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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2화 (38/197)

< 필사의 탈출 (3) >

두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비좁은 폭을 지닌 어두운 지하 통로였다.

해가 들지 않는 지하 특유의 습한 기운이 가득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곳임을 증명하듯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

벽면엔 횃불은커녕 그 흔한 양초 등불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통로의 내부.

그 끝 모를 어둠 속을 숨 가쁘게 헤쳐나가는 두 사람의 인영(人影)이 있다.

“아가씨! 이쪽입니다!!!”

“허억! 허억! 아드... 아드리안!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아!”

“안 됩니다, 아가씨! 바덴하임 놈들이 언제 비밀 통로 입구를 발견할지 모릅니다. 힘들어도 지금 멈추면 안 됩니다! 어서요!”

체력이 다해 자꾸 무너지는 소녀의 가녀린 몸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일으키는 갈색 머리의 소년.

소년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숨을 헐떡이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빛엔 진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아직... 하아! 안 오셨잖아! 그러니까... 하윽!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영주님께선 스승님, 아니 베르켈 경과 함께 움직이실 겁니다. 그러니, 영주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은 아가씨만 생각하십시오!”

함께 오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

그리고, 소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년.

그들의 정체는 리트베르크 영주성에 설치된 비밀 통로를 통해 탈출 중인 바일 아르펜 남작의 외동딸 니나 아르펜과 그녀의 호위인 아드리안이었다.

“하아... 하아...”

아드리안의 손에 들려 일렁거리는 횃불 아래, 가쁜 숨을 몰아쉬는 니나의 안색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창백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병마로 여의고 아버지인 남작의 품에서 세상 가장 귀한 천금으로 사랑받으며 자란 그녀였다.

이처럼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은 평생 겪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지하 통로의 퀴퀴한 냄새와 목 끝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이 그녀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순간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하아... 하아! 아드리안, 얼마나 더 가야 해?”

“그게...”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가 묻는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는 어린 소녀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왜?

‘...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소년 역시 이 비밀 통로에 들어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오늘 처음 알았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영주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비밀리에 건설된 비상 탈출용 지하 통로.

당연히, 그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탈출의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영주님과 아가씨, 스승님 말고는 영주성 내에 이 통로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다고 했지.’

오늘부로 그 명단에 아드리안 자신의 이름이 더해졌지만, 이젠 별 의미가 없는 얘기였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이 통로를 쓸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스승님, 무사하신 겁니까?’

멀리, 그들이 지나온 어둠 저편에 있을 스승 데론 베르켈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년은 무거워지는 발길을 애써 재촉했다.

***

“영주성 내부를 모두 확인했지만, 남작의 딸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안에 없다고?”

“예.”

“이런 젠장!”

부하의 보고를 받은 리트베르크 정벌군 사령관, 틸레인 슈타우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성벽을 넘어 리트렌 시내에 돌입한 이후 숨 돌릴 틈 없이 군사를 몰아쳐 고작 몇 시간 만에 영주성을 점령했다.

문제는, 생포해 바덴하임으로 끌고 가려 했던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는 것.

더불어 영지의 권력 서열 2인자로 꼽히는 군무관 데론 베르켈과 유일한 후계자인 외동딸 니나 아르펜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남작과 그 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

부하의 실책에 자비로움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 주군, 바덴하임 백작의 냉혹한 얼굴을 떠올린 사령관 틸레인이 마른침을 삼킨다.

“다시 찾아라! 그 두 년놈 모두 성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뒤져라! 화장실이건, 부엌 창고건 싹 다 뒤져보란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의 닦달에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된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모습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사나이,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안 어딘가에 영주와 그 가족들을 위한 비밀 통로가 있을 걸세. 아마, 그 길로 성을 빠져나갔을 거야.”

“... 비밀 통로, 말입니까?”

여전히 에리히에게 말을 높이는 사령관 틸레인.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 조직 내부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기이한 상하관계였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에리히는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1등 공신이었다.

일주일 넘게 지지부진했던 리트렌 공성전이 순식간에 바덴하임 군의 승리로 끝난 것은 단숨에 성벽을 넘어 리트베르크 군을 쓸어버린 에리히의 가공할 무위(武威) 덕분이었으니까.

‘... 바덴하임으로 돌아가면 백작 각하께선 에리히 경의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큰 상을 내리실 거다.’

그리고 아마도, 백작이 내릴 그 큰 상이란 빼앗았던 군무관 직책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겠지.

그 얘기인즉 눈앞의 에리히가 다시 자신의 상관이 될 것이란 뜻.

사정이 이렇기에 틸레인은 에리히를 대하는 언행에 전보다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리트렌은 꽤 규모가 있는 도시지. 영주성은 그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고... 비밀 통로를 아무리 길게 지었다고 한들, 도시 바깥까지 한 번에 나갈 수 있게 만들진 못했을 거야.”

“그 말씀은...?”

“성벽 가까운 도시 외곽지역 어딘가에 비밀 통로의 출구가 있을 거라는 말이지.”

“...!”

에리히만큼은 아니지만, 틸레인 역시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 베테랑 기사.

