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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8화 (34/197)

<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1) >

백작령 바덴하임의 주도(主都),

그라이츠(Greiz)_

사방이 새하얀 방이었다.

바닥과 벽, 높은 천정을 떠받치는 대들보와 기둥까지.

눈길 닿는 모든 곳이 그야말로 순백(純白).

그 순백의 정체는 왕국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카폴린(Capollin) 산 대리석이었다.

그 값비싼 석재를 아낌없이 사용해 만들어진 이 공간은, 사람이 기거하는 장소라기보단 마치 신들의 영(靈)과 혼(魂)이 노니는 신전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방의 한 가운데, 사람 둘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넓은 크기를 지닌 책상이 하나 놓여 있다.

책상의 색깔은 새하얀 방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짙은 검은 색.

마치 새하얀 눈이 쌓인 벌판에 홀로 고고히 자리한 바윗돌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그 칠흑색의 책상 위, 수북이 쌓인 서류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며, 두툼한 양피지(羊皮紙)에 무언가를 바쁘게 써 내려가는 한 사람이 있다.

“흐음, 이번 달은 전쟁 준비 때문에 돈이 많이 들었구만... 속이 참 쓰려. 이걸 복구하려면 결과가 좋아야 할 텐데 말이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방의 주인.

그는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작달막한 체구를 지닌 노인(老人)이었다.

급하게 꺾여 떨어지는 매부리 콧날, 움푹 들어간 볼과 고집스럽게 생긴 입술, 나이가 들어 어두운 갈색빛으로 변해버린 얼굴색과 군데군데 피어난 검버섯.

노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강퍅한 인상의 전형과도 같았다.

하지만, 말라 죽은 고목처럼 초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두 눈만은 끝 모를 탐욕이 빚어낸 형형한 안광(眼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국 제일의 부자’라 불리는 백작령 바덴하임의 영주,

‘황금백(黃金伯)’ 헤르만 바이츠제커(Hermann Weizsacker)였다.

“흐음... 그래, 리트베르크 쪽에서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나? 내 자식이 죽어 넘어가는 순간을 멀뚱히 보고 있었던 그놈들 말이야.”

깃털 펜을 든 손으로 양피지 위를 바쁘게 노니며, 백작이 질문을 던졌다.

헌데, 그 질문에 담긴 ‘자식’이란 표현이 참으로 묘했다.

오트만 바이츠제커.

백작의 피를 이었으나, 그 천한 어미의 부족함 탓에 단 한 번도 자식의 이름을 허락한 적 없던 녀석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자식이라 부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죽고 나서야 백작은 그 이름을 허락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쓸모에 의해서 허락된 이름이었다.

“예, 각하. 아직은 들어온 소식이 없습니다.”

백작의 물음에 답한 것은, 한참 전부터 책상 앞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른 몸에 적당한 키를 지닌, 새하얀 피부의 남자였다.

조금 긴듯한 금갈색의 머리는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단장했고,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차려입어 빈틈없이 몸을 가렸다.

아주 잘 생기지도, 그렇다고 아주 박색인 것도 아닌 평범한 얼굴.

하지만, 묘한 광기가 흘러넘치는 사내의 눈빛은 전체적으로 평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를 잊지 못할 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전쟁 시작한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버티고 있다니... 쯧!”

생각보다 지지부진한 전쟁의 양상에 실망한 듯, 언짢은 목소리를 내뱉는 백작.

모시는 주군의 심기가 불편함을 깨달은 금갈색 머리의 사내, ‘백작의 지낭(智囊)’으로 불리는 서기관 알프레트 아이케(Alfred Eicke)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답한다.

“생각보다 리트베르크 놈들의 대응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우리 쪽이 미리 병력을 준비하고 있다가 들이쳤는데, 저놈들이 그걸 어떻게 대응하냔 말이야!”

노한 백작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알프레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리트베르크의 금력이 만만치 않으니, 아마도 용병들을 급히 고용해 우리 병력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병?”

