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2) >
“오늘은 여기서 머물겠습니다.”
“하아, 하아... 고생했네, 데미언.”
“어우, 드디어!”
“고생했다, 막내야!”
내 말을 들은 일행 모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버니언 산맥이 탈출 루트로 결정된 이후, 선두로 나선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일행을 이끌었다.
사방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한밤중에도 대낮과 차이 없는 시야를 지닌 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조건이었다.
“어후, 죽겠다. 데미언 너는 힘들지도 않냐? 맨 앞에서 늑대며 뭐며 걸리는 놈들 있으면 다 쳐내면서 왔잖아?”
등 뒤에 들쳐 맨 배낭을 끌러 그 안에서 자그마한 수통을 꺼낸 겔베르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들이켜며 물었다.
어지간한 짐승만큼이나 체력 좋기로 소문난 그마저도 헉헉거릴 만큼 지독히도 힘들었던 지난 몇 시간.
하지만 히든 피스의 가호를 받아 강화된 나의 육체는 이 정도로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는 건 아니고.
“뭐, 버틸 만해요.”
“허! 참나... 아침부터 저녁까진 리트렌 성벽에 붙어서 개싸움 벌이고, 그 이후엔 도시 탈출해서 여기까지 오느라 개고생 했는데 버틸 만하다고? 이야아, 확실히 젊은 게 좋긴 좋네. 야, 엔리케! 안 그러냐?”
“하아... 하아... 말... 시키지... 마요... 뒤질 것 같으... 쿨럭, 쿠헥!”
... 저러다 숨 넘어 가겠네.
바닥에 누워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헐떡거리는 엔리케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나 정도는 아니지만, 엔리케도 특유의 밝은 밤눈을 사용해 일행의 맨 뒤에서 사방을 정찰하며 움직인 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력 소모가 배로 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체력 면에서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 엔리케에겐 가히 죽음의 행군과도 같았으리라.
‘근데, 저쪽도 대단하긴 하네.’
이번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어둠 속, 잔뜩 지쳐버린 두 명의 늙고 젊은 사내가 어린 주인을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을 뒤져 긁어모은 굵은 나뭇가지과 큼지막한 바윗돌, 나뭇잎 등을 가지고 어떻게든 니나를 위한 간이 천막을 만들어 주겠다며 저 고생을 하는 것이다.
자기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육체노동 중인 두 사람을 본 니나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눈동자로 말한다.
“할아버지! 저 이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나 진짜 괜찮으니까, 제발 앉아서 좀 쉬세요!”
“하아, 저희가 안 괜찮습니다,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얼른 쓰실만한 천막을...”
그런 데론의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이 갔다.
‘하긴... 나라도 손녀딸 같은 애 데리고 있으면 몸이 부서지건 말건 뭐라도 해주고 싶겠지.’
그 옆에 있는 아드리안은 너무 힘이 들었는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저 헉헉 거친 숨만 내쉬며 나이 많은 스승의 일을 돕고 있었다.
“어흑... 큭!”
얼씨구? 휘청거리기까지?
문득 아드리안의 나이가 나보다도 한 살 어린 열여섯이라는 게 생각났다.
저거, 청소년 노동 착취 아냐?
“... 저 둘이 번갈아 가며 니나 아가씨를 여기까지 업고 왔어. 진짜... 대단하네.”
내가 데론과 아드리안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옆에서 말했다.
중간중간 두 사람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겔베르트가 니나를 업겠다고 나섰지만, 그건 자신들의 일이라며 끝끝내 니나를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흐음, 대장 생김새가 좀 산도적 같긴 하니까...”
“뭐 이 새끼야?”
“암튼, 여기서 야영지 정비 좀 하고 계세요. 저는 주변 순찰 좀 돌고 오겠습니다.”
“아니, 인마! 아까 하던 말 계속해봐! 생김새가 뭐 어째?”
“좀 멀리까지 돌아보고 올 테니까 저 늦어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갑니다!”
“야잇! 인마!”
억울해하는 겔베르트를 뒤로 한 채 나는 서둘러 야영지 주변 순찰에 나섰다.
일행 없이 홀로 나선 길이기에, 이동 속도는 여럿이 움직이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일단 주변에 몬스터 서식지는 없는 것 같고...’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긴 했지만, 동굴이나 계곡,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숲처럼 몬스터들이 모여 서식지를 이룰만한 지형이 드문 장소였다.
‘뭐, 그럴 것 같아서 여기서 야영을 하자고 한 거긴 하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슈우욱! 촤악! 퍽!
“켁!”
“끄르르륵!”
내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리고, 머리통이 꿰어진 작은 괴물 두 마리가 쓰러진다.
“고블린 새끼들... 멀리도 나왔네.”
방금 내가 잡은 이놈들처럼, 본래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정찰을 나온 놈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블린이라 다행이네.”
고블린은 여러 몬스터 중에서도 코볼트와 더불어 최약체로 알려진 개체.
그런 놈들이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근방에 오크나 트롤 같은 상위 개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이쯤이면 된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갈... 음?”
주변 정찰을 마치고 야영지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 보이는 특이한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 아래 위치한 커다란 동굴 하나.
그 동굴의 입구엔 마치 건물의 테라스처럼 길게 바윗돌이 튀어나와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서 원숭이 제사장이 새끼 사자 시절의 심바를 들어 올리던 장소 같은 모습이었는데...
‘... 찾았다!’
나는, 그 특이한 장소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내가 노리는 세 번째 히든 피스가 잠들어 있는 곳,
위대한 오크 대군주의 동굴, ‘타이랄의 궁전’이었다.
