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리우는 전운 (5) >
내가 암살자들을 시켜 오트만 바이츠제커를 죽인 범인으로 그의 아버지인 ‘황금백(黃金伯)’ 헤르만 바이츠제커를 지목했을 때, 동료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백작 아들 살해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어 조사실에 끌려갔다가 무죄로 풀려나온 대장이 나와 똑같은 말을 했을 땐 모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장! 괜찮아요?”
“막 고문받고 이런 거 아니죠? 그런 거면 당장 올라가서 대가리를 확!”
“영지군 새끼들이 뭐래요? 그 망나니 백작 아들놈 왜 죽였냐고 막 몰아붙여요?”
“아니, 무죄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라던데?”
“... 예?”
“아니, 아침 댓바람부터 몰려와서 개 끌고 오듯이 감옥에 처박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무죄라고요?”
“어, 무죄래.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데론 베르켈 경이 직접 와서 그렇게 말하고 나를 풀어줬다. 근데...”
“...?”
“그 양반이 말하길, 백작 아들을 죽인 게 그 아버지 같다던데?”
“?!”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 경악한 시선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참나, 정답을 말해줘도 도무지 믿지를 못하니... 아, 천재의 삶이란 참 외롭네요. 아오, 슬프다!”
***
리트베르크 영지에 대한 바덴하임 백작의 야욕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왕국 남부 최대의 영토를 지녔고, 황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산다는 왕국 제일의 부자 바덴하임 백작이 뭐가 아쉬워서 리트베르크에 그렇게 집착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토록 대단한 부자이기 때문에 바덴하임 백작은 더더욱 리트베르크를 갖길 원했다.
왕국에서 다른 나라를 거치지 않고 신성교국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인 리트베르크.
그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리트베르크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런 리트베르크와 바로 맞붙어 있는 영지 바덴하임의 주인인 백작은, 리트베르크가 매년 벌어들이는 그 막대한 수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생각의 흐름.
하지만, 그렇게 비범한 ‘탐욕’을 지녔기에 바덴하임 백작은 왕국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끝을 모르는 백작의 탐욕이, 마침내 거센 폭풍이 되어 리트베르크를 덮치고 있었다.
***
리트베르크 영주성(領主城)_
쿠당탕-!
“여, 영주님! 그, 급보! 영지 북부에서 온 급보입니다!”
리트베르크 영지군 병사 한 명이 영주 집무실의 문을 다급히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선 병사.
하지만 방의 주인인 리트베르크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은 병사의 무례를 탓하는 대신 침착한 눈빛으로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베르켈 경.”
“예, 영주님.”
“저 급보라는 게... 우리가 예상했던 ‘그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
영주의 질문을 받은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데론 베르켈이 침통한 눈빛으로 답한다.
“저토록 다급한 병사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싶습니다.”
“하아... 그렇군요.”
데론의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남작.
지난 며칠 간의 마음고생으로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에 어두운 낯빛이 더해진다.
모시는 주군의 상심한 모습을 보다 못한 군무관 데론이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는 병사에게 손을 뻗는다.
“... 이리로 가져와라.”
“예, 옛! 여기 있습니다, 군무관님!”
허겁지겁 다가온 병사가 들고 있던 문서를 데론에게 넘겼다.
사락-
문서의 겉을 감고 있던 끝을 풀어낸 후 그 내용을 확인하는 데론.
“흐으음, 결국...”
그 문서엔, 지난 며칠간 영주와 데론 그 자신이 우려했던 미래보다도 더욱 암울한 현실이 담겨 있었다.
[북부 요새 그로담(Grodam), 바덴하임 군 선봉대 병력과 전투 중. 적의 규모 대략 5백 명 수준으로 예상]
“선봉대만 5백이라...”
바덴하임 선봉대 병력의 규모를 확인한 데론이 침음을 삼킨다.
선봉대가 5백이라면, 대체 뒤에 따라올 본대 병력의 수는 몇이란 말인가?
‘주도(主都) 리트렌과 그 주변 초소들의 병력을 다 끌어모아도 겨우 천을 넘기는 수준일 것인데...’
보통 본대의 병력이 선봉대의 서너 배에 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의 규모는 적게 잡아도 2천을 될 것이다.
과연 백작령(伯爵領)의 이름에 걸맞은 막강한 군사력.
하지만, 적의 병력 규모보다도 더욱 데론을 절망하게 만든 내용이 있었으니...
[선봉대를 이끄는 적 지휘관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인 것으로 확인]
그리 길지 않은 문서의 끄트머리, 그곳에 데론과 오랜 우정을 나누었던 옛 전우(戰友)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
바덴하임 군이 영지 경계선을 넘어 침공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리트베르크 전역을 강타했다.
전쟁의 명분은 확실했다.
‘리트베르크가 바덴하임의 후계자를 죽였다!’
죽음의 과정을 따지고 보면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는 말이었다.
늦은 밤 오트만은 제 발로 리트베르크 영주성을 뛰쳐나갔고,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을 술에 취해 기웃거리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찔러넣은 검에 개죽음을 당했다.
제 발등을 스스로 찍은, 아니 제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간 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하지만, 오트만이 칼 맞아 죽은 그 장소가 영지 리트베르크의 심장부인 주도 리트렌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내 아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내 막내아들이 악랄한 도적놈들의 칼에 맞아 쓰러질 동안 리트베르크의 주인은 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오트만은 내 아들이기 이전에 바덴하임의 깃발을 들고 리트베르크를 찾은 사절단의 기수였다. 그런 이가 영주가 사는 도시 한 복판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 자체가 바덴하임과 나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가 하루 뒤에 깨어난 바덴하임 백작, 황금백(黃金伯) 헤르만 바이츠제커.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토해냈다는 그 말이 이번 전쟁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복수전(復讐戰).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는, 그 자체로 충분한 사건의 개연성이 되는 법이다.