“예. 돈 벌 자리라면 그게 어디건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놈들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돈을 좋아하는 돈벌레 놈들이라지만,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에 그렇게 냉큼 뛰어든다?”

“본디 큰 위험엔 큰 보상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흐음...”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백작이 다시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그래도, 에리히가 따라갔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만...”

백작의 입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그 이름에, 처음으로 알프레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백작의 신임을 놓고 다투는 정적에 대한 명백한 질투(嫉妬)의 감정.

하지만, 순식간에 그 감정의 동요를 잠재운 알프레트가 마음에도 없는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프라이슬러 경이 충분히 잘해줄 겁니다. 그가 바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난 수년간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진 그 말을 알프레트가 내뱉는다.

“... 왕국 남부를 대표하는 최강의 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아니겠습니까?”

***

“으으, 죽겠다... 후우!”

적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흉악한 모습으로, 성벽에 기대앉은 겔베르트가 고된 한숨을 내쉰다.

“와, 진짜 개 빡시네... 대장, 괜찮아요?”

그의 옆에 주저앉은 엔리케가 오전 내내 화살을 쏘아대느라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니, 안 괜찮아. 내가 왜 이 전쟁에 끼어들자고 했는지, 슬슬 후회되고 있다.”

“푸흣! ‘돈이 아닌 명예를 얻기 위한 전쟁이다’ 이러면서 허세 부릴 때는 언제고...”

“허세 아니야, 새끼야. 그게 바로 진짜 사나이에게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멋’이라는 거다. 못생긴 넌 모르겠지만.”

“우러나오긴 뭐가 우러나와, 대장이 뭔 육수에요?”

“이런 개새끼가!”

... 저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지껄이는 걸 보니, 아직은 살만한가 보다.

“더럽게 많네, 개자식들.”

나는 리트렌 도시 성벽 너머 넓은 평원 집결한 적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경 3천에 이르는 대병력.

리트렌 도시 내에 주둔 중이던 영지군에 경비대 병력, 급히 끌어모은 용병과 징집된 주민들을 모두 더해 겨우 천명 가량을 맞춘 리트베르크 측과 비교하면 족히 3배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쪽수도 쪽수인데... 질적인 차이가 너무 많이 나네.”

공성하는 측에 비해 훨씬 적은 수로도 버텨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수성(守城)의 이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측의 병력이 같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병력 전부가 상비군으로 이루어진 바덴하임 군과 달리 리트베르크 군은 정규전의 경험이 적은 경비대 병력과 통제를 잘 따르지 않는 용병들, 급하게 징집된 도시의 주민이 뒤섞여 있었다.

한마디로, 적과 비교해 병력 질과 양 모두가 부족하다는 얘기.

성벽의 견고함에 기대어 지난 일주일을 어찌어찌 버텨냈지만, 전황은 암울하기만 했다.

천 명의 수비군 병력 중 죽거나 다친 사람이 절반을 넘어섰고, 성안에 준비해둔 전쟁 물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사나흘 안에 도시를 빼앗기게 되리란 것이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후우, 원작대로 흘러가서 이럴 줄 알고 있기는 했다만... 생각보다 훨씬 더 암울하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황에 밤마다 도시를 떠나는 탈영병이 속출했다.

공포에 젖은 리트렌의 주민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병사들 사이에서도 항복을 말하는 이들이 생길 정도였다.

더욱 무서운 것은, 아직 ‘그’가 전장에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아저씨, 언제 나오려나...”

멀리, 바덴하임 군의 야영지 한쪽에 세워진 사자문양의 깃발을 보며 나는 긴장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 잘 버티는군.”

오전 내내 계속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리지 않은 리트렌의 성문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한 사람.

그는 잘 단련된 팔다리와 날카로운 눈매, 견실한 턱을 지닌 장신의 사내였다.

