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3화 (39/197)

< 필사의 탈출 (4) >

“... 이동합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이후, 나는 선두였던 겔베르트와 위치를 바꾸어 일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등불이 걸린 건물들이 있어 어느 정도 시야 확보가 되었던 시내 중심가와 달리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빈민가 외곽의 허름한 공동묘지.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한 이후 기이할 정도로 밤눈이 좋아진 내가 길잡이로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정지.”

조심스러운 나의 경고에 뒤따라오던 엔리케와 겔베르트가 발걸음을 멈추며 몸을 수그린다.

멀리, 빈민가 골목에서 창칼을 손에 쥔 바덴하임 병사들 몇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직후의 일이었다.

뒤늦게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엔리케가 내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와씨... 데미언, 저게 보였어? 이렇게 캄캄한데? 너 무슨 올빼미냐? 아니면 부엉이?”

“... 이동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밤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조금씩 성벽 쪽으로 이동했다.

워낙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동하다 보니, 짧은 거리를 가는 데도 이동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었다.

“... 대장.”

“음?”

“저기 앞에 보이는 건물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버려진 창고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내 제안에 겔베르트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 반응에서 그가 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끼이익-

창고 출입문의 녹슨 경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던지라, 공동묘지를 지나친 바덴하임 병사들이 돌아오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혀 있는 창고 내부.

부서진 지붕을 통해 스며든 달빛이 흐릿하게나마 창고 안의 구조를 비춰주고 있다.

“여기서 잠깐만 숨 돌리고 가시죠. 오래는 못 있겠지만...”

“아오! 그래,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다!”

털썩, 흙먼지 가득한 창고 바닥에 등을 대고 냅다 드러눕는 엔리케.

걸레짝이 되어버린 그의 오른손가락이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화살을 날리면 손가락이 저렇게 찢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엔리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번엔 열린 문틈으로 창고 바깥의 상황을 살피는 겔베르트에게 물었다.

진작부터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대장.”

“어, 왜.”

“다른 대원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창고 바깥만 바라보던 겔베르트.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 칼밥 먹고 사는 놈들 팔자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성문을 깨뜨리고 도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 바덴하임 군에 의해 리트베르크 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정신없는 난전의 와중에 푸른 방패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항복했으며, 누군가는 살아서 도시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푸른 방패의 모두가 사망하는 원작 소설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과.

“머리 나쁜 모지리 새끼들, 도망은 잘 갔으려나...”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겔베르트는 그저 부하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아으, 잠깐 누워있었다고 바로 몸에 한기가 드네. 읏차!”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엔리케가 바닥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운 좋게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그러니까... 막내,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알았지?”

“예, 뭐...”

“그리고 인마,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냐? 당장 우리도 도망 못가서 이 거지 같은 창고에 숨어 있는 판국에...”

“하하, 그건 그렇네요.”

동료들을 잃은 슬픔에 마냥 잠겨 있기엔, 우리가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 엔리케의 말이 맞아. 우리 살길 찾는 게 먼저다.”

“예, 대장. 슬슬 움직이시죠.”

“큼, 근데 막내야. 이쪽으로 가면 ‘개구멍’ 있는 거 확실하지?”

여전히 반신반의한 엔리케의 목소리에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땅굴이 있는 거,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어요.”

거짓말이다.

직접 이 빈민가를 찾아와 내 눈으로 그 땅굴의 존재를 확인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 땅굴은 아무나 와서 막 쓸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원작 소설엔 분명히 이 공동묘지 근처에 그 땅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 하...

“... 잠깐, 밖에 누가 있다.”

바로 그때, 창고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살피던 겔베르트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무언가를 발견한다.

“대장, 뭔데요? 바덴하임 놈들입니까?”

그렇게 묻는 엔리케의 손엔 이미 바닥에 내려두었던 자신의 활이 잡혀 있었다.

평소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이럴 땐 새삼 그가 전투의 베테랑이라는 게 느껴진다.

“아니야, 바덴하임 놈들은 아닌 것 같다.”

“예? 그럼 대체 누가 겁대가리 없이 이 전쟁통에 밖을 싸돌아다닙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한 엔리케의 목소리.

하지만 곧바로 튀어나온 겔베르트의 대답에, 그의 눈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 저 양반, 리트베르크 군무관 같은데?”

***

“... 아가씨,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으십시오. 바덴하임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네, 할아버지.”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온 빈민가 공동묘지의 한복판.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있었다.

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지닌 건장한 체구의 노인과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를 지닌 잘 생긴 소년.

그리고,

“후우우...”

긴장된 한숨을 내쉬며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는 아름다운 외모의 어린 소녀까지.

그들의 정체는 바덴하임 군이 점령한 영주성을 가까스로 탈출한 남작의 딸 니나 아르펜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 그의 제자 아드리안이었다.

영주성 지하 비밀 통로의 출구가, 바로 이곳 빈민가 공동묘지 한복판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

이름 없는 자의 무덤으로 위장하여 만들어진 비밀 통로의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온 그들은, 한껏 긴장한 채로 한밤의 공동묘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내 기억에, 도시 밖으로 나가는 땅굴이 이 근처에 있었다.’

데론은 영지의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이었다.

그런 그가 리트베르크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리트렌의 성벽에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그 땅굴을 틀어막아야 했겠지만...’

때론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적당한 타협을 하는 게 현실에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 많은 데론은 잘 알고 있었다.

해당 땅굴은 리트렌 도시 내에 암약하는 도둑 길드가 만들고 관리하는 일종의 ‘영업 시설’이었다.

