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2) >
슈슈슈슈슈슈슛!!!
“화살이다! 전원 방패들어어어어어!!!”
지휘관의 피 끓는 목소리가 들린다.
온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들.
마치 가지고 있는 화살을 지금 이 공격에 모두 다 써버리겠다는 듯, 바덴하임 군이 쏘아 올린 어마어마한 개수의 화살이 성벽 위 리트베르크 수비군을 덮쳤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성벽 위의 병사들이 다급하게 방패를 들어 올린다.
터텅! 터터터텅! 텅! 터텅!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진 화살들이 방패에 틀어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퍼퍽! 퍽! 퍼퍼퍽!
하지만 개중에 적지 않은 숫자의 화살이 방패가 아닌 인간의 몸에 틀어박히며 살가죽을 헤집고 근육을 찢어발겼다.
“아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아흐윽! 살려줘! 나 맞았어!!!”
“야, 시발! 괜찮아, 괜찮으니까 침착해 새끼야!”
“피! 피난다! 허어어엉! 나 죽기 싫어!”
“나 주, 죽기 싫...! 끄르륵!”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리트렌 주민들로 이루어진 징집병 대열이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과 달리 전장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징집병들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상황 자체를 오래 견뎌내지 못했다.
“이 시발! 나, 난 못해! 더는 못 싸워!!!”
“나, 나도! 같이 가! 으아아아아!”
패닉에 빠진 병사들이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자리를 지켜라! 자리를 지키라고 이 개새끼들아아아아!!!”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리트베르크 군 장교가 악을 쓰며 도망치는 병사들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미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 억지로 붙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멈추라고 이 새끼들아아! 돌아와! 전열을 지켜라아아아아!”
“에이씨, 이거 봐! 장교 나리! 튀는 새끼들은 내버려 두고 전투에나 집중해!”
옆에서 싸우던 덩치 큰 용병 하나가 도망치는 병사들을 붙잡느라 정신이 없는 장교를 닦달해 다시 전열로 밀어 넣는다.
“뭐라고? 지금 지휘관인 나한테 반말을 지껄인... 컥!”
“야! 아가리 닥치고 빨리 싸우라고 개새끼야! 아까 저 새끼들처럼 뒤지고 싶어? 어?! 내가 죽여주랴?”
“아, 아닙니다!”
사방에서 머리통이 날아가고 팔다리가 떨어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헛소리를 지껄인 장교에게 눈을 부라린 용병이 자신의 도끼를 들어 올리며 한탄한다.
“씨발! 내가 미쳤지! 이따위 어설픈 새끼들이랑 편 먹고 싸울 생각을 하다니! 아흐!”
어차피 경험 많은 용병의 눈엔 도망치는 징집병이나 병사 좀 도망갔다고 정신줄 놓는 장교나 눈에 차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돈 많이 준다는 말에 혹해서 리트베르크 군에 합류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 같았다.
“좆 같은 바덴하임 새끼들! 많긴 더럽게 많네, 진짜!”
“으아아아! 죽어 이 개새끼야아!”
바로 그때,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성벽을 넘은 바덴하임 병사 하나가 악다구니를 쓰며 용병에게 덤벼들었다.
휘웅-!
하지만 그저 절박하기만 할 뿐 어설픔을 떨쳐내지 못한 병사의 칼질은 전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 용병의 몸짓을 따라가지 못했다.
“어디다 함부로 칼질이야, 이 좆만 한 새끼야!!!”
그렇게 일갈한 용병이 바덴하임 병사의 머리통에 큼지막한 도끼날을 박아넣는다.
콰직!
무자비한 도끼질에 호박 깨지듯 쪼개지는 병사의 머리통.
피와 뇌수를 쏟으며 거꾸러지는 병사의 시체가 성벽 너머로 떨어진다.
“우와아아아악!”
“뭐, 뭐얏? 크억!!!”
사다리를 타고 흐른 병사의 시체가 뒤따라 올라오던 바덴하임 병사들을 덮쳤다.
서로 뒤엉켜 우르르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바덴하임의 병사들.
그 모습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용병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 개새끼들아! 어디 한번 또 기어 올라와 봐라! 얼마든지 올라와 보...”
퍼억!
용병 사내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팔 길이 정도의 투창 한 자루가 그의 가슴팍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투창에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려 있었는지, 가슴을 뚫고 들어간 창이 자루까지 밀려 들어갈 정도였다.
“컥! 끄흐윽...!”
털썩, 투창에 저격당한 용병 사내가 썩은 나무 쓰러지듯 뒤로 넘어진다.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렸으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방도가 없으리라.
“누, 누가 대체?!”
용병 사내의 충격적인 죽음을 코앞에서 지켜본 이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투창이 날아온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피와 살이 튀어 오르는 성벽 아래에서, 한 마리의 사자(獅子)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
푸화악!!!
시뻘건 피 분수가 솟구친다.
“끄아악!”
“커흑!”
“사, 살려... 끄아악!!!”
촤악! 푸화아아악! 콰지직!
가슴이 갈라지고, 목이 떨어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한 명을 찌르고, 두 명을 베고, 다섯을, 아니 눈 깜짝할 새 십여 명을 쓰러뜨린다.
지난 일주일간 굳건했던 리트렌의 성벽이 한 사람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저, 저, 저, 저 자식 뭐야?! 처음 보는 새끼인데?”
내 옆에서 손가락이 떨어질 기세로 주야장천 화살을 날리던 엔리케가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이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입을 벌렸다.
