 뜬금없이?’

그랬다.

아드리안의 시선 끝, 찬란한 금빛의 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소년.

그 소년의 신비로운 녹색 빛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주륵-

‘.... 어, 뭐야?’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울려고 한 것도 아니고,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감정이 확 올라와서 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눈앞에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나의 몸이 반응한 것이다.

‘하, 이건 진짜...’

스스로에게 물었다.

슬퍼서 울었나?

아니다.

이것만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기뻐서 운 것이다.

너무 기뻐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구나, 니나!’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지 2년 반 만에, 마침내 나는 너를 만났다.

니나 아르펜(Nina Arfen).

지난 생애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게임 ‘로스트 킹덤’의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의 주인공.

나는 그 소설에 오랫동안 미쳐 살았던 골수 팬의 한 명이었다.

얼마나 그 소설을 사랑했는지, 하다하다 소설의 내용을 직접 각색해 만든 게임 시나리오를 들고 가 회사의 운영진을 설득했고, 마침내 게임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게임 제작이 확정된 뒤, 원작자를 만나 밤새도록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내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이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 모두가 사랑한 소녀, 니나를 게임 속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를 수백 번도 더 고백했지.’

니나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남녀 간의 사랑이나 아이돌을 바라보는 뜨거운 팬심 그 이상의 감정으로, 나는 니나를 아끼고 또 아꼈다.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일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았다.

소설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는 누가 뭐래도 니나 아르펜의 이야기.

표지가 닳도록 원작 소설을 읽고, 너무 몰입한 나머지 건강을 해칠 만큼 게임 제작에 몰입했던 내가 그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 우리 니나, 모니터로 봤던 것보다도 훨씬 예쁘네.’

마침내 만나게 된 니나는, 모니터 속에 그래픽으로 그려진 것보다 훨씬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니나 아르펜, <로스트 킹덤> 속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

그리고, 지난 생애 결혼의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했던 내가 가슴으로 낳아 기른 딸.

그 대단한 운명을 짊어진 소녀가, 갈색 머리 소년(아마도, 아드리안일 것이다)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드리안, 저 사람은 왜 이쪽을 보면서 울고 있는 걸까?”

“...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멈칫했던 아드리안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온 니나의 목소리였다.

“아가씨, 제 뒤에 계십시오!”

단호한 목소리로 니나에게 경고한 아드리안이 힘껏 자신의 검을 뽑아낸다.

촤아앙-!

“움직이지 말고 멈춰라!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너의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아드리안의 손에 들려진 검이 금빛 머리의 소년을 흔들림 없이 겨눈다.

안정된 자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발검.

과연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의 종자다운 실력이었다.

한편, 아드리안의 경고를 받은 ‘금빛 머리의 소년’, 데미언은 턱 끝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며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후 자신의 양손을 바닥에 대며 자신이 저항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용병대 ‘푸른 방패’의 데미언이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이 여기 계신지 모르고 함부로 접근한 점, 머리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

그야말로 깔끔한 대응이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귀족에 대한 예를 갖추었고, 손바닥을 바닥에 대는 것으로 자신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간결하게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고 예법에 걸맞은 사죄까지 곁들이니, 그런 사람을 상대로 검까지 뽑아 든 아드리안이 민망한 얼굴로 재차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런데 갑자기 눈물은 왜 흘린 것이냐!”

“이곳 분수대를 보니, 제가 어릴 적 병으로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살아생전 꼭 한번 다시 이곳 리트렌에 오고 싶다고 하셨던 기억이 생각나서 그만... 흐으윽!”

“...”

가히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른 데미언의 혓바닥이 춤을 춘다.

겉으로 보기엔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 속은 나이 마흔에 가까운 닳고 닳은 아저씨.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럴듯한 사연을 주워섬기니, 뛰어난 검의 재능과 별개로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열여섯 소년 아드리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흠, 큼! 내가... 오해를 했군요.”

스르릉, 탁!

뽑을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검을 회수한 아드리안이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을 모시는 입장이라, 예민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일어나시지요.”

아직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나이도 어린 터라 어지간하면 상대에게 존댓말을 하는 아드리안이었다.

영주성에서 일하는 말단 하인조차도 자신이 뭐라도 되는 마냥 다른 이들에게 으스대는 것을 생각하면, 아드리안의 그런 행동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한 게 잘못이지요. 그... 귀하신 분께도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언이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를 받은 당사자, 아드리안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소녀 니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의젓하게 답한다.

“크흠! 서로 간의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니, 사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요! 어, 음...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아드리안, 빨리 가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선 니나가 영주성을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껏 어른스러운 척 해보려 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그 말투.

금세 영주성 안쪽으로 사라지는 니나와 그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수대 광장에 남겨진 데미언이 미소를 지었다.

“또 보자, 니나.”

< 모든 것의 시작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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