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4화 (30/197)

< 드리우는 전운 (2) >

우리 용병대의 거점으로 쓰이고 있는 리트렌의 여관 ‘축복의 이부자리’.

여느 여관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1층엔 투숙객들을 위한 식당이 운영되고 있었다.

바로 그 식당에서 조금은 이른 저녁을 먹고 있는 엔리케와 나.

대장 겔베르트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은 리트렌 영지군에서 의뢰한 도시 근처 숲속으로 정찰 임무를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급한 대로 우리 두 사람만 식사를 챙겨 먹고 있었다.

“막내야, 너 그 소문 들었냐?”

“뭐요?”

하도 쓸데없는 흰소리를 많이 하는 엔리케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대답에 진심이 실리지 않았나 보다.

“아이... 인마! 대답에 영혼이 없냐 너는?”

“크흠, 티 났어요?”

“어, 많이.”

“어이고, 죄송함돠아-!”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선배에 대한 예우로, 나는 들고 있던 포크와 숟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공손한 자세로 맞은 편에 앉은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자, 존경하는 선배니임-! 이 후배, 귀한 말씀 들을 준비됐습니다.”

“옳지, 그래야지.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구나, 후배야. 하하하!”

“아니, 그래서... 아까 하시려던 말이 뭔데요? 뭔 소문?”

“맞다, 그 얘기 하다가 말았지?”

잠시 방향을 잃었던 대화의 고삐를 다시 잡아챈 엔리케가 자신이 들은 소문을 이야기한다.

“여기 영주 있잖냐, 리트베르크 남작 말이야.”

“예.”

“그 양반한테 외동딸이 하나 있는데, 나이가... 몇 살이랬더라?”

나도 모르게 ‘열두 살’이라고 대답이 나오려 한 것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우리 니나... 얼굴 본지가 꽤 됐다.

분수대 앞에서 눈물 질질 흘리면서 처음 봤던 게 벌써 꽤 되었다.

‘근데 그 이후론 한 번도 보질 못했네. 요즘은 아예 성 밖으로 나오질 않는 것 같던데...’

아마도, 아버지인 남작에게 함부로 성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 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싶다.

“아, 맞다! 열두 살이다, 열두 살! 이제 기억났네.”

“그래서, 그 열두 살짜리 딸이 왜요?”

대충 뭔 소리를 하려는 지 감이 왔지만, 일단 모른 척하기로 한다.

“여기 옆 동네 사는 바덴하임 영주 황금백 있잖아? 돈 겁나 많은 양반. 알지?”

“예예, 알죠.”

“그 양반 막내아들이 며칠 전에 여기 리트렌에 왔대. 남작 딸이랑 결혼한다고.”

“결혼이요? 남작 딸이 열두 살이라면서요? 그 나이에 무슨 결혼을...”

“원래 귀족들은 어렸을 때 미리 결혼할 가문 정해놓고 그러잖아. 얘네도 그러는 거지 뭐.”

“아하...”

“근데, 열두 살이면 엄청 어리긴 하네. 결혼이 뭔지는 알려나?”

“에이, 조장한테나 엄청 어리죠, 저랑은 몇 살 차이 안 나요. 나랑 겨우 다섯 살 차이구만 뭘.”

“... 헐?”

내 말을 들은 엔리케가 새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우, 맞네. 데미언 너 이제 열일곱이지? 허허, 맨날 미친놈처럼 싸우는 모습만 보니까 너 엄청 어린 놈이라는 걸 까먹는다야.”

“... 미친놈처럼?”

나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본 엔리케가 허둥지둥 손을 흔든다.

“아니이, 그만큼 잘 싸운다는 얘기를 하는 거... 아무튼!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남작 딸이랑 결혼하겠다고 온 백작 막내아들 놈 말이야. 그 새끼가 아주 망나니도 그런 개망나니가 따로 없대.”

“아...”

엔리케의 말을 듣고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트만 바이츠제커... 아주 유명한 개망나니지.’

오트만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유명한 영화 속 재벌 3세 등장인물의 모습을 많이 참고했다던 원작 소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났다.

‘어이가 없네’라는 명대사를 유행시킨 바로 그 영화였다.

‘그러고 보니 오트만 이 새끼... 슬슬 사고 칠 때가 됐는데?’