***
리트렌의 여관, ‘축복의 보금자리’_
“헹! 아주 지랄하고 있다! 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하루 동안 혼절했다가 일어나서 피눈물을 흘려? 제 손으로 자식 죽인 놈이 어떻게... 와, 진짜 소름이 다 끼친다! 이 악마 같은 늙은이!”
바덴하임 군의 침공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엔리케의 말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과 분노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자식까지 희생시킨 백작의 악마 같은 모습에 치를 떨 뿐이었다.
“아니, 근데... 오트만 그 새끼 칼 맞고 뒤진 게 얼마나 됐다고, 바덴하임 놈들은 벌써 쳐들어오냐? 준비를 얼마나 빠르게 한 거야?”
코를 후비며 말하는 엔리케에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하, 진짜... 이 아저씨, 또 이런다. 내가 그때 말했죠? 바덴하임은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준비를 엄청 빨리한 게 아니라, 전쟁 준비를 다 끝낸 다음에 오트만을 리트베르크로 보낸 거예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시발, 아무튼 황금백 그 늙은이, 진짜 독하다, 독해! 아무리 돈이 좋고, 땅 욕심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제 자식까지 제물로 바칠 수가 있냐?”
인륜을 벗어난 바덴하임 백작의 행동에 발을 구르며 분개하는 엔리케.
하지만 원작을 통해 묘사된 백작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던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뭐, 애초에 오트만 그 녀석과는 부자(父子)의 정을 전혀 나누지 않은 양반이었으니...’
바덴하임 백작의 일곱 번째 부인인 오트만의 어머니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즉 두 사람의 결합은 정상적인 혼인의 방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귀족이 어여쁜 평민의 딸을 건드려 자신의 첩으로 만드는’ 전형적인 중세식 막장 스토리의 결말이었던 것.
‘그나마도 자신의 첩으로 들인 후엔 흥미를 잃어서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했지...’
그렇게 영 좋지 못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오트만이 인성 미달의 인간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미 밑에서 자라나 그 자신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오트만이 그런 개망나니가 된 것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바덴하임 백작은 끝끝내 오트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자식으로 인정하긴커녕 오트만을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장기판의 말로 써버렸다.
“심지어, 제 손으로 그 장기 말을 깨부숴버리기까지 했으니...”
“뭐? 너 지금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냐?”
내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본 엔리케가 한마디를 던졌다.
“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좀 생각하느라...”
“너 은근히 자주 그렇게 멍 때리더라? 무슨 ‘신의 계시’라도 받냐? 푸흐흐..”
엔리케는 웃자고 한 얘기였지만, 내가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미래를 예측하는 행동이 ‘신의 계시’를 받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에 괜히 가슴이 뜨끔해지는 기분이었다.
“계시는 무슨... 저 같은 불신자(不信者)한테 신께서 좋은 말씀을 내려주시겠어요?”
“허이구, 또 모르지. 오히려 그래서 더 신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킬지도?”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흰소리를 떠들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여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준비 끝났냐?”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모인 푸른 방패의 대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의 정체는, 우리들의 대장 겔베르트였다.
“아, 준비는 진작 다 끝났죠! 제일 늦게 내려온 양반이 뭔 소리래...”
늘 그렇듯 자신의 말에 툴툴거리는 엔리케를 보며, 겔베르트가 눈을 부라린다.
“야, 이 새끼야! 원래 대장은 마지막에 내려오는 거야! 그래야 멋있지.”
“멋은 개뿔... 멋은 잘생겨야 있는 거예요. 여기, 얼굴 생겨 먹은 게 막내 같아야 멋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라고!”
“좆까, 이 새끼야. 내가 똥을 얼굴에 처발라도 너보단 잘생겼어.”
“어어? 그 말 책임 질 수 있습니까? 나 지금 화장실 가서 똥 퍼옵니다?”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겔베르트와 엔리케의 대화를 들으며, 푸른 방패의 나머지 대원들은 치밀어 오르던 긴장을 잊고 웃음을 터트린다.
지금부터 그들이 걸어가려 하는 길은, 지독한 위험이 도사린 험난한 가시밭길.
그 혹독한 모험의 시작을 이처럼 실없는 웃음으로 장식하는 건, 푸른 방패의 오랜 전통이었다.
마침내, 입가에서 웃음을 지운 겔베르트의 발언이 시작된다.
“크흠! 처음 이 전쟁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을 때도 강조했지만,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의뢰보다도 힘들고 위험한 임무가 될 거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적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외부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용병대에 참전을 의뢰한 리트베르크 영지조차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모든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누구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푸른 방패 모두의 결정이었고, 우리는 지금부터 그 결정에 책임을 질 것이다.”
스르릉, 촤앙!
자신의 검을 뽑아내 위로 치켜든 겔베르트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이 싸움은 돈이 아닌 명예를 얻기 위한 전쟁이다! 가자, 푸른 방패! 명예를 저버린 적들을 쓰러뜨리러!”
“가자아아아아아아!”
“푸른 방패! 푸른 방패에에에에에!”
”우와아아아아아!”
겔베르트의 연설에 감동한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저마다 함성을 쏟아내는 가운데, 옆자리의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엔리케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시 집어넣을 거, 칼은 왜 뽑는 거여? 하여간 못생긴 양반이 허세는... 으휴!”
< 드리우는 전운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