그들은 땅굴을 통해 도시 내로 밀수품을 들여오거나, 성문을 통해 정상적으로 도시를 왕래하지 못하는 이들을 돈을 받고 이동시켜주었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짓이었고, 가만 놔둬선 안 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도둑 길드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독버섯 같은 존재.

그런 놈들이 관리하는 땅굴을 틀어막아봤자 결국엔 다른 곳에 똑같은 게 만들어질 뿐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위치를 아는 곳에 두고 꼼꼼히 감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데론은 그 땅굴을 메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그 날의 선택이, 오늘의 데론에게 생명을 구할 한줄기 동아줄이 되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소녀, 니나의 어깨를 감싼 데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가씨.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로 그때,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냐!”

“...!”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 즉시 니나의 작은 몸뚱이를 안아 든 데론과 아드리안은 근처 빈민가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쿵쿵! 쿵쿵!

품 안에서 터질 듯 뛰는 니나의 심장 소리가 데론에게 전해진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주길...’

하지만 데론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곧 빈민가 골목에서 바덴하임 군의 복장을 갖춘 다섯 명의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이 새끼야!”

“아씨, 분명히 들었다니까? 뭔 소리가 났어.”

“그냥 동물 소리 잘못 들은 거 아냐? 고양이나 길거리 똥개 같은 애들 있잖아.”

“아, 이 미친 새끼가... 분명 사람 목소리였다니까? 넌 내가 개소리랑 사람 소리도 구분 못 하는 거 같냐?”

“뭐, 맨날 왈왈거리고 개소리를 하긴 하잖아? 푸흐흐...”

“이 씨발 새끼들이 진짜!”

데론은 깊은 밤이 만들어준 짙은 어둠 속에 가만히 숨어 대화를 나누는 바덴하임 병사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오가는 대화의 수준을 들어보니, 아무리 양보해도 정예라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의 병사들이었다.

군기가 풀어진 놈들의 모습에, 검을 쥔 오른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 그냥 베어 버릴까?’

저 정도 수준이라면, 자신과 아드리안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한 호흡에 베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아니야... 혹시라도 실수가 나온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저 다섯 명의 목숨을 한 번에 끊지 못한다면, 그래서 저들 중 한 놈이라도 도망을 치거나 주변의 다른 병사들을 부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리라.

하여, 데론은 안전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

위험한 도박을 하기엔 지금 그의 품에 안긴 소녀의 존재가 너무 소중했기에...

‘그냥 그대로 지나가라. 제발...’

그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한참 흰소리를 떠들던 바덴하임의 병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더 멀어지는 놈들의 발소리.

온몸의 털이 바짝 서도록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려던 찰나,

찍찍찍!

어디선가 나타난 쥐새끼 한 마리가 징그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데론의 발밑으로 파고들었고,

“꺅! 어, 크읍!”

깜짝 놀란 소녀, 니나의 앳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니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무의식적인 반응이었고, 그 즉시 하얗고 자그마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뭐야?!”

“거봐, 시발! 누구 있댔잖아!”

“누구냐! 당장 튀어나왓!”

“이런 개새끼들이!”

촤앙! 촤아앙!

흉흉한 기세가 된 바덴하임의 병사들이 각자의 검을 뽑아 들며 달려오기 시작한다.

“... 이런!”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데론이 이를 악물며 뛰쳐나가려던 찰나,

쉬이이이잉! 퍼억!

“끄르륵...!”

되돌아오던 바덴하임의 다섯 병사 중 한 명이 정확하게 목울대를 꿰뚫어 버린 화살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꾸러졌고,

후우웅, 콰지직!

다른 한 명은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건장한 사내의 검에 머리통이 쪼개져 쓰려졌으며,

푸화아아아악!

남은 세 명의 병사는, 환상처럼 어둠을 갈라낸 한 자루 검에 의해 한꺼번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일어난 다섯 병사의 죽음.

그리고,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데론의 눈앞에 나타난 세 명의 사내.

그중 가장 큰 덩치를 지닌 잿빛 턱수염의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데론에게 물었다.

“베르켈 경, 저를 기억하십니까?”

“자네는...”

한번 보면 쉬이 잊기 힘든 인상적인 사내의 외모.

그 즉시 사내의 이름을 떠올린 베르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억나네.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이었지? 이름이... 겔베르트였던가?”

“예, 맞습니다. 용병 계약서를 작성할 때 영주성에서 뵈었었지요.”

거기까지 말한 겔베르트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바덴하임 놈들에게 부하를 잃고 탈출 중이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움직이시지요. 그편이, 모시는 분에게도 훨씬 안전할 겁니다.”

“...”

뜻밖의 제안을 들은 데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이 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만난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줄 귀인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잡아 바덴하임에 팔아넘길 승냥이 떼인가?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둔 데론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베르켈 경,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덴하임 놈들이 오기 전에 도둑 길드의 땅굴을 통해 도시 밖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어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

땅굴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깜짝 놀란 데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채근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거칠게 머리에 감싼 두건 사이로 삐져나온 금빛 머리가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데론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상대의 짙은 녹안(綠眼).

세상의 신비로운 기운을 모두 담은 듯한 맑고 깊은 그 눈빛에 이끌린 데론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 함께 가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베르켈 경.”

꾸벅, 데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녹안의 소년이 이번에 데론의 뒤편에서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 니나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 어떤 적도, 아가씨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겁니다. 저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한 소년의 말에, 니나가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 이름.”

“예?”

“이름이요.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다면서요.”

“아...”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녹안의 소년이 니나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저는...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입니다.”

< 필사의 탈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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