***

“이런 시발! 누가 이딴 거 마시고 싶댔어? 술이나 가져와!”

쨍그렁!!!

오트만의 손을 떠난 찻잔이 벽에 부딪혀 요란스레 깨어진다.

“꺄아악!”

차를 가져왔던 시녀가 그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반응은 잔뜩 흥분한 오트만을 더욱 자극했다.

“이 년이 돌았나...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너 죽고 싶어? 어?”

휘웅- 턱!

시녀의 뺨을 후려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오트만의 팔이 누군가의 손에 붙잡힌다.

“뭐야, 이거 안 놔?”

“... 도련님, 진정하시지요. 여긴 바덴하임이 아닙니다.”

주군의 망나니 막내아들을 보필하기 위해 리트베르크로 향하는 사절단에 함께한 바덴하임의 기사 티모 은돌로(Timo Ndolo).

그가 제집 안방에서 하던 버릇 그대로 리트베르크 영주성의 시녀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오트만의 행패를 간신히 저지했다.

“술은 필요 없다, 어서 나가보아라.”

“예, 예예!”

오트만의 팔을 붙잡은 채 비명을 질렀던 시녀를 밖으로 내보낸 티모.

그녀가 완전히 문밖으로 사라진 후에야 그는 오트만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와 동시에 티모의 얼굴로 향하는 오트만의 손바닥!

짜악-!

“이런 건방진 개새끼가 어디서 함부로 주인 몸에 손을 대?!”

“...”

예상했던 결말이었고,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평소 운동은커녕 오입질만 열심히 하고 다니느라 비쩍 꼴은 방탕한 어린놈이었다.

그런 놈이 휘두른 손에 뺨을 맞아봤자 얼마나 아프겠는가.

다만, 주군도 아니고 주군이 거의 버리다시피 한 막내아들에게 ‘건방진 개새끼’ 소리를 듣는 건 충분히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티모 은돌로는 기사의 이름값에 어울릴 만한 마음의 수양을 쌓은 사내.

요동치는 감정을 차분하게 갈무리한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도련님, 지금 도련님께선 바덴하임을 대표하여 다른 영지에 와계신 상황입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 부디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언행? 주의를 해? 하!”

티모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오트만이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 위대하신 바덴하임의 영주, 헤르만 바이츠제커 백작 각하의 피를 이으신 여섯째 아드님 되십니다.”

“잘 아네. 그런 내가, 이따위 좆만 한 남작령에서 잡일하는 천박한 년 따위한테 말 한마디 신경 쓰면서 하는 게 맞아? 응? 다시 한번 말해봐, 친애하는 은돌로 경. 아까처럼 열심히 씨부려 보라고 이 새끼야!”

툭, 툭, 툭,

이죽거리는 말투로 지껄이며 계속해서 티모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오트만.

퍽! 퍽! 퍽! 퍽!

처음엔 가볍게 던졌던 주먹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나중엔 작정하고 감정을 담아 때리기 시작했다.

“...”

오트만의 행패를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하게 받아내는 티모.

하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엔 무수히 많은 흉터가 생겨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바덴하임의 기사로 일해온 한 사나이의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으나, 개망나니 오트만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놈이 아니었다.

“하, 시발... 기분 좆 같네 진짜!”

와장창!!!

한참 시비를 걸어도 티모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엔 방구석에 놓인 다탁과 의자를 걷어차며 행패를 부리는 오트만이었다.

지금 그는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바덴하임의 사절단과 함께 리트베르크에 도착한 지 벌써 사흘째가 되었음에도, 아직 남작의 딸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착 첫날 있었던 사절단 환영 만찬에 남작의 딸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 밤의 연회 자리에도, 그리고 오늘 저녁 만찬에도 마찬가지 이유를 들며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기에, 오트만은 더욱 약이 오르고 화가 났다.

“남작 이 새끼는 지 딸년을 어디 금고에다가 숨겨 놓기라도 한 거야?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데... 에이 시발!!!”

우지직!

넘어뜨린 다탁의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차 부러뜨린 오트만이 씩씩거리며 티모에게 명령했다.

“야! 밖에 나갈 준비 좀 해라.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

리트렌의 여관 ‘축복의 보금자리’_

“... 그래서 숲속 깊은 곳까지 다 들쑤시고 왔는데, 딱히 위협될 만한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는 없더라고. 그래서 그쯤하고 철수했다. 졸지에 삼림욕만 엄청 하고 왔네.”

