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1화 (37/197)

< 필사의 탈출 (2) >

“흐으읍!”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검을 피해 성벽 아래로 몸을 날린 나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건물 지붕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와장창! 콰드득! 콰쾅!!!

요란하기 이를 데 없는 소음과 함께 건물 지붕이 부서져 내린다.

눈비 정도나 막을 요량으로 얇은 나무판자를 두어 장 덧대 만든 지붕이었기에, 높은 곳에서 떨어진 내 몸무게를 버텨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뛰어내린 건물은 지붕 아래로 군마의 먹이로 쓸 건초더미를 잔뜩 쌓아 놓은 창고였고,

털썩!

내 생각대로, 그 건초더미는 성벽에서 뛰어내린 나의 몸을 어린아이 달래듯 가뿐히 받아내 주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써먹기 위해 위치를 봐둔 곳이었는데, 아주 적절한 순간에 제대로 쓸모를 발휘했다.

“끄으응...”

물론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어서, 나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잔뜩 구겨야 했다.

“후우, 진짜 뒤질 뻔했네. 내 모가지 잘 붙어있나?”

건초더미를 헤치고 내려서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만난 바덴하임의 사자는, 책 속의 문장이나 모니터 속 캐릭터를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맹수였다.

“처음부터 그 아저씨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 이 정도로까지 탈탈 처 발릴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하, 그래도 뭐... 계획대로는 됐으니까 됐다.”

내가 목 날아갈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에리히 프라이슬러와 검을 맞대었던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작 소설 속 에리히 프라이슬러는 전장에 투입되자마자 단번에 리트렌 성문을 깨트린 후 파죽지세로 영주가 머무는 아성(牙城, Keep), 즉 영주성 정문까지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막아선 푸른 방패 용병대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다 죽었지, 거기서.’

왕국 내에 서른 남짓에 불과하다는 금빛 용병패의 소유자인 겔베르트.

하지만 어지간한 기사는 찜쪄먹는 실력을 지녔던 그도 왕국 5대 기사 중의 1인으로 불리는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상대할 순 없었다.

‘... 대장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나머지 동료들도 모두 에리히 프라이슬러에 덤벼들었다가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었던 내가 이 세계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발목을 잡고 있던 덕분에 대장을 비롯한 푸른 방패의 용병들은 그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살아남았을 거란 얘기는 아니지.’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죽음의 위협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곳은 사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피에 굶주린 늑대와 들개들이 사방에 즐비한 곳.

바로, 전쟁터였으니까.

“후우... 다들 살아있기를 바랄 수밖에.”

전투 직전, 비장한 각오로 헤어진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어둑해진 도시의 골목길 속으로 스며들었다.

***

리트렌 영주성 내부_

쿠우우우웅-!!!

바덴하임 군의 공성추가 영주성 정문을 힘껏 후려친다.

명색이 영지의 주인인 영주가 사는 성의 정문이었다.

대단히 크고,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 정문이 바덴하임이란 폭풍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슈슈슈슈슈슛!!!

“다시 방패 들어어어어!!!”

“으아아아아!”

쏟아지는 화살 비를 막아내기 위해 리트베르크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린다.

터터텅! 텅! 터텅!

방패를 쪼갤 기세로 꽂히는 바덴하임 군의 화살.

그 아래, 이를 악물고 버틴 리트베르크 군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린다.

그들의 눈에 벌써 대여섯 번이나 이어진 화살 공격에 부서지고 갈라진 방패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까진 겨우겨우 버텨냈지만, 저런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쿠우우우우웅-!!!

다시 한번, 공성추가 영주성의 정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성문에 걸어놓은 빗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리트베르크 영주성의 수비대장, 루카스 비텔(Lukas Vittel)이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친다.

“전군 전투 준비이이이이이!!!”

촤랑! 촤라라라라랑! 촤라랑!

루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을 뽑는 병사들.

그들의 눈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바덴하임에 대한 증오가 어우러져 무서운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웅-! 콰지지직!!!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영주성의 성문.

정신없이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뚫고, 살기 어린 눈을 한 바덴하임의 침략자들이 밀어닥친다.

촤아앙!

그 악의 가득한 시선을 바라보며 영주성 수비대장 루카스가 마침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저 더러운 침략자 놈들을 모두 죽여라! 리트베르크여, 영원하라아아아아아아아!!!”

“가자아아아아!!!”

“이 개새끼들! 다 죽어어어어!”

광기 어린 리트베르크 병사들의 외침.

“좆 같은 리트베르크 새끼들!!! 다 뒤져!!!”

“쳐라! 목을 다 날려버려어!”

“싹 다 죽여버리자, 가자아!!!”

그 기세에 질 수 없다는 듯, 바덴하임의 병사들도 마주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놈들, 어딜 감히 넘보느냐!!!”

처절한 외침과 함께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돌진한 영주성 수비대장 루카스.

푸화아아악!!!

그가 휘두른 검에, 가장 앞선에서 뛰어들던 바덴하임 병사들의 머리가 걸려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리트베르크의 영광을 위해 죽는다! 흐아아아아!!!”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기사의 검은 매서웠다.

