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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6화 (32/197)

< 드리우는 전운 (4) >

리트베르크 영주성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한 죄수 감옥.

감옥은 좁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감옥이 놓여 있는 구조였다.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깊은 지하, 공기는 습하고 사방이 어두웠다.

그 캄캄한 감옥의 초입, 여러 명을 한꺼번에 가둬놓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방.

바로 그곳에, 지난밤 벌어진 살인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지목된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붙잡혀 있었다.

“야! 이거 열어! 죄 없는 사람 감옥에 처넣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문 빨리 열어 달라고오!!!”

쾅쾅쾅-!

씩씩거리며 감옥 문을 주먹으로 연신 후려치는 짧은 머리의 사내.

전날 밤 알 수 없는 상대에게 신나게 얻어터져 엉망이 된 얼굴을 한 푸른 방패의 2조장, 엔리케였다.

“아이씨! 조장! 시끄러워요! 가만히 좀 앉아 있어요!”

“야, 인마. 지금 이게 가만히 앉아 있을 상황이냐? 우리 대장이 잘못도 없이 끌려갔는데! 어? 야, 이 새끼들아! 우리 대장 돌려줘어어어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감옥 문 너머 어두운 복도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엔리케.

하지만...

“애초에 네가 술 처먹고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 처맞기 전에.”

“... 어, 읏! 옙!”

뒤쪽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온 부대장 메이슨의 목소리에 그의 요란스럽던 기세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

그렇게 한동안 적막만이 감돌던 감옥 안.

문득 튀어나온 누군가의 허탈한 목소리가 오랜 정적을 깨뜨린다.

“대체, 누가 백작의 아들을 죽인 걸까요?”

“... 모르지.”

부하의 물음에 메이슨이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답했다.

답을 알 턱이 없는 질문이었다.

지난밤, 그들의 대장과 백작의 아들(로 추정되는) 일행이 시비가 붙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메이슨 자신이 늦지 않게 달려가 말렸고, 대강 상대의 정체를 추측한 겔베르트도 더 일을 키우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섰다.

‘... 그리고 여관에 들어와서 진짜 큰일 날 뻔했다며 이야기를 나눴지.’

메이슨이 기억하는 백작 아들과 자신들의 접점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 어이가 없네 진짜. 나랑 시비 붙었던 그 새끼가 황금백의 아들이란 것도 황당한데, 그 새끼가 뒤졌을 줄이야...”

엔리케의 넋두리를 들으며, 푸른 방패의 대원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누가 백작의 아들을 죽인 것일까?

모두가 답이 없는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단 한 사람만은 차분한 눈빛으로 앞으로 이어질 사건의 흐름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나였다.

‘... 좋아, 내가 기억하는 원작의 흐름대로다.’

나는 백작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지난밤, 겔베르트와 백작의 개망나니 여섯째 아들 오트만이 대치하던 그 장소에 나타났던 다섯 명의 암살자.

그들이 바로 이번 사건의 진짜 범인이었다.

‘다섯 명이나 동원한 걸 보면, 일 처리는 확실하게 했겠군.’

하긴, 오트만 옆에 호위로 붙어 있던 녀석의 실력이 만만치 않긴 했다.

그런 녀석의 방어를 뚫고 백작의 아들을 죽이려면 암살자 두세 명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백작 아들이 죽었으니, 계획이 착착 진행되겠군.’

알다시피 암살자란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그 대가로 사람을 죽이는 이들.

즉, 이번 백작 아들 살인 사건의 배후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근데, 대장은 풀려날 때 되지 않았냐? 슬슬 그 양반 만났을 텐데?’

***

“... 그러니까, 너는 시비가 붙은 와중에 상대가 백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발을 뺐다는 거지?”

영주성 지하에 위치한 감옥의 바로 위층에 자리한 조사실.

그곳에서 백작 아들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푸른 방패 용병대의 대장, 겔베르트가 사건 담당자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순간의 혈기에 휩싸여 일을 벌이기엔 상대가 너무 대단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요.”

“흐으음...”

자신의 말에 차분하게 대답하는 겔베르트의 모습을 바라본 사건 담당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껏 수집한 목격자들의 진술과 용의자 본인의 진술이 일치했고, 그 내용으로 추측컨대...

‘... 이놈은 범인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꼬여가는 상황 속, 상부에 뭐라 보고를 해야 할지 고민이 점점 깊어지고 있던 그때...

덜컥, 끼이익!

조사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헛, 오셨습니까!”

조사실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사건 담당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경례를 붙인다.

그의 깍듯한 태도만 보아도 지금 나타난 인물이 대단한 위치를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이 친구인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했던 사람이?”

그는 반백(半白)의 짧은 머리를 지닌 중년의 사내였다.

얼굴 곳곳에 새겨진 주름에 세월의 흐름이 담겨있고, 거칠고 투박한 손에선 그가 살면서 겪어온 만만치 않은 삶의 풍파가 느껴졌다.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두꺼운 가슴과 잘 단련된 팔다리 근육이 사내가 지닌 만만치 않은 저력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이름은 데론 베르켈(Deron Berkel).

리트베르크 영지의 모든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軍務官)이자 20여 년 가까이 영주 가문을 섬겨온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맞습니다. 어제 백작 아들 일행과 길거리에서 시비가 있었고, 당시의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 일단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좀 보도록 하지.”

“옙, 여기 있습니다.”

털썩, 조사 담당관이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데론이 지금까지 작성된 사건 조사 기록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맞은편, 손과 팔이 결박된 채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겔베르트에겐 무척이나 답답한 기다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그 시간을 인내했다.

