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3화 (29/197)

< 드리우는 전운 (1) >

[... 니나 아르펜은 크고도 맑은 눈, 과하지 않게 높으면서도 매끄럽게 뻗어 내려오는 오똑한 코, 꽃잎처럼 붉고 생기 넘치는 입술에 병약하기보단 깨끗한 느낌에 가까운 흰 피부와 풍성하게 물결 져 내려오는 금갈색의 머리칼을 지닌 어린 소녀였다.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니나의 얼굴이 꽃이라면, 그녀의 선이 곧고 날씬한 몸과 하늘하늘한 팔다리는 꽃의 줄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줄기 끝에, 신이 빚은 듯 가늘고 섬세하게 조각된 손과 발이 이슬을 머금은 잎처럼 맺혀있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게 자라난 키에 적절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균형을 이뤘다.

니나 아르펜, 리트베르크 영지의 모든 이가 사랑하는 이 열두 살의 소녀는, 그 자체로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 소설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 내용에서 발췌 -

***

“어우, 시원하다. 으흐흐흐!”

불어오는 바람을 맞은 엔리케가 노인네 같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우리가 리트베르크 영지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다.

여름을 지나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계절.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엔 한동안 잊고 살았던 차가움이 실렸고, 감히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따가웠던 햇볕이 한결 부드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아,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농땡이 피우는 거냐. 너무 놀아서 뼈가 삭겠다.”

“참나, 농땡이는 무슨... 우리 지금 일하는 중인 거 몰라요?”

리트베르크 영지 내에서 활동하는 작은 상단의 호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호위 과정에서 만난 적이라곤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들개들과 최하급의 몬스터인 고블린 대여섯 마리 정도.

그야말로 ‘개꿀’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쉬운 의뢰였는데, 엔리케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야, 아무리 날카로운 검도 쓰지 않고 있으면 녹스는 법이야.”

“... 조장은 원래 칼 안 쓰잖아요? 활만 주야장천 쓰는 양반이?”

“아니 근데 이 자식이! 하늘 같은 선배가 말하는데 사사건건 시비냐? 엉?”

“하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발끈해 소리를 지르려는 엔리케를 웃는 얼굴로 다독이며, 나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배부른 소리 말고요, 쉴 수 있을 때 푹 쉬세요.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으응? 그건 또 뭔 소리냐? 너 대장한테 뭐 들은 얘기 있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는 엔리케.

“아니요,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에요.”

“느낌? 느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네가 뭐 점쟁이냐? 어?”

툴툴거리는 엔리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나는 저 앞에서 일행을 이끄는 겔베르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번엔 죽지 않을 겁니다, 대장.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신성력(神聖歷) 782년 9월의 어느 날.

바야흐로, 내가 기억하는 <로스트 킹덤>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리트베르크의 주도(主都), 리트렌의 중심에 자리한 영주성.

“하아...”

성의 주인이자, 리트베르크 영지의 지배자이며, 아르펜 가문의 9대 가주이기도 한 바일 아르펜(Weil Arfen) 남작이 자신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 늙은이가 끝끝내 이런 짓까지...”

꾸깃- 탁!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구겨 책상 위로 던져버린 남작이 고개를 떨군다.

똑똑,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누가 왔는지 잘 알고 있는 영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 들어오시게.”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오는 한 사내.

몸 전체를 덮은 검은색 사제복 차림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친 그의 이름은 마르셀로(Marcello).

남작과 함께 영지 내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서기관(書記官)이자, 주도 리트렌 성당의 주임신부였다.

“영주님, 찾으셨습니까.”

“급하게 불러 미안하네, 마르셀로.”

“아닙니다, 영주님. 헌데... 무슨 일이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일단... 이 빌어먹을 서신에 쓰인 내용부터 확인하고 그 후에 얘기 나눔세.”

“... 예.”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쥔 채 책상 위를 나뒹구는 종이쪼가리를 가리키는 남작.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마른침을 삼킨 마르셀로가 구겨져 있던 종이를 들어올려 그 내용을 확인한다.

“흐음...!”

곧, 마르셀로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탄식.

그 반응을 본 남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바덴하임의 늙은 노괴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게지.”

“하아... 정말, 황금백의 탐욕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남작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듯, 잔뜩 구겨져 버린 서신의 끝자락에 쓰인 이름을 본 마르셀로가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다.

헤르만 바이츠제커 폰 바덴하임(Hermann Weizsacker von Badenheim).

그는 펠리노어 왕국 남부에서 가장 넓은 땅인 백작령(伯爵領) 바덴하임의 주인이자, 왕국 남부의 상권을 지배하는 카폴리노(Capollino) 상단의 소유주인 바이츠제커 가의 당대 가주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언급할 때 ‘바덴하임 영주’나 ‘바이츠제커 가주’라는 표현 대신 다른 칭호를 주로 사용했으니, 그것이 바로 방금 마르셀로의 입에서 나온 표현인 ‘황금백(黃金伯)’이었다.

“미친 늙은이, 남은 인생 산처럼 쌓아놓은 돈이나 쓰다 죽을 것이지...”

“황금백이 괜히 황금백이겠습니까? 백작은 돈을 쓰는 재미보다 돈을 벌어들이는 재미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 그래, 그 늙은이가 뭘 하고 살든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쾅!