“거기 계신 겁니까, 베르켈 경.”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사내는 알고 있었다.

처절하게 버티고 선 저 성벽 어딘가에 그가 존경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에리히 경.”

“...?”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리히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돌린다.

자신과 눈을 마주친 병사가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사령관께서 경을 찾으십니다. 중앙 지휘 막사로 가시지요.”

“그래, 알았다.”

짧게 대답을 마친 에리히는 자신을 찾아온 병사를 앞세우고 사령관이 있는 중앙 지휘 막사로 향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

이곳까지 에리히를 수행해온 예의 그 병사가 막사 입구를 지키는 근위병에게 뭐라 말을 건넸고, 고개를 끄덕인 근위병이 정중한 목소리로 막사 안쪽을 향해 말했다.

“사령관님, 프라이슬러 경이 오셨습니다.”

“오오, 안으로 모셔라.”

“예, 사령관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몸을 움직인 에리히가 성큼성큼 막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제집을 찾아 들어가듯, 과감한 모습이었다.

“오셨습니까, 프라이슬러 경!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음, 아닐세. 어찌 사령관이 휘하의 장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가? 난 그냥 여기에 앉겠네.”

벌떡 일어서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내어주는 리트베르크 정벌군 사령관, 틸레인 슈타우터.

하지만 그에게 거절의 의미로 가볍게 손짓한 프라이슬러가 손님용으로 준비된 작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틸레인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천천히 제 자리에 앉는다.

군의 최고 지휘관인 사령관이 선봉대장에게 쩔쩔매는 기이한 광경이었으나, 여기엔 다 사정이 있었다.

본디 에리히는 바덴하임 영지의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으로 재임하던 인물이었다.

반면 틸레인은 에리히의 밑에서 충실히 명령을 따르던 부하 중 한 사람이었고.

문제는, 이번 전쟁을 앞두고 명분을 쌓기 위해 준비했던 ‘백작 아들 살해 작전’에 에리히가 격렬한 반대의 의사를 표했다는 것.

그가 작전의 입안자이자 백작령 내의 실질적 2인자인 서기관 알프레트에게 ‘그대는 어찌 모시는 주군에게 인간의 금도(襟度)를 벗어나는 짓을 권하는 것이오!’라며 일갈한 것은 이미 백작령의 수뇌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에리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시행되었고, 백작의 여섯 번째 아들 오트만의 죽음과 함께 전쟁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리트베르크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에리히.

그러나 그는 불의(不義)한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며 사령관의 자리를 거부했고,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기관 알프레트와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된다.

상부의 명을 거부한 군 지휘관, 최대 사형까지도 가할 수 있는 중죄였으나 오랜 시간 바덴하임과 백작을 위해 싸워온 영지 최강의 기사를 그렇게 허망하게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알프레트는 백작의 허락하에 에리히의 군무관 자리를 박탈하고, 그를 리트베르크 정벌군의 선봉장 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그것이 바로, 정벌군 사령관이 선봉장을 맡은 부하 장수에게 쩔쩔매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 이유였다.

“프라이슬러 경, 이번 전쟁의 불의함을 들어 반대하시는 경의 올곧은 마음은 이해하오나... 생각보다 전황이 좋지 않습니다.”

“...”

“이미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제 취소할 수도,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죽거나 다치는 바덴하임의 병사들은 많아질 것이고, 그 비극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 가족들이 떠안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영광 같은 거창한 대의가 아닌,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바덴하임의 병사들을 언급하며 에리히의 마음을 설득하려는 사령관 틸레인.

그런 틸레인의 생각은 적중하여, 마침내 웅크렸던 사자(獅子)의 마음을 움직였다.

“... 오후 공성 때 참전하도록 하지. 그렇게 알고, 준비해주게.”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라이슬러 경!”

밝아진 얼굴로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틸레인을 뒤로하고, 굳은 표정의 에리히가 천천히 지휘 막사를 빠져나왔다.

<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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