이 정도까지 설명을 해주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 즉시 수색조를 편성해 도시 외곽지역을 살핀다! 남작의 딸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이 빠져나간 비밀 통로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서둘러라!”

***

허억... 허억...

통로 뒤쪽에서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촤앙!

급히 검을 뽑아낸 아드리안이 니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내며 외쳤다.

“누, 누구냐! 더 다가오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정체를 밝혀라!”

서서히 약해지는 횃불을 앞으로 내밀어 뒤쫓아온 어둠을 밝혀보지만, 아직 거리가 있어서인지 다가오는 인물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비밀 통로의 입구가 발각된 걸까? 상대 숫자는 몇이지? 내가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아드리안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친다.

그는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데론 베르켈의 하나뿐인 제자였고, 그 이름에 걸맞은 놀라운 재능과 성품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수식어를 제외하고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결국 세상 경험 부족한 열여섯의 소년에 불과했다.

‘어떡하지? 아가씨를 먼저 보내야 하나? 아니야, 가진 횃불이 하나뿐인데... 젠장!’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등 뒤에서 느껴지는 니나의 떨림까지.

아직 모든 면에서 부족한 어린 소년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새하얗게 변해버리던 그 순간...

“아드리안.”

“...!”

어둠 저편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낯익은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흔들리던 소년의 마음을 단단하게 붙들어주었다.

“스승님...?”

“그래, 나다.”

일렁거리는 횃불의 빛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아닌 아드리안의 스승이자 리트베르크의 군무관인 데론 베르켈이었다.

“할아버지!!!”

아드리안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금갈색 머리의 소녀가 다급히 소리치며 달려 나온다.

“아가씨!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흑흑! 저는... 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는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이 늙은이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흑흑!”

베르켈의 주름진 얼굴을 본 니나가 그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인 바일 아르펜 남작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탓에, 니나는 종종 사석에서 베르켈을 할아버지라 부르곤 했다.

베르켈 역시 그런 니나를 자신의 친손녀처럼 생각했기에,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고 울컥 치솟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후우... 크흠! 아드리안, 너는 괜찮으냐?”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베르켈이 자신의 제자에게 묻는다.

“예, 스승님. 저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하아, 정말 다행이다. 그럼... 어서 움직이자. 곧 바덴하임 놈들이 통로 입구를 발견하고 우리를 추격해 올 거다.”

“근데... 스승님?”

“음?”

“여, 영주님은 어찌 되셨습니까? 스승님과 같이 움직이신 게 아닙니까?”

“...”

어딘가 멍한 표정이 된 아드리안의 물음에 베르켈의 말문이 막힌다.

그의 주군이자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정당한 주인.

아르펜 가문의 당대 가주(家主)이자 소녀 니나의 아버지.

바일 아르펜 폰 리트베르크.

그는, 죽었다.

마지막 모습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든, 바덴하임 놈들의 손에 생을 마감하든 죽음이란 끝은 변하지 않을 터.

영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겠다는 영주의 그 숭고한 의지를,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 목숨을 걸겠다는 아버지의 애끓는 희생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어. 후우우...’

문제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눈앞의 어린 소녀에게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

‘... 주 아르닌이시여, 운명의 장난이 너무나 가혹하지 않습니까!’

한순간에 소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잔혹한 전쟁이었다.

평생을 살아온 세상을 잃고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달려 도망치고 있는 이 순간.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의 죽음을, 니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영주님께선...”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버텨내기엔 너무도 가혹한 상황에, 베르켈의 입이 떨어지지 않던 그때...

타악!

“... 어서 가요. 놈들이 쫓아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드리안의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을 잡아챈 니나가 앞장서서 어두운 지하 통로를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아, 아가씨!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횃불은 제가 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드리안이 허둥지둥 소녀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베르켈.

“영주님...”

지난 20년간 리트베르크를 위해 살아온 노 기사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가장 가까운 외곽지역.

지체 높으신 분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허름한 빈민가 구역 한쪽에 너른 공터가 존재했다.

본래 별다른 개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아 방치되었던 땅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죽은 이들을 그곳에 묻기 시작한 것이 쭉 이어져 지금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장소의 특성상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었고, 최근엔 도시 전체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면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 공동묘지 구역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숫자는 총 셋.

그중 가장 큰 덩치를 지닌 선두의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자세 낮추고 이동해라. 혹시 바덴하임 개새끼들이 냄새 맡을 수도 있으니까.”

“냄새는 뭔 냄새요. 아, 대장 며칠 안 씻은 발 냄새는 좀 날 수도 있겠네. 큭큭!”

“공동묘지 온 김에 묫자리 좀 봐줄까? 여기 바로 묻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 죄송함돠.”

살벌한 농담으로 뒤따르던 이의 흰소리를 단번에 제압한 선두의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핀다.

한참을 살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사내가, 일행의 가장 뒤쪽에서 따라온 소년에게 물었다.

“막내야, 여기 확실한 거지?”

“예, 여기 맞아요. 바로 이 근처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물음에 답하는 소년.

흙먼지와 피로 물들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과 신비로운 녹안(綠眼)이 희미한 달빛 아래 빛나고 있었다.

< 필사의 탈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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