화를 참지 못하고 내리친 남작의 주먹에, 책상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낸다.

“... 그 개 같은 짓거리에 내 딸을 도구로 쓰려고 들다니!”

그랬다.

아주 오래전부터 리트베르크 영지가 지닌 경제적 가치를 탐냈던 바덴하임 백작.

리트베르크를 집어삼킬 명분을 찾아 고심하던 그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외교적 수단, ‘결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아들과 남작의 딸인 니나의 혼담을 제안한 것이다.

“여섯 번째? 아니, 일곱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라 했던가? 우리 니나와 결혼시키겠다며 백작이 등 떠민 그놈 말이야.”

“제가 알기론 일곱 번째 부인의 자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로 예순넷이 된 바덴하임 백작은 권력과 재물에 대한 기이한 열망만큼이나 성욕도 대단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일곱 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무려 열여덟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다.

그 열여덟 명의 자식 중 아들은 여섯 명이었다.

첫째 부인에게서 일찍 얻은 장남은 나이 마흔이 다 되었고, 이미 자작(子爵)의 작위를 수여 받아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작의 나머지 아들들은 차기 권력자인 큰형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가문의 주력 사업인 상단 일을 배우고 있었고, 왕립사관학교 출신의 넷째 아들은 왕국군 소속의 장교로서 군에 복무 중이었다.

다섯째 아들은 괴질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여섯째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린 지라 가문 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백작은 바로 그 여섯째 아들을 남작의 딸인 니나의 배필로 제안한 것이다.

“내 백번 양보해서 결혼까지는 좋다 이거야. 황금백의 평판이 안 좋다지만, 그거야 저잣거리 술꾼들끼리나 떠드는 소리 아닌가?”

“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백작의 가문과 혈연으로 맺어져 나쁠 것이 없지요. 어찌 되었건 왕국 전체에 이름 높은 명문가와 사돈이 되는 일이니까요.”

“그래, 자네 말대로 바이츠제커 가문은 왕국 내에 손꼽히는 명문가일세. 그런 가문에 딸을 시집보내는 건 나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지. 헌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남작이 하려던 말을 마저 털어놓는다.

“... 내 소중한 딸의 배필로 내놓겠다는 그 막내아들 놈이 천하의 개망나니라는 건, 아비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일세!”

남작의 입에서 나온 개망나니라는 표현에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바덴하임 백작의 막내아들, 오트만 바이츠제커는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나이임에도 온갖 지저분한 추문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나이도 어린놈이 어찌나 여색을 밝히는지, 바덴하임 영지의 주도 그라이츠(Greiz)의 이름난 창관 직원들이 모두 오트만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놈, 매일매일 창관을 들르는 건 예삿일이고 하루에 두세 번씩 여자를 품는 일도 그다지 드물지 않다고 들었네.”

“... 제 아비인 바덴하임 백작으로부터 그 무자비한 성욕만은 확실히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크흠!”

아무래도 성직자인 만큼 이런 쪽(?)의 일을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마르셀로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뿐인가? 타고난 성품이 개차반이라 예의범절을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가문 내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도 함부로 손찌검을 한다고 들었네. 세상에, 그게 어디 사람 새끼인가? 망종이지!”

말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을 사위로 삼으라며 계속해서 권하는 바덴하임 백작의 얼굴에 술이라도 한잔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벌써 세 번이나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백작도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럼, 대단하지. 얼굴 두꺼운 것으로 왕국 제일이라 불리는 사람 아니던가. 후우...”

한숨을 내쉬는 남작의 시선에 그가 구겨서 던져버렸던 서신의 내용이 들어왔다.

바덴하임 백작의 여섯째 아들이자 천하의 개망나니로 불리는 오트만 바이츠제커.

바덴하임과 리트베르크 사이에 오가는 불편한 혼담의 당사자인 그가, 직접 귀한 선물을 가지고 남작을 찾아오겠다는 내용이 구겨진 서신에 담겨 있었다.

“차라리 잘됐네. 이번에야말로 내 직접 그놈에게 혼사의 의향이 없음을 알려줘야지... 큼, 마르셀로.”

“예, 영주님.”

딸을 둔 아버지에서 영지의 절대자인 영주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상대가 아무리 천하의 이름난 망나니 놈이라지만, 백작의 아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일일세. 그 격에 맞추어 부족함 없이 준비해주길 바라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영주님.”

***

리트베르크 영지와 맞닿은 바덴하임 영지 남부의 어느 평원 지대.

한눈에 봐도 값비싼 고급의 마차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흐흐, 그렇게 예쁘다던 남작 딸년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겠네.”

마차에 올라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젊은 사내가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그나저나, 이 시건방진 남작 새끼가 감히 바이츠제커 가문의 핏줄인 나를 세 번이나 깠단 말이지... 하! 어디 내 앞에서 그딴 개소릴 지껄일 수 있나 두고 보자.”

천하의 개망나니로 이름 높은 바덴하임 백작의 여섯 번째 아들, 오트만 바이츠제커.

그가 이끄는 바덴하임 영지의 사절단 행렬이 리트베르크에 진입했다.

< 드리우는 전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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