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4화 (40/197)

< 필사의 탈출 (5) >

“... 일단 주변에 보이는 놈들은 없습니다, 이동하시죠.”

“그러지.”

도둑 길드의 땅굴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온 이후로도, 나는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리트렌 주변의 지리에 빠삭한 데론의 지식과 흐릿한 달빛 아래서도 대낮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압도적인 시력이 합쳐진 덕에 우리 일행의 이동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완전히 탈진해버린 니나의 존재였는데...

“아드리안... 괜찮아? 많이 무겁지?”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 또한, 호위인 아드리안이 니나를 업고 이동하면서 해결되었다.

“베르켈 경, 전방에 큰 바위 보이십니까?”

“... 보이네.”

“그 뒤쪽 그림자에 숨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알았네, 그리 하도록 하지. 마침 아가씨도 많이 지치신 것 같으니...”

땅굴을 빠져나와 한참을 이동한 후에야 숨을 돌리게 된 우리 일행.

길바닥에 쓰러져도 곧바로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아직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처지다.

“대장, 그리고 베르켈 경.”

“음?”

“... 무슨 일이신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겔베르트와 탈진한 니나의 상태를 살피던 베르켈이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

“잠깐, 저랑 회의 좀 하시죠.”

***

늦가을의 새벽녘, 밀려오는 한기가 소녀의 가녀린 몸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흐윽...”

덜덜덜, 무섭게 떨리기 시작하는 니나의 몸.

오늘, 생애 가장 비극적인 하루를 맞은 열두 살 소녀가 한데 모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채 떨고 있었다.

가슴을 저미는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너무 추운 날씨에 눈물조차 얼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아버지.’

두 눈 꼭 감은 소녀의 머릿속에 아버지 바일 아르펜 남작의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인자했던 아버지.

영원히 그녀의 곁에 머물며 든든한 그늘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던 아버지.

하지만, 이제 소녀는 남은 생을 홀로 외로이 아버지의 빈자리 속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버지, 저는 이제 어떡해야 해요? 내가 혼자 어떻게...’

“아가씨.”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던 소녀의 마음을 깨운 누군가의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소녀의 눈에, 너저분한 모포 한 장을 손에 든 믿음직한 인상의 소년이 보였다.

그녀의 호위, 아드리안.

그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어린 주인을 바라본다.

“아가씨, 아까 만났던 도둑 길드 녀석한테 얻은 모포입니다. 냄새도 나고,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추위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드리안은 손에 든 모포를 널찍하게 펴 니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챙기는 충직한 소년.

그 따뜻한 마음에, 니나는 추위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억지로나마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따뜻하네. 정말 고마워, 아드리안. 덕분에...”

“모포는, 제가 아니라 저분이 챙겨 주셨습니다.”

“아...?”

니나의 눈빛이 옆쪽으로 향해 슬쩍 옮겨진 아드리안의 시선을 뒤따른다.

심각한 얼굴로 군무관 데론 베르켈, 용병대장 겔베르트와 무언가를 이야기 중인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이라 소개했었던 녹안(綠眼)의 소년.

열여섯인 아드리안과 별로 차이가 나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을 하고서 노기사인 데론 못지않은 담대함과 침착함을 보여주고 있는 사내.

그 기이한 조합만큼이나 눈에 띄는 소년의 외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나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낀다.

‘... 가만, 왜 낯이 익지?’

눈을 가늘게 뜨고 데미언의 얼굴을 바라보는 니나.

‘아!’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지난날의 기억이 있었다.

“저 사람... 분수대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던 그 사람이잖아?!”

***

“무조건 남쪽으로 가야 하네.”

리트베르크 측 인원을 대표하는 데론 베르켈과 대장 겔베르트, 나까지 셋이 모인 회의 자리였다.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묻는 나의 말에 데론은 단호한 어조로 남쪽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돌레이 강만 건너면 신성교국의 영토가 지척이야.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바덴하임 놈들이 추격해오지 못할 걸세.”

“하긴, 황금백이 지닌 돈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교황의 권위까지 넘볼 수는 없겠죠.”

겔베르트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나는 그 말을 호락호락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베르켈 경. 강은 어떻게 건너실 생각입니까?”

“돌레이 강은 폭이 넓긴 하지만 수심 자체는 그렇게 깊지 않다네. 건장한 남자라면 맨몸으로도 충분히 건널 만하지.”

“저희는 그렇다치고, 니나 아가씨는 어떻게 강을 건넙니까?”

“아가씨는 어린아이라 몸이 작으시니 적당한 널빤지나 통나무를 뗏목처럼 활용하면 될 걸세.”

“흐음...”

데론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리트베르크와 영지를 맞대고 있는 지역은 총 세 곳.

북동쪽으로 백작령 바덴하임이 자리하고 북서쪽엔 남작령 노이베른이, 남쪽으로는 신성교국이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이번 전쟁을 일으킨 원수, 바덴하임 쪽으로는 당연히 도망칠 수 없다.

북서쪽 노이베른 방면으로의 도주 역시 불가능했다.

노이베른의 영주인 아몬 렘볼트(Amon Rembolt) 남작은 황금백(黃金伯)의 충성스러운 봉신이었으니까.

반면, 남쪽의 신성교국은 황금백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

데론이 강을 건너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남쪽을 탈출 루트로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던 거다.

하지만...

‘절대로, 강을 건너선 안 된다.’

원작의 내용을 기억하는 나는 돌레이 강을 건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데론과 니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덴하임의 수색조 병사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흉포한 송곳니를 드러낸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서 있을 것이다.

‘에리히와 만나면 데론은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해.’

