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1) >
“... 우리는 왕국 북서부 끄트머리에 있는 다닐렌츠 영지로 가고자 하네.”
리트베르크 영지를 빠져나가 어디로 갈 거냐는 겔베르트의 물음에 대답을 고민하던 데론.
하지만 처절한 전쟁의 수라장을 함께 헤쳐나오며 쌓인 믿음 때문일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바로 남작령 다닐렌츠(Danilenz).
펠리노어 왕국 북서부의 변경 지대에 위치한 카릴베르크(Karilberg) 가문의 영지였다.
영지 면적 자체는 상당히 큰 편이나 북부 아이펠(Aifel) 산맥에서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몬스터의 습격이 잦은 탓에 군비 지출이 많고, 그로 인해 영지 발전이 더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랬던 곳이 니나의 도착과 함께 큰 번영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니나가 스스로 뭔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기보다는 작가가 대놓고 ‘주인공 밀어주기 용 설정’을 퍼부으면서 영지가 부흥하게 된 것이지만, 어쨌건 니나의 덕인 건 맞았다.
‘갑자기 영지 내에서 금광과 철광이 발견되고, 그저 흉악한 괴수인 줄 알았던 몬스터가 고품질의 가죽과 모피를 안겨주는 복덩이로 탈바꿈하고, 솜씨 좋은 장인과 기사들이 영지에 몰려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지.’
그리고 이번엔, 그 대단한 행운들을 오롯이 나의 업적을 만들어볼 참이었다.
“다닐렌츠라...”
한편, 데론에게서 나온 그 이름을 들은 겔베르트가 턱수염을 쓸며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데론이 넌지시 겔베르트에게 묻는다.
“자네, 그 지역에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겐가?”
“예? 아... 제가 사실 다닐렌츠와 가까운 안할트 출신입니다. 그래서 잠깐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으흠...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
겔베르트가 안할트 출신이라고?
‘그건 또 처음 알았네. 왕국 북부 출신인 건 대강 알았다만...’
겔베르트가 뭔가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진즉 알았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초반에 너무 빨리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가 설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나로서도 겔베르트의 사연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개 용병이라기엔 너무나 고강하고 정련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난전(亂戰)에 특화된 용병답지 않게 돌아가는 전황을 읽고 병력을 지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예전엔 그 지휘 능력이 용병이 되기 전 군에 오래 몸담았던 부대장 메이슨의 조언 덕분이라 생각했는데, 2년 넘도록 푸른 방패 용병대에서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확실히 병력 지휘의 재능은 겔베르트 본인의 것이 맞았다.
그 정보를 종합한 결과, 나는 겔베르트가 과거에 군 장교였거나 기사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거기에 안할트 출신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됐군.’
뭐, 당장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가장 먼저 마음을 준 겔베르트였기에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가 사연을 듣게 될 날이 오겠지.’
그렇게 나 혼자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겔베르트가 데론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행선지를 다닐렌츠로 잡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북서부 끝에 있는 곳이라 이곳에서 거리가 너무 먼 곳인데...”
“음, 그게... 돌아가신 우리 영주님과 다닐렌츠의 영주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이 젊은 시절 왕도에서 동문수학한 친우 사이라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영주성에서 탈출하기 직전, 영주님께서 생전에 그분과 주고받았던 편지 몇 통과 영주의 인장을 건네주셨지. 그 물건들을 다닐렌츠로 가져가 보여주면, 아가씨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네.”
그렇게 말하는 노 기사의 눈빛에 진한 슬픔과 회한이 어린다.
지켜내지 못한 주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감정에 장단을 맞춰줄 겨를이 없었다.
“저, 베르켈 경? 죄송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내 말에 참담했던 옛 기억에서 벗어난 데론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내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군. 그래, 데미언 자네에겐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진 데론뿐만 아니라 겔베르크와 엔리케, 아드리안과 니나까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어줄 답변을 기다리는 눈빛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내 입에서 나온 답변은...
“지금부터 우리는, 버니언 산맥을 향해 갈 겁니다.”
***
내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지금 뭔 미친 소리를 들은 거지?’ 정도의 의미를 담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
특히, 리트베르크 측 사람들을 대표하는 데론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버니언 산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네! 자네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가? 지천에 깔린 풀과 나무만큼이나 몬스터가 많은 곳이네! 버니언 산맥과 접해 있는 영지에서 몬스터 토벌로 쓰이는 예산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지... 허!”
아마도 데론 자신이 직접 그 몬스터 토벌을 진행했던 군무관 출신이었기에 더욱 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가 얼굴까지 벌겋게 변해서 반대 의견을 쏟아내는데,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데론을 진정시켰다.
“워워, 베르켈 경. 진정하십시오. 일단 데미언이 하는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죠. 제가 꽤 오랫동안 지켜본 녀석입니다. 근거 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놈은 아닙니다.”
“후우우...”
