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0화 (36/197)

< 필사의 탈출 (1) >

카캉! 카아앙!

넘실거리는 살기를 담은 두 개의 칼날이 연이어 부딪친다.

전투의 향방은 이미 공성(攻城) 측인 바덴하임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는 상황.

하지만 나는 전투의 승패 따윈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눈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와의 대결에만 완벽하게 몰두하고 있었다.

“어린 것이 제법이구나!”

칭찬 혹은 도발.

혹은 둘 다의 의도가 어린 그 말을 꺼내놓기가 무섭게, 에리히의 검이 기이한 각도로 휘어지며 내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휘우우웅!!!

에리히의 검이 날아든다.

살가죽을 찢고 흉폭하게 나의 살점을 씹어 삼키려 달려드는 사자의 송곳니.

그러나,

“흐읏차!”

타탁!

나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재빨리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며 에리히의 공격을 피해냈다.

속절없이 허공을 베어내며 땅바닥으로 향하는 그의 검을 보며, 나는 기세 좋게 소리쳤다.

“그쪽도 나이 든 거치고 꽤 하시네, 흐아앗!”

에리히의 일격을 흘려낸 후, 나는 곧바로 한 걸음을 크게 나서며 검을 내리쳤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듯 빠르고 무자비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흐으으음!”

폐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사자의 울음이 들린다.

마치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한 줄기 용암처럼, 바닥으로 향해 있던 에리히의 검이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도저히 꺾여 올라올 수 없으리라 생각한 각도에서, 이게 되나 싶은 속도로 솟아오른 에리히의 검이 기세 좋게 떨어지는 나의 검을 받아낸다.

카아앙-!

“큽!”

서로 맞닿은 검을 넘어 팔을 타고 어깨까지 밀려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충격.

검 자루를 쥔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프고, 충격을 받은 어깨가 당장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공격을 받아낸 건 저쪽인데, 어떻게 된 게 때린 내가 더 피해를 받았단 말인가?

“흐으읍!!!”

위아래로 검을 맞댄 상태에서 에리히가 한차례 힘을 쓰자 눈으로 확연히 보일 만큼 내 검이 위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여실히 드러나는 힘의 우위.

하지만, 나는 이기지 못할 싸움을 미련하게 물고 늘어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흐아아앗!”

스르르르릉, 촤캉!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기울여 에리히의 검을 위로 흘려보낸 후, 훤히 열린 상대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다.

상대의 검을 흘려내고 다시 공격으로 전환하는 것까지 한 호흡에 해냈다.

마치 이렇게 이루어진 검술의 초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자연스럽고 쾌속하게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제대로 들어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할 정도였기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일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휘익, 퍼어억! 퍽!

“커흡!”

섬전처럼 뻗어 나온 에리히의 앞차기에 검을 든 손을 걷어차이고, 이어진 돌려차기에 제대로 몸통을 가격당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콰당탕!

“쿨럭! 컥!”

레벨 88에 달하는 초인 급의 강자(强者)가 시도한 발차기는, 동네 불량배가 시도하는 어설픈 발차기 따위와는 아예 급이 달랐다.

에리히의 발차기엔 일격에 벽을 무너뜨리고 바위를 깨부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어흑, 시발! 이게 사람의 발차기냐?’

명치 근처에서 올라오는 극렬한 고통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굳이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갈비뼈 몇 대가 부러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무자비한 통증!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손에 쥔 검을 놓치고, 걷어차인 곳의 내장이 터져 즉사 당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나마 난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해 신체 강화를 이루어냈기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정도로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누워 있을 여유가 있나?”

바로 그때, 흡사 사신(死神)의 속삭임 같은 에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즉시 나는 몸을 옆으로 굴리며 누워 있던 장소를 벗어났다.

갈비뼈가 부러진 자리가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쐐에에엑! 카앙!

내가 있던 곳에 에리히의 검이 벼락처럼 떨어지며 불꽃을 튀겼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단번에 꼬치에 꿰인 고깃덩이가 되었겠지.

“크흑! 이런 씨...!”

몇 발짝 떨어진 곳까지 재빠르게 굴러 이동한 나는 부러진 갈비뼈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에리히의 공격을 받아냈다.

카앙! 카캉! 캉! 쉬이잉! 슁! 카아앙!

일방적인 공격, 일방적인 수비.

여름날의 장마처럼 무섭게 쏟아지는 에리히의 공격을 받아내느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성난 사자의 발톱.

심지어는 정면에 검을 내리쳤다가 바로 그 직후에 뒤통수를 노리는 검격을 뿌리기도 했다.

“흐아아아아! 이런 개 시바알!!!”

나도 모르게 쌍욕을 토해내며 에리히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렇게 악이라도 써야 온몸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앙! 쉬이이잉!

대부분의 공격은 검을 들어 막아냈지만, 어떤 것들은 고개를 젖히거나 허리를 굽혀서, 심지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겨우 피해낼 수가 있었다.

“허윽, 헉! 으으... 허윽!”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폭풍이 지나간 뒤 찾아온 잠시간의 소강상태.

나는 연이은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에리히에게 검을 겨눈 채 속으로 생각했다.

‘하아, 진짜 더럽게 빡세네...’

