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리우는 전운 (3) >
겔베르트는 신중한 사내였다.
물론, 너무 신중하고 차분해서 이 사람이 진짜 용병이 맞나 싶은 메이슨과 비교하면 충분히 뜨거운(?) 성격이긴 했다.
하지만 엔리케와 같은 보통의 용병들, 예컨대 뭔 일이 생기면 일단 욕지거리를 하고 주먹부터 나가고 보는 그런 ‘열혈’ 종자들과 비교하면 훨씬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내였다.
하지만, 아끼는 부하가 정체 모를 웬 놈에게 눈앞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꼴을 보자 겔베르트도 살짝 눈이 돌았던 모양이다.
“이런 개새끼들이!!!”
퍼억!
평소의 신중함은 내다 버린 듯, 황소 처럼 돌진해 엔리케를 때리던 상대를 냅다 어깨로 들이받아 버린 겔베르트.
“크흠!”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충격을 받은 상대가 대여섯 걸음을 뒤로 나며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상대를 뒤로 밀어낸 겔베르트가 바닥에 쓰러진 엔리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인마! 정신차려!”
“어흐흑! 큭... 대, 대장?”
“그래, 이 미친 새끼야! 술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저딴 새끼한테 맞고 다니냐? 뒤질래?”
“죄... 죄송함돠!”
코피가 질질 흐르는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자신을 올려다보는 엔리케에게 한심하다는 듯 일갈한 겔베르트.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맨정신이었다 할지라도 엔리케가 눈앞의 사내를 이기긴 힘들다는 사실을.
‘... 이 새끼, 강하다.’
고작 어깨빵(?) 한번 갈긴 것이 다였지만, 겔베르트는 돌처럼 단단한 상대의 근육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술 처먹고 뒷골목 계집년들 분 냄새 맡으러 왔으면 곱게 놀다 집에 기어들어 갈 것이지! 왜 사람을 패고 지랄이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어?”
“...”
하지만 상대는 그런 겔베르트의 도발에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저 겔베르트와 부딪친 어깨를 슬쩍슬쩍 돌려보며 이어질 공격에 대비할 뿐이었다.
오히려 겔베르트의 도발에 넘어간 것은,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던 그 옆의 젊은 놈이었다.
“이 시발! 개 버러지 같은 새끼가아! 우윽! 푸흐으으... 감히, 가암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어? 그 혓바닥을 어? 확, 씨! 뿌리째로 뽑아다가 개밥으로 던져줘야 정신을... 히끅! 차리지? 어?”
“... 이 병신은 또 뭐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푸흐흐...! 이 같잖은 잡놈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야, 은돌... 아니, 아니지. 이름을 말하면 안 되니까... 후우! 아무튼, 명령이다! 저 새끼들! 다 죽여버려! 싹 다 죽여버리라고! 특히 바닥에 쓰러진 저 시발놈, 모가지 잘라서 나한테 가져와! 얼르은-!!!”
“...”
하다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모가지를 자르네마네 하는 막말까지 내뱉는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그 모습에, 겔베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며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 내가 원래 어지간하면 이쯤하고 돌아가려고 했거든? 근데, 넌 안 되겠다. 너처럼 싹수 노란 새끼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거든. 형한테 좀 맞자, 응?”
겔베르트가 주먹을 털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자신에게 함부로 입을 놀린 싹수 노란 어린놈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엔리케를 두들겨 패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지금까지의 신중함을 내던지고 덤벼들었다.
무려, 검까지 뽑아 들고서!
스르릉, 촤앙!
“?!”
검이 검집 내부를 훑고 빠져나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위험을 직감한 겔베르트.
그가 훌쩍 뒤로 뛰어 뻗어오는 상대의 검을 피해낸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 이런 씹새끼가 술 먹고 주먹 싸움 붙은 판에 냅다 칼을 뽑아? 이런 상도덕도 없는 새끼를 봤나!”
대체 싸움판에서 칼 뽑는 것과 상도덕이 무슨 관계인가 싶었지만, 대강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겔베르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검을 뽑은 상대의 목소리에선 한 치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 방금은 경고였지만, 이 이상으로 선을 넘는다면 정말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기회다, 물러서라. 그대로 물러선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희미한 달빛만이 빛나는 어둑한 골목길 한가운데, 시퍼렇게 빛나는 검 한 자루를 쥔 사내의 발언엔 감히 거역하기 힘든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판단했다.