겔베르크의 만류를 들은 데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크흠,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을 했구만. 아가씨의 안전이 걸린 일이라 민감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게.”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베르켈 경. 마음 쓰지 마십시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버니언 산맥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곳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생 기준으로 생각하면 피라냐랑 악어 떼가 우글거리는 아마존강을 맨몸으로 헤엄쳐서 건너자는 소릴 한 거나 마찬가지이니... 그것도 새파랗게 어려서 경험도 없어 보이는 놈이 말이야.’
오십 대 중반을 훌쩍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노 기사 데론이 보기에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내 모습이 얼마나 미덥지 않아 보이겠는가.
그런 놈이 주군의 귀한 딸을 모시고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가자는 소리를 했으니...
‘나 같았으면 바로 귀싸대기... 아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고운 말이 나오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데론은 언성만 조금 높였을 뿐이지 욕을 하거나 반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친 소리를 들은 사람의 반응치고 이 정도면 아주 양반이라 할 만했다.
‘역시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깊이 존경하는 기사도의 화신(化身)다우시네... 아주 점잖으셔!’
실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내가 계획하는 미래의 그림에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접어둔 채 다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니언 산맥에 몬스터가 우글거린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버니언 산맥과 경계를 접한 영지 텔마르크 출신이니까요.”
“그런데 어찌...”
“지금 베르켈 경이 보여주시는 그 반응이, 바로 우리가 버니언 산맥을 탈출 루트로 삼아야 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
눈을 빛내며 꺼낸 나의 말에, 데론이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아이씨, 막내야! 난 도통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까, 그냥 알기 쉽게 설명 좀 해줘!”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활 솜씨에 쏟아부은 사나이.
그래서 다른 면은 조금 손색(?)이 있는 남자, 엔리케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묻는다.
그 뒤로 보이는 아드리안 역시 말은 못 안 했지만(그는 스승인 데론이 나와 대화 중이라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 두 사람과 달리 내가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린 데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세상 사람들 모두 버니언 산맥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는 걸 ‘당연한 상식’처럼 말하지. 그럴 만해. 온갖 몬스터 우글거리는, 엄청나게 위험한 땅이니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은 데론이 나를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굳이 추측해보자면, ‘이 자식, 제법인데?’ 정도의 눈빛이랄까?
“즉, 데미언 자네의 말은... 그런 사람들의 ‘상식’을 역이용해보자는 말인 것 같은데... 내 추측이 맞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슥, 스슥-
발로 흙바닥을 긁어내 평평하게 면을 고른 나는 그 위에 검 끝으로 대강의 주변 지역 지도를 그려냈다.
“자, 여기가 현재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정황상 신성교국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으니, 남쪽으로의 길은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건 북쪽으로의 탈출 루트뿐인데, 리트베르크와 맞닿은 노이베른, 그다음 영지인 델멘부르크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두 황금백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죠.”
“그렇지, 두 영지 모두 백작의 봉신들이 다스리는 곳이니까.”
“예, 맞습니다. 바덴하임의 병력은 물론 황금백의 명령을 받은 노이베른과 델멘부르크의 수많은 병력이 북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틀어막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적게 잡아도 3천 명이 넘을 텐데, 그 포위를 뚫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원작의 이 시점엔 살아남은 사람이 니나와 아드리안 둘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데론이 목숨을 바쳐 벌어준 시간(더불어 에리히가 도주를 눈감아 주었기에)을 이용해 가까스로 도망쳤고, 거지꼴이 되어 신성교국 외곽 지역을 헤매다가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리트베르크 출신의 오누이라 소개한 니나와 아드리안.
두 사람은 그 마을에서 바덴하임 백작이 자신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쥐죽은 듯 숨어 지냈고,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을을 찾은 어느 상단 행렬에 끼어 왕국 북부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나의 개입으로 진작 죽었어야 할 푸른 방패의 용병 겔베르트와 엔리케가 살아났고,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데론 베르켈 역시 목숨을 건졌다.
이 많은 사람을 다 데리고 신성교국으로 넘어가 숨어 살수도 없는 일이고,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와 겔베르트 대장, 엔리케, 베르켈 경과 아드리안의 무력을 합치면 어지간한 몬스터 정도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급 몬스터가 출몰하는 깊은 산속을 피해 낮은 능선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면 황금백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음...”
내 설명을 들은 데론이 생각에 잠긴다.
우리 일행의 다른 한 축인 겔베르트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의견을 지지한다는 반응 보여주었고, 엔리케도 마찬가지.
그리고 마침내,
“...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우리 일행의 실질적 리더, 데론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베르켈 경. 제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겠습니다.”
혹시나 그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냉큼 그렇게 대답한 나는 그 즉시 버니언 산맥을 향해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됐어, 재수 없게 오크 부족 전체랑 맞닥뜨린다거나 오우거 같은 놈에게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없을 거야.’
거기에 더해, 내가 버니언 산맥을 지나는 탈출 루트를 주장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으니...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그 전설의 몬스터가 남긴 힘을 챙겨 먹을 수 있겠군. 하하하!’
그것은 바로, 내가 <로스트 킹덤>에서 차지할 세 번째 히든 피스의 존재였다.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