머릿속으로 원작의 흐름을 되짚어 보며, 나는 스킬 ‘창조주의 눈’을 활용해 데론의 능력치를 살폈다.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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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론 베르켈 / Lv. 53

소속: 없음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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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레벨 50을 넘기는 강력한 능력치의 기사 데론 베르켈.

거의 육십에 가까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노익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강 건너에서 만나게 될 에리히 프라이슬러는 무려 레벨 88에 달하는 <로스트 킹덤> 세계관 내 최강자의 하나.

나이에 비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강한 실력을 지닌 데론이었지만, 에리히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랑 겔베르트가 합세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상대할 적이 에리히 한 명이라면 모를까, 무수히 많은 바덴하임의 기사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 터.

‘강을 건너면 우린 다 죽는다. 가면 안 돼.’

원작에서 에리히가 휘두른 검에 맞아 쓰러지던 데론의 모습이 생각났다.

펠리노어 왕국 3대 기사단 중 하나로 불리는 ‘사자기사단’ 출신의 선후배인 두 사람.

15년에 달하는 까마득한 연배 차이가 있는 만큼 기사단 활동 당시 선배인 데론을 깍듯이 모셨던 에리히다.

데론 역시 남다른 검의 재능을 지닌 후배 에리히를 아꼈고,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그에게 전수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차기 왕국제일검이 될 재능’이라며 후배 에리히를 추켜세워 주었던 데론.

가장 존경하는 선배 기사가 누군지 물을 때마다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이라는 대답을 빼먹지 않았던 에리히.

하지만 그런 그들의 오랜 우정은 잔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 존경하던 선배 기사 데론을 쓰러뜨린 후 ‘왕국은 오늘 최고의 기사 한 명을 잃었다’고 침통하게 말하던 에리히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부분을 게임으로 만들 때 감정이 차올라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었지. 후우...’

한편, 두 사람이 싸우는 틈을 타 니나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강가를 거슬러 도망치던 아드리안.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부하들에게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던 모습 역시, 에리히라는 기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아무튼, 그렇게 데론이 죽고 난 뒤에 니나와 아드리안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도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다를 것이다.

그 모든 원작의 흐름을 꿰고 있는 내가 있으니 말이다.

‘데론은 여기서 죽어선 안 돼. 무조건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

데론은 당장 처한 상황에서도 큰 힘이 될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 내 미래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살려야 할 중요한 인재였다.

그러니, 그가 강을 건너게 두어선 안 된다.

문제는 이 어르신을 어떻게 설득하냐는 것인데...

“으잉? 저 새끼 저거... 야, 막내야. 이리 와봐, 빨리!”

바로 그때, 리트렌 도시 방면을 감시 중이던 엔리케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를 통해 인간이 지닌 시력의 한계를 돌파한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활을 주무기로 삼는 엔리케 역시도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한 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뭔데 그래요?”

“저기, 저쪽 봐봐. 횃불 들고 달려가는 놈들!”

엔리케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 떼의 병력이 바삐 이동 중인 것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는 거면... 돌레이 강 건너는 다리가 있는 쪽 아니에요?”

“그래. 신성교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지.”

워낙 먼 거리인데다 캄캄한 새벽이었기에, 엔리케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바덴하임 군의 행렬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냥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도만 살필 수 있는 정도?

주름진 눈을 잔뜩 구기며 어둠 속을 응시하는 데론에게, 내가 말했다.

“... 베르켈 경.”

“음?”

“저기, 바덴하임 군 행렬의 맨 앞에 은빛의 사자 투구를 쓴 기사가 있습니다.”

“...!”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는 데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역시 에리히...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다니.”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강 건너로 이동 중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계획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는 이때다 싶어 데론에게 남쪽으로 향하자는 계획을 바꿀 것을 넌지시 제안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데론의 답은...

“...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군.”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얼마나 무서운 기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데론이었다.

그가 강 건너에서 병사들과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남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탈출로를 잡아보세.”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원작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순간이었다.

***

“죄송합니다, 프라이슬러 경. 남작의 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로 듣게 된 부하의 보고.

그 말을 듣고 살짝 얼굴을 찡그린 에리히가 서서히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본다.

“분명히 이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했거늘...”

자신이 아는 데론이라면 전쟁을 일으킨 바덴하임이나 황금백의 충성스러운 봉신이 다스리는 노이베른 쪽으로 도주하기보단 강을 건너 신성교국으로 도피하는 쪽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날이 밝도록 데론과 그가 보호하는 남작의 딸이 이동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얘기인즉...

“북쪽으로 향한 것인가. 그렇다면... 노이베른이겠군.”

그쪽 방면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간 사령관 틸레인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 에리히가 엄한 목소리로 외친다.

“수색조 절반을 남긴 뒤 나머지는 리트렌으로 돌아간다. 서둘러라!”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서둘러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에리히의 시선이 문득 서쪽으로 향한다.

그곳엔 펠리노어 왕국과 브리카니아 왕국, 신성교국까지 3개국에 걸쳐 솟아오른 거대한 장벽, 버니언(Bunyan) 산맥이 장대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설마...”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놀라 입을 벌리는 에리히.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 생각을 떨쳐내 버렸다.

“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군. 저곳이 어떤 곳인데...”

버니언 산맥은 각종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는 위험한 지역.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는 물론 ‘산중제왕(山中帝王)’이라 불리는 오우거와 미노타우로스까지 등장하는 곳이었다.

바덴하임 군의 추격을 피하겠다고 버니언 산맥으로 향하는 것은, 늑대가 무섭다며 사자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후... 틸레인이 남작의 딸을 잡았는지 모르겠군.”

잠시 떠올렸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완전히 지워낸 에리히가 천천히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 필사의 탈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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