“하, 이 새끼가 진짜...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지?”
“...!”
겔베르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장을 거치며 드넓은 왕국 내에 단 삼십여 명뿐이라는 금패(金牌) 용병의 자리에 올라선 사내였다.
칼에 베이고 창에 찔려가며 얻은 상처가 그의 몸 이곳저곳에 수두룩했다.
그런 백전(百戰)의 경험을 지닌 사나이에게 ‘겨우’ 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제대로 먹혀들 리가 없었다.
“싸가지 수프 말아 먹은 새끼를 주인이랍시고 모시고 다니는 거... 힘든 건 알겠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 새끼야!”
자신의 코앞에서 날카로운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검을 보고도 그는 전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겁먹고 물러서기는커녕 호승심으로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한 겔베르트가, 검을 겨눈 사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의 뒤쪽에 선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막내야, 안에 들어가서 내 칼 꺼내와라. 아무래도 오늘 이 새끼랑 한따까리 해야겠다.”
***
겔베르트가 내게 자신의 검을 가져오라 명령하던 그 순간,
‘...!’
그물망처럼 넓게 펼쳐진 나의 감각에 걸려든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놈들이겠지.
“야, 뭐야? 저기 싸움 났나?”
“오오오오! 재밌겠는데?”
“으와! 아직 시작 안 했나? 빨리 가보자, 움직여!”
“어이씨? 한쪽이 벌써 검 뽑았는데? 제대로 한판 붙을 모양이야!”
“아이참! 밀지마쇼! 밀지 말라고 이 새끼야아!”
왁자지껄, 술집과 창관이 모여있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진 한밤중의 소란.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소문에 금세 모여드는 사람들 속, 유난히 은밀한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재빠르면서도 가벼운 발걸음과 길거리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을 평범한 외모.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생김새와 옷차림, 체격 모두가 눈에 띄지 않을 그런 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닌 검성(劍聖)의 감각은 반경 수십 미터에 접근한 아주 미세한 살기까지도 감지해낼 수 있는 가히 초인적인 영역의 능력.
넓게 펼쳐둔 거미줄에 잡힌 날벌레처럼, 다섯 명의 사내가 나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누구보다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에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날카로운 발톱을 품고 있는 그들이 정체는...
‘... 이리 올 줄 알았다, 살수 놈들아!’
그들은 바로 돈을 받고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자들, 암살자(Assassin)였다.
“야, 막내야! 대답 안 하냐? 빨리 내 칼 가져오라니까?”
군중 속에 숨어 접근해온 암살자들을 살펴보고 있던 내게, 겔베르트가 다시 한번 검을 가지고 오라며 독촉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
여기서 괜한 짓을 했다가, 시작부터 내가 아는 원작의 흐름이 꼬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원작 소설에서도 이러다가 싸우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갔었지.’
그리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원작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게 해줄 인물이 여관 출입문을 열며 밖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
덜컥-!
여관의 출입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이는 다름 아닌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
자다 깨서 급히 나온 듯,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가 자신의 검을 왼손에 잡아든 채로 겔베르트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대장, 멈추십쇼!”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겔베르트가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짓는다.
푸른 방패의 ‘시어머니’ 메이슨이 등장한 이상 더는 소란이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 탓이다.
“이쯤하고 마무리하시지요. 도시 내에서 괜한 소란을 일으키면 저희한테 좋을 게 없습니다.”
빠르게 달려온 메이슨이 겔베르트의 곁에 서서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푸른 방패 용병대의 주 근거지인 텔마르크에서야 어지간한 소란을 일으켜도 오랜 시간 영지 내에서 쌓아온 인맥으로 무마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텔마르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왕국 최남단의 영지, 리트베르크.
이곳에서 괜한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뒷감당이 쉽지 않을 것이다.
‘... 게다가 저놈, 검을 들고 싸워도 쉽지 않겠어.’
겔베르트 정도의 수준에 이른 검사라면, 상대가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대강의 실력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검을 겨누고 있는 눈앞의 사내는, 그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이런 놈을 호위로 데리고 다닌다는 건 저 입버릇 더러운 어린놈이 꽤 대단한 집 자식이라는 얘긴데...’