무시무시한 검격을 줄기줄기 뿌려대며 바덴하임 군의 전진을 가로막는 루카스.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린 바덴하임 병사들의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이런 시발... 크헉!”

“하, 한꺼번에 덤비면 돼! 당황하지 말고 한꺼번에 덮치... 끄아악!”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한 칼질에 적병 서넛의 목을 날려버리는 루카스의 놀라운 무위(武威)를 목격한 바덴하임 병사들이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리트베르크의 여러 기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실력을 지녀 영주성 수비대장이란 중책을 차지한 루카스였다.

그런 그에게 눈앞에 모여 있는 잡졸들 따윈 열이 됐건 스물이 되었건 허수아비 베어내듯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는 손쉬운 상대였다.

“감히 이따위 실력으로 리트베르크를 넘본 것이냐! 이곳을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이놈드으으을!!!”

마치 양 떼 사이로 뛰어든 한 마리의 늑대처럼, 바덴하임 군을 매섭게 몰아치는 루카스.

“와아아아아아!!!”

“가자! 저 개새끼들을 몰아내자아!!!”

“침략자에게 죽음을!!!”

“대장님의 뒤를 따르라아아아!”

루카스의 분전에 기세가 살아난 리트베르크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드는 바덴하임의 침략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기울어진 전세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역사에 남을만한 마지막 전투의 기억 정도는 남기고 싶었던 리트베르크 병사들의 간절한 소망.

하지만, 잔혹하게도 운명의 신은 그들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

쐐에에에에에엑!!!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파공성.

그 소리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전투의 열기에 취해있던 양측의 병사들 모두에게 섬뜩함을 안겼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사나이, 루카스 역시 그 소리를 인지했다.

저 멀리, 적군의 횃불이 일렁이는 성문 너머의 공간을 응시하는 그.

“?!”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 이런 젠장!!!”

콰악, 루카스는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던 두 발을 땅에 박아넣었다.

동시에 전신을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이어 측면으로 처져있던 루카스의 왼손이 화살이 쏘아지듯 튕겨 위로 올라왔다.

자연스레, 그 손에 쥐여 있던 방패 또한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려 주인의 몸을 가린다.

어찌나 빠르게 반응을 했는지, 원래부터 방패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흐읍!”

방패를 쥔 루카스가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며 이를 악문다.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보급형 방패와 달리 루카스의 방패는 단단한 나무의 겉면을 얇게 편 강철로 완벽히 감싸고 있는 견고한 구조.

창칼이나 화살 같은 일반적인 공격은 물론이고 방패의 천적이라 불리는 도끼질까지도 여러번 버텨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으나...

콰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파열음이 들리고,

으지직!!!

방패를 관통해버린 ‘그것’이, 방패를 쥐고 있던 루카스의 손을 찢어발기며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퍼어억!!!

사방으로 흩날리는 붉은 피보라.

방패와 손을 무참히 찢어내고도 지닌 힘을 잃지 않은 그것이, 루카스의 머리통마저 꿰어버렸다.

스르륵, 털썩!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루카스의 몸이 허망하게 무너진다.

“어, 으어...”

“이... 이거...!”

존경하는 상관의 머리통에 꽂힌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리트베르크의 병사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다.

그것은, 팔 길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투척용 단창 한 자루.

이 자리의 모두가, 아니 왕국 남부 지역에 사는 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는 불세출의 기사가 즐겨 쓰는 무기의 하나였다.

“그분이 오셨다아아아아!!!”

“프라이슬러 경이 앞장서신다! 우리가 이겼다아아아!!!”

“적들에게 죽음을!!!”

“바덴하임 만세! 우와아아아!!!”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바덴하임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리트베르크의 병사들은 절망한다.

그리고 마침내, 활짝 열린 영주성의 성문을 넘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 존재.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

그의 입에서 최후통첩이 떨어진다.

“... 저항하면 베겠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길을 열어라.”

한낱 병사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멈춰 세울 수 없는 재앙(災殃)의 당도에,

탱그렁! 태앵! 텡겅!

가을날의 낙엽처럼, 리트베르크 병사들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져 내렸다.

***

“영주님!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곧 바덴하임 놈들이 이곳까지 밀어닥칠 겁니다. 그 전에 탈출하셔야 합니다!”

바덴하임 군이 성문을 부수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섰다는 보고에 군무관 데론 베르켈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하지만, 그 애타는 목소리를 듣는 상대는 담담한 눈빛으로 이렇게 물을 뿐이다.

“... 니나는, 어찌 되었습니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제 자식의 일부터 묻는 영주의 모습에, 데론은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는 무언가를 느꼈다.

“니나 아가씨는 아드리안과 함께 먼저 떠났습니다! 그러니 영주님께서도 이제...!”

“아니,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리트베르크와 함께 최후를 맞겠습니다.”

“영주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함치는 데론의 얼굴을 보며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베르켈 경, 그동안... 부족한 저를 모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곳에 제가 남아 시간을 끌 테니...”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힘겹게 삼켜내는 남작.

핏발선 그의 눈에서 막지 못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 우리 니나를, 아르펜의 마지막 핏줄인 제 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필사의 탈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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