***
그것은, 역사에 기록되기도 전인 아득히 오래된 옛날의 일이었다.
아직 문명의 힘을 공고히 쌓아 올리기 전의 나약했던 인간과 야생의 힘을 앞세운 몬스터가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오랜 전쟁을 벌이던 때.
거대한 자연의 기운을 품은 버니언 산맥의 한 자락에서 오크에게 빛나는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견된 오크 대전사 ‘위대한 자 타이랄(Tiral The Great)’이 나타났다.
그는 대단한 힘을 지닌 오크들 사이에서도 비교 불가한 압도적인 완력과 거대한 체구를 지닌 위대한 전사였다.
타이랄의 힘은 대형종 몬스터인 오우거와 단독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했으며, 그 힘을 기반으로 휘두르는 거대 전투 도끼 ‘붉은 송곳니’는 미노타우로스의 뿔마저 일격에 베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버니언 산맥의 오크 일족 ‘붉은 주먹’을 이끌며 주변 수십 개에 달하던 오크 일족들을 통합, 거대한 오크 연합 왕국을 구축하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역사상 처음으로 오크들의 왕국을 세운 위대한 지도자 타이랄.
그는 인간들에게 빼앗긴 대륙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겠다는 목표 아래 버니언 산맥의 모든 몬스터를 자신의 휘하에 끌어모았고, 마침내 인간들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하지만 출정을 하루 앞둔 밤, 타이랄이 속한 ‘붉은 주먹’ 일족의 숙적이었던 ‘회색 바위’ 일족의 배신으로 그는 암습을 당하게 된다.
한밤중, 수백 마리에 이르는 고블린과 코볼트를 앞세운 회색 바위 일족의 대전사들이 위대한 오크 왕의 거처를 습격했던 것.
분노한 타이랄은 처절한 싸움 끝에 모든 배신자를 쓰러뜨리지만,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어 목숨을 잃고 만다.
오크, 아니 대륙 전체 몬스터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타이랄.
그의 죽음 이후 구심점을 잃고 사분오열된 오크 연합 왕국은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고, 그 뒤로 몬스터들은 대륙의 패권을 영원히 인간들에게 내어주고 만다.
***
“위대한... 자, 오크... 대군주... 타이랄.”
절벽을 기어올라 동굴 앞에 선 나는 동굴 벽에 새겨진 고대 오크의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내렸다.
까마득한 옛날 옛적 소실되어 지금은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고대 오크 일족의 문자(文字).
대체 이걸 내가 어떻게 읽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
“... 아니지. 내가 이 세계관의 창조주 중 하나이니까, 당연한 건가?”
창조주라는 설정이 이럴 때 참 편하긴 하다.
“일단 내가 예상했던 장소가 맞다는 얘기고...”
머나먼 선사(先史) 시절 오크를 몬스터 중 으뜸으로 만들어 준 문명의 상징, 오크 문자의 흔적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동굴이었으나 히든 피스의 힘으로 안력을 끌어올린 나에게 어둠 따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뭐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네.”
동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뭔가 대단한 오크 왕국의 보물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동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뽀얗게 쌓인 먼지들뿐.
지나온 수천 년의 세월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을 의미 없는 먼지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겠지.
“... 더불어 이 장소에 걸린 저주 탓도 있을 것이고.”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왕국을 건국한 위대한 오크 대군주, 타이랄.
하지만 그 위대한 업적이 무색하게도 타이랄은 믿었던 동족들의 배신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거처로 삼은 버니언 산맥의 동굴, ‘타이랄의 궁전’ 내부로 밀려 들어오는 수백의 고블린과 코볼트, 그리고 ‘회색 바위’ 일족의 오크 대전사들과 죽는 그 순간까지 처절한 전투를 치렀던 타이랄.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져 그가 눈을 감던 순간, 위대한 오크 대군주의 피를 제물로 삼은 지독한 저주가 완성되었다.
“확실히, 동굴로 올라오는 내내 이 근처에서 몬스터들 구경도 못 하긴 했지.”
그 저주의 내용인즉, 타이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가 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
아무리 지능이 형편없는 몬스터들이라 한들, 생존의 본능만은 살아 있는 법.
오랜 기간의 학습으로 동굴에 가면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들은 이 장소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종 괴수 놈들은 동굴이 작아서 들어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저벅저벅-
동굴 관련된 저주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발소리가 멎었을 때,
저벅저벅, 턱-
나는 동굴 안쪽 넓은 공간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로 만들어서 그런가, 아주 멀쩡하게 형태 유지를 하고 있네.”
그것은, 돌을 깎아 만들어진 큼지막한 의자였다.
아마도 오크 왕국의 군주였던 타이랄을 위한 왕좌(王座)였을 터.
하지만, 내가 진실로 관심 있는 것은 그런 지나간 영광의 증거 따위가 아니었다.
“... 여기 있다.”
드디어 찾았다.
돌로 만든 왕좌의 등받이 부분.
그곳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크기를 지닌 쇳조각이 하나 박혀 있었다.
으직-
손으로 돌 틈새에 끼인 쇳조각을 빼냈다.
벽에 박힌 못처럼 뽑기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쉽게 빠져나왔다.
“보자... 새끼손톱 크기 정도 되려나?”
표면에 기이한 붉은빛이 도는 정체불명의 쇳조각.
이것이 바로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세 번째로 얻게 된 히든 피스,
위대한 오크 대군주 타이랄의 거대 전투 도끼,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이었다.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