마침내, 조사 기록을 모두 살핀 데론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겔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용병대장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용병 등급은 어떻게 되나?”

“저는...”

“아, 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이걸 알아두게. 내가 오는 길에 병사 하나를 시켜서 리트렌 용병 길드 지부에 문의를 넣었다네. 자네와 자네 용병대에 대해서 말이야.”

한 마디로, 거짓말로 대충 대답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답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지난 20년간 리트베르크를 지켜온, 가장 위대한 기사의 명백한 경고.

하지만 겔베르트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 만만치 않은 역사를 만들어온 인물이었다.

“제 등급은, 금패입니다.”

“...!”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데론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친다.

“금패라... 한눈에 봐도 한 가닥 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다만, 그 이상으로 대단한 능력자였군.”

“...”

나름 칭찬이었지만, 겔베르트는 그 말에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이 상황에서 상대가 왜 자신의 용병 등급을 물어보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데론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뭐, 아무튼... 여기 조사 기록까지 살펴보니 더 확실해졌군.”

“...?”

“자네는, 백작 아들을 죽인 범인이 아니야.”

“!”

겔베르트의 입장에선 참으로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 말이 지금 이 상황에 곧장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그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밧줄 묶어 놓은 거 풀어줘. 이 친구, 범인 아니니까.”

“옙!”

데론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쪽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겔베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손과 발을 묶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감사... 합니다.”

오랫동안 밧줄에 묶여 있어 저릿한 손목을 주무르며 겔베르트가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은 여전히 긴장을 풀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눈빛에 담긴 의구심을 파악한 데론이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의심스러운 눈빛 하지 말게.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풀어준 거니까.”

“... 죄송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허헛, 참나... 자네가 사람 죽였다는 증거가 없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안 한 일을 안 했다고 판단 내린 것인데 설명을 해달라니?

할 말이 없어진 겔베르트가 멋쩍게 시선을 내리까는데, 데론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방금 죽은 백작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왔네. 아, 그의 호위를 맡았던 기사의 시신도 같이.”

“...!”

“두 사람 모두 몸 전체에 단검에 찔린 상처가 가득하더군. 흉수는 최소한 셋 이상... 앞과 뒤, 측면에서 동시에 달려들어서 제압한 모양이야. 일단... 사용한 무기나 범행이 발생한 시간으로 추측건대 자네나 자네 부하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결론이네.”

“그렇게 판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죄 없는 사람은 당연히 풀어주는 것이 맞지 않겠나?”

그렇게 잠시나마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던 데론의 표정이 다시금 심각해진다.

“흐음... 지금부터 자네에게 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용의자가 아닌 사건 참고인으로서 대답해줄 수 있겠나? 금패 용병의 안목과 경험이 필요하네.”

“예, 뭐든 제가 아는 것 내에서 성실히 답하겠습니다.”

어차피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겔베르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자네, 백작의 호위 기사와 시비가 붙었다고 했지?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몸싸움도 좀 벌였다던데...”

“많이는 아니고 딱 한 차례, 내 부하를 구타하는 걸 말리기 위해 어깨로 밀친 기억이 있습니다.”

“아, 그런가... 그렇게 본격적으로 손속을 나눈 것은 아니군?”

“예, 그렇습니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듣고 조금 실망한 표정이 된 데론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판단하기에, 그 기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던 것 같나? 물론 어깨 한 번 부딪친 정도로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겠지만...”

그것은, 금패 용병으로서 겔베르트가 지닌 경험과 안목에 기댄 질문이었다.

그리고 겔베르트는 그런 데론의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줄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적어도, 제 밑은 아니었습니다.”

“으흠... 죽은 기사의 실력이 그 정도란 말이지.”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데론이 무언가 결론을 내린 눈빛을 한 채, 하얗게 센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금패 용병에 버금갈 정도의 실력을 지닌 기사를 단검으로 공격해 죽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기준은 기사와 ‘정면 승부’를 했을 때의 이야기.

단검을 들고 덤벼든 이들이 ‘기습 공격’에 특화된 이들이라면, 그 희박한 가능성은 크게 높아진다.

그리고, 겔베르트는 단검을 아주 잘 쓰며 기습 공격에 특화된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백작의 아들을 죽인 흉수...”

“...?”

“짐작건대, 암살자겠군요. 그것도 실력이 좋고 몸값이 꽤 비싼.”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데론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자네와 정확히 같은 생각이네. ”

“하지만... 대체 누가 백작의 아들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죽은 그 친구는 권력 다툼과도 무관한 서열이라고 들었습니다.”

보통 영주의 자식이 암살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문 내 권력 승계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죽은 오트만 바이츠제커는 백작의 여섯째 아들로 가문 내 권력 서열에서 완전히 밀려난 인물이었다.

“권력 다툼과는 무관하지만, 그 친구가 죽었을 때 분명한 이득을 보는 사람이 하나 있다네.”

“대체... 그게 누구입니까?”

의아한 눈빛을 한 겔베르트를 바라보던 데론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온 사람의 이름은...

***

조사실의 바로 아래층,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갇혀 있는 감옥 안에서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연히, 오트만 바이츠제커가 리트렌에서 시체가 되었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인물이 범인이겠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인마!”

“아, 막내 이 새끼... 잘난 척 그만하고 빨리 말해 인마!”

빨리 정답을 말해달라며 닦달하는 선배들을 향해, 나는 모두가 놀랄 범인의 이름을 밝혔다.

“암살자를 보내 오트만을 죽인 범인은... 그의 아버지인 황금백(黃金伯), 헤르만 바이츠제커 폰 바덴하임입니다.”

< 드리우는 전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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