그래, 저 아저씨와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지금 이 시점에 등장하는 ‘에리히 프라이슬러’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인물.

애초에 상대가 뭔 수를 쓰든 ‘이길 수가 없도록’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원작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그 원작을 토대로 만든 게임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과 그 일행들에게 레벨 88이란 초인의 경지를 달성한 ‘바덴하임의 사자’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

원작 소설의 독자와 게임의 유저들에게 스토리 초반의 긴장감을 높여주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에리히 프라이슬러였다.

‘물론, 나는 그런 설정에서 예외긴 하지.’

세계관의 외부 차원에서 넘어온 나는 그런 원작의 설정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이제 막 원작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점에 히든 피스를 두 개씩이나 집어먹고 레벨 50에 육박하는 능력치까지 갖췄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을 진행해야 할 시점에 벌써 고렙 보스를 때려잡고도 남을 능력을 갖춘 상황.

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에리히 프라이슬러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던 모양이다.

하,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이 아저씨 진짜 너무 하잖아?

“... 피가 많이 나는군.”

‘해도해도 너무한 아저씨’, 에리히의 말에,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내 몸 상태를 훑어보았다.

이미 걸레짝이 되어버린 갬비슨(Gambeson, 천으로 만든 누비 갑옷) 사이로 붉게 배어 나온 피가 보였다.

전신에 가득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

개중에 심한 것은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할 만큼 출혈량이 많았다.

저것들은 아마, 에리히의 검에 당한 상처겠지.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네, 진짜... 휴우!’

하지만 나는 그 상처들을 보고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 살벌한 아저씨가 휘두른 검을 몇 번이나 맞고도(비록 스친 거지만) 팔다리가 아직 붙어 있다는 건 동네방네 자랑하고도 남을 대단한 업적이었으니까.

“이름 모를 어린 용병이여.”

바로 그때, 에리히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이쯤에서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나? 자넨 여기서 죽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다.”

“...!”

말뿐만이 아니었다.

더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에리히가 들고 있는 검의 끝을 바닥으로 향한 채 말했다.

“용병이니 아마 리트베르크 측과 계약을 맺고 이 전투에 참여했겠지. 하지만, 이미 결과는 명확해졌다. 저길 봐라.”

에리히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공성추에 의해 부서져 버린 동쪽의 도시 성문을 지나 바덴하임의 병사들이 밀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에리히를 투입해 이쪽이 주공(主攻)인 것처럼 속이고 정작 주력은 동쪽 성벽으로 보내 문을 깨뜨린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우리 군이 성벽 안쪽으로 들어섰다. 리트베르크 군이 아성(牙城, Keep)으로 숨어 들어가 농성을 벌이겠지만, 그래 봤자 몇 시간이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리트렌은 점령될 것이고, 영지 리트베르크는 패배한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바로 말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멈칫했던 에리히.

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된 그가 내게 이야기했다.

“... 너에게 돈을 챙겨주기로 한 리트베르크의 주인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백작 각하의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둔 죄는 무겁다. 아르펜 남작은... 그 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바로, 죽음이라는 형태로.”

그 말을 하는 에리히의 표정이 영 편치 못했다.

그리고,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난 그 불편한 표정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체 기사도를 숭상하는 양반이니, 남의 영지 차지하자고 제 자식까지 죽이는 백작의 행동을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에리히는 대대로 백작의 가문인 바이츠제커 가(家)를 모셔온 봉신 가문 프라이슬러 가의 핏줄.

백작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를 거역할 수 없는 처지다.

‘참, 그런 놈 밑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인데...’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날 설득하려는 에리히의 말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용병으로서 계약의 의무를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은 알겠으나... 부질없는 행동이다.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에서 굳이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말한 에리히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만신창이가 된 나의 전신을 훑는다.

“... 시간을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 자네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에리히의 말처럼, 이미 내 전신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이대로 시간을 지체한다면,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게 될 테지.

내가 고민하는(척) 표정을 짓자, 다시 한번 에리히가 설득을 시도한다.

이 아저씨, 내가 되게 마음에 든 모양이네.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선 항복하고, 목숨을 건져라. 그 후에 용병이 아닌 당당한 기사로서 우리 바덴하임을 위해 싸워라. 내가, 너를 그리 만들어주겠다.”

살려주는 것도 모자라 기사 서임 제안이라니.

그것도 왕국 내에 명성이 자자한 백작령 바덴하임 제일의 기사,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하는 말이었다.

보통의 용병이라면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달콤한 유혹.

하지만...

나는, 에리히가 생각하는 ‘보통의 용병’이 아니었다.

“거, 아저씨가 모르시는 게 하나 있는데.”

“뭐...?”

갑자기 변한 나의 태도에 놀라 되묻는 에리히.

그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아저씨가 해준 얘기 다 좋은 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돈 욕심에 제 자식 죽이는 개새끼 밑으론 못 갈 것 같은데?”

“!?”

내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내용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마자,

휘우우우우웅!!!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에리히의 검이 나의 목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으려 했다.

“... 이런!”

허공을 향해 검을 찔러넣은 에리히의 낭패감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흐아아아아아!”

나는,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 필사의 탈출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