“...!”
나 역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으나, 눈 앞에 펼쳐진 잔혹한 풍경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壓倒的).
지난 일주일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정체불명의 기사가 성벽 위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 놈이구나!’
처음 보는 상대였으나,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자의 머리를 형상화한 은빛의 강철 투구와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이 무섭도록 깔끔한 검술.
그 두 가지 특징만 보아도 상대의 이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리트베르크의 주인이 바뀔 것이다!!!”
왕국 남부 전체를 떨어 울리는 사자의 포효(咆哮).
내가 그토록 염려했던 바덴하임의 가장 무시무시한 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마침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제기랄! 저러다 우리 편 다 죽겠네!!!”
리트렌의 성벽 위로 강림한 재앙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엔리케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부신 속도로 화살을 재었다.
“으으으! 뒤져라, 이 미친 새끼야!”
늘 가벼운 말투와 행동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지만,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인 엔리케였다.
거침없이 잡아당긴 그의 활시위가 끊어질 듯 팽팽해진 순간,
투퉁!!!
동시에 활을 떠나 적에게로 향하는 두 대의 화살.
한꺼번에 두 대의 화살을 정확하게 날리는 엔리케의 기술은 푸른 방패의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묘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티잉! 탱!
“저 미친?!”
분명 우리에게 등을 보였던 놈이 어느새 몸의 방향을 돌리더니만 엔리케가 쏘아붙인 화살 모두를 검을 휘둘러 쳐내버렸다.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무섭도록 재빠른 반응이었다.
“헐?! 야, 막내야! 저 새끼! 이쪽으로 온다아아아!”
화살을 쳐낸 놈이 반대편으로 전진하던 몸을 틀어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엔리케의 범상치 않은 활 솜씨를 알아보고 먼저 죽여야겠다 생각한 듯했다.
“바덴하임의 개새끼가 어딜 감히 올라오느냐! 흐아아앗!”
놈의 접근을 알아챈 리트베르크의 기사 한 명이 커다란 장검을 치켜들며 돌진했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대한 체구를 지닌 이로, 남다른 신체 능력에서 기인한 힘 있는 검술을 사용하는 이였다.
이름이 린튼... 아니, 폴이었던가?
카캉! 차르르르릉, 푸화악!!!
“?!”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해내기도 전에 리트베르크의 기사는 머리를 잃은 시체가 되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뭐, 뭐야? 방금 어떻...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장면에, 엔리케가 말을 더듬었다.
있는 힘껏 양손으로 내려친 상대의 공격을 여유롭게 한 손으로 받아내는 모습부터 전율이 일었다.
이후 에리히는 검날을 맞댄 채로 그대로 밀고 들어가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치는 것으로 상대의 목을 가볍게 날려버렸다.
그 모든 과정이, 단 한 호흡에 이루어졌다.
“야잇, 시발!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투퉁! 퉁! 퉁!
위기에 처하니 안 그래도 빨랐던 손이 더 빨라진 것일까?
엔리케의 손에서 잇달아 화살이 날았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리고 네 발!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감탄하며 박수를 보낼 만큼 대단한 기예(技藝)였다.
티팅! 탱! 티이잉!
하지만 이번에도 어림없었다.
엔리케가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날린 네 발의 화살은 이번에도 다가오는 사자의 갈기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으아아! 마, 막내야! 저 새끼 어떡하냐? 어? 어떻게 좀 해봐!”
귀신 같은 활 솜씨로 원거리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자랑하는 엔리케였지만, 근접전에선 어쩔 수 없이 기량이 떨어지는 그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댈 것이라곤 오로지 곁에 서 있는 나 한 사람뿐.
그런 엔리케의 생각을 헤아린 내가 지체하지 않고 함성을 내질렀다.
“조장! 내가 시간을 끌 동안 뒤로 물러나요, 어서! 가서 다른 쪽을 도와요!”
“미안하다, 막내야! 절대 죽지 마, 살아서 보자!”
어차피 자신이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엔리케가 빠른 속도로 자리를 벗어난다.
달려나가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려 바덴하임의 병사들을 격살하는 솜씨가 실로 발군이었다.
“죽어라, 이 새... 컥!”
“으아아아악!”
“뒤져, 개새... 끄르륵!”
그 와중에도 에리히는 주변의 리트베르크 병사들을 착실히 쓰러뜨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핏물을 묵묵히 받아내며 내 앞에 선 에리히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음같이 냉정한 그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한 순간, 나의 신화급 스킬 ‘창조주의 눈’이 발동했고...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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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프라이슬러 / Lv. 88
소속: 백작령(伯爵領) 바덴하임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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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미친!’
창조주의 눈을 통해 확인한 에리히의 레벨은 무려 88.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몸담은 뒤로 마주하게 된 최강의 적이었다.
“... 아직 어리군, 용병인가?”
앳된 티가 나는 내 얼굴을 슬쩍 살핀 에리히가 물었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나는 긴장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피차 칼날 위를 걷는 인생인데, 전장에서 나이가 뭔 상관이오?”
“...”
내가 내놓은 현학적인(?) 대답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잠시 말이 없던 에리히.
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한다.
“칼날 위를 걷는 인생이라... 멋진 대답이군. 그 답례로, 최선을 다해주겠다.”
“아니, 조금은 봐줘도 괜찮...”
휘우우웅-!
순식간에 목으로 날아든 에리히의 검에 다급했던 나의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카캉!!!
못다 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불꽃 튀는 검의 격돌로 이어졌다.
<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