오늘 있었던 정찰 임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겔베르트.

그런 대장의 앞에 앉아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우습게도 술 한 방울 먹지 않는 나뿐이었다.

“근데, 다른 새끼들은 다 어디 가고 막내인 너만 여기 앉아 있냐?”

“뭐... 몇 명은 피곤하다고 일찍 방으로 올라갔고요, 나머지는 각자 취향에 따라서 밤을 즐기러 흩어졌습니다.”

“일찍 자러 간 사람 중엔 메이슨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엔리케 이 새끼는 보나 마나 ‘그 짓’ 하러 갔지?”

엔리케의 행선지를 추측하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겔베르트.

‘그 짓’이라는 표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그 자식은 진짜... 무슨 발정난 똥개새끼도 아니고...”

“하하하, 신체 건장한 남자가 여자 밝히는 걸 뭐라고 할 수 있나요?”

“아이씨!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그리고 창관에 있는 여자들 말이야, 이놈 저놈이랑 다 잠자리를 해서 안 좋은 병 같은 것도 걸려 있...”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겔베르트의 말이 뚝 하고 끊긴다.

그러더니만,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기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크흠, 어... 음... 저기... 미안하다, 데미언. 네가 너희 어머님께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걸 깜박했네.”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 겔베르트.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유, 진짜! 저 괜찮다니까요? 됐어요, 됐어! 이 얘기는 그냥 넘어가요!”

“킁! 그래, 뭐... 알았다.”

민망한 듯 자꾸만 맥주를 들이켜는 겔베르트.

평소 푸른 방패의 부하들을 대할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깡패 두목이 따로 없는데, 이럴 땐 또 엄청 예의를 차리는 게 신기했다.

‘하긴, 패드립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긴 하지...’

속절없이 비어가는 겔베르트의 맥주잔을 보며, 주인에게 추가로 맥주 주문을 하려던 그때...

콰당탕-!

[크으, 이런 개애- 버러지 같은 새애끼가아!!!]

식당 밖 골목에서 누군가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묵는 여관이 자리한 골목 자체가 술집과 창관 같은 유흥업소가 떼로 몰려 있는 곳이기에, 저런 소음이 들리는 게 딱히 특별할 일은 아니었다.

“어휴, 어떤 새끼가 또 술 처먹고 지랄을...”

늘상 있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내던 겔베르트.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처음의 욕설에 이어 들려온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시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야, 이 새끼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 어른한테 욕지거리야? 네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을... 커흑!]

그것은 분명, 엔리케의 목소리였다.

문제는 마지막 순간 누군가에게 얻어맞는 비명이 들렸다는 것!

“이게 하다하다 술 처먹고 싸움질을 하고... 에이!”

평소 같았다면 ‘저 새끼 또 저러네’ 하면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일.

하지만 왜인지 찜찜한 기분이 든 겔베르트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고,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광경.

퍽! 퍼억! 퍽!

“케흑! 꺽! 쿠엑!”

푸른 방패의 2조장, 은패 용병 엔리케.

그가, 시커먼 로브를 걸친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복날 개 맞듯이 얻어터지고 있었다!

“저 새끼...”

엔리케를 두들켜 패는 사내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본 겔베르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기를 쓰지 않고 주먹과 발길질만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구타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공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뒤에서 잔뜩 술에 취해 휘청거리고 있는 한 남자.

젊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얼굴을 한 그 녀석은 술에 절어버린 눈을 껌벅거리며 쉬지 않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이... 시발!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어디! 감히! 나한테!!! 어?”

그 순간, 쉴 새 없이 욕을 내뱉던 그 남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팟-!

‘... 오호라?’

신화급 스킬, ‘창조주(創造主) 눈’을 사용해 떠오른 상태창을 확인한 내 얼굴엔,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작은 미소가 걸렸다.

『 오트만 바이츠제커 / Lv. 8

소속: 백작령(伯爵領) 바덴하임

클래스: 무직(無職) 』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던 바로 그 녀석이, 내 눈앞에 있었다.

‘... 만나서 반갑다, 바덴하임의 개망나니!’

< 드리우는 전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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