호승심으로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자, 잠시 숨죽이고 있던 날카로운 분석력이 겔베르트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호각(互角)을 이룰 정도의 뛰어난 기사급 실력자를 저렇게 싹수 노란 자식 놈의 호위로 붙여줄 정도의 집안이라면, 적어도 한 지역을 휘어잡을 정도의 대단한 가문일 것이다.
즉 영주 가문쯤 된다는 것인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리트베르크의 영주인 바일 아르펜 남작에겐 아들이 없었다.
‘그럼 저 새낀 대체 누구... 아, 그럼 혹시?!’
순간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한 가지.
며칠 전, 리트베르크 영주의 딸과 혼담을 나누기 위해 이웃한 바덴하임 영지의 막내아들이 왔다는 애길 들었다.
헌데, 그 막내아들이라는 놈이 천하의 개망나니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해볼 때, 술이 떡이 된 채로 쉴 새 없이 욕을 내뱉던 눈앞의 어린놈이 바로...
‘... 황금백의 아들이구나! 이런 시발!’
왕국 내에서 가장 돈이 많다고 알려진 바덴하임 백작, 황금백(黃金伯) 헤르만 바이츠제커.
그런 인물의 아들을 건드릴 뻔했다는 사실에 겔베르트는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푸른 방패가 아무리 저력 있는 용병대라고는 하나 상대는 왕국 남부 최대의 영토를 지닌 대귀족 바덴하임 백작의 아들.
그런 녀석과 원한 관계를 쌓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개죽음뿐이었다.
‘치, 침착하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대로, 상황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은 겔베르트가 짐짓 아쉽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 그래 시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욕먹은 건 짜증난다만, 애초에 우리 쪽 애새끼도 술 처먹고 쌍방과실인 거 같으니... 이쯤 합시다. 똥 밟았다 치지 뭐. 야, 엔리케! 너도 빨리 따라들어와. 병신 같은 놈이... 에휴!”
싸움을 만류하는 메이슨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간 겔베르트가 휙, 하고 등을 돌렸다.
여전히 상대의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 잘 생각했다.”
스르릉, 탁!
겔베르트가 보여준 대담한 모습을 보며 눈을 빛낸 사내, 바덴하임의 기사 티모 은돌로가 자신의 검을 검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로서도 모시는 주인이 다른 영지에 와 불미스러운 싸움에 연루되는 꼴은 최대한 피하는 꼴이 좋았기 때문이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차게 식었지만, 여전히 천지분간 못하는 개망나니 한 마리만은 씩씩거리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야! 야! 뭐하는 거야! 이 시발, 거기 안 서? 이 개... 우욱! 우웨엑!”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백작가 개망나니의 구토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여관문을 열어젖힌 겔베르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꺼냈다.
“... 시발, 진짜 좆될 뻔했네.”
***
다음 날 아침, 여관 1층 식당에 모인 우리들은 간밤의 해프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 대장이 그냥 손을 떼고 뒤로 돌아서더라고. 난 갑자기 뭔 일인가 싶었지. 다들 알잖아? 대장도 눈 돌아가면 앞뒤 안 가리는 거?”
“그렇지, 그렇지.”
“맞아, 보면 대장도 참을성 더럽게 부족하다니까?”
“아니, 근데 대장은 대체 왜 안 싸우고 물러난 거예요? 그 새끼가 그렇게 싸움을 잘 할 것 같았어요?”
“하, 이 새끼들아. 그게 아니라 사정이 있었어! 그때 내가 물러서지 않았으면, 우리 다 뒤졌어 이 새끼들아!”
“엥? 사정은 뭔 사정? 그냥 쫄은 거 아니에요?”
“이런 개... 하,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답답한 표정을 한 겔베르트가 부하들에게 어제 시비가 붙었던 이들의 정체를 말하려던 그때,
콰앙-!
문을 부술 기세로 등장한 한 무더기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란 것이 다름아닌...
“리트베르크 영지군? 아니, 영지군이 아침부터 여긴 왜...”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뱉는데, 그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푸른 방패 용병대의 대장 겔베르트, 너를 바덴하임 백작의 6번째 아들, 오트만 바이츠제커의 살해용의자로 긴급 체포하겠다!”
< 드리우는 전운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