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4) - (수정) >
‘와, 히든 피스 한 방에 레벨이 이렇게나 올랐다고?’
눈에 띄게 변한 상태창의 내용을 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히든 피스를 흡수하기 직전 나의 레벨은 49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상태창 속 레벨의 수치는 무려 64.
우리 일행 중 가장 고강한 능력치의 소유자인 노 기사 데론의 레벨 53을 넉넉하게 추월한 수준이었다.
‘오크 왕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캐릭터였나 보네, 허허허...’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오크 일족의 통일을 이뤄내고, 왕국을 세워 인간들에게 뺏긴 대륙의 주도권을 찾으려 했던 오크 대영웅.
위대한 자 타이랄(Tiral The Great).
그가 남긴 히든 피스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은, 주인의 명성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레벨 열다섯 칸을 한꺼번에... 대체 경험치를 얼마나 준 거야?’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로스트 킹덤>은 어디까지나 (내가 만든) 게임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계.
레벨이 높아질수록 위로 올라가는데 필요한 경험치의 양은 더욱 많아진다.
즉, 같은 레벨 1의 상승이라고 해도 49에서 50이 되는 데 필요한 경험치보다 50에서 51로 올라가는데 요구되는 경험치의 양이 훨씬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한 번에 15나 되는 레벨이 올랐으니 놀랄 수밖에.
‘보자... 레벨 64면, 어디 가서든 맞고 다니진 않겠네.’
뭐, 사실 그렇게 맞고 다닌 적이 없긴 했다.
처음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져 고생했던 극 초반기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제외하고 1대1 대결에서 나를 상대로 우위를 가져갔던 적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도 에리히가 원작 속 네임드 중의 네임드로 꼽히는 양반이라 밀렸던 것이지, 내가 약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레벨 49일 때도 에리히 상대로 어찌어찌 버티긴 했으니까... 다시 만나면 해볼 만하겠는데?’
<로스트 킹덤> 세계관 등장인물 중 손꼽히는 강자(强者)인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상대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무적인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 드디어,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했다.’
상급 기사(Superior Knight).
<로스트 킹덤> 세계관 내에서 레벨 60의 벽을 깨뜨린 기사를 따로 이르는 표현이다.
물론, 이 레벨 60이라는 기준은 원작 소설을 게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상급 기사의 대단함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여한 자격이었다.
게임의 레벨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원작 소설 내에선, 상급 기사의 강함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 상급 기사에 대한 정확한 사전적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해 보편적으로 쓰이는 기준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대형종 몬스터인 오우거를 단독으로 잡아 죽일 정도의 강함’을 지닌 기사를 흔히 상급 기사라 칭하는 것이다...]
혼자서 오우거를 사냥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상급 기사가 보통의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인간병기’의 칭호를 넘어서서 가히 ‘전술병기’ 수준의 강함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상급 기사의 자격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대형종 몬스터, 오우거는 얼마나 강한 존재일까?
그 질문의 답 또한, 원작 소설 속 오우거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 드래곤이나 드레이크, 와이번, 그리폰처럼 신화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괴수를 제외하고 우리가 실제로 맞닥뜨릴 수 있는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개체는 무엇인가?
그 답은, 단연 ‘산중제왕(山中帝王)’이라 불리는 오우거(Ogre)일 것이다.
대형종 몬스터의 수좌에 올라 있는 괴수답게, 오우거는 평균 5미터에 달하는 체고와 주먹질 한 번에 집채만 한 세콰이어 나무를 부러뜨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오우거를 잡기 위해선 적어도 백여 명 이상의 숙련된 병사들과 원숙한 기량의 기사들이 여럿 필요하다.
사냥의 방식은 대강 이러하다.
오우거를 둘러싼 궁수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놈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길고 무겁게 제작된 대(對) 오우거 용 강철 장창 여러 자루를 동시에 사방에서 찔러넣는다.
기사들은 그런 병사들을 지휘하며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직접적인 공격에도 가담한다.
여기에 더해, 이 오우거 사냥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최소 1년 이상 손발을 맞춰 훈련한 정예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러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오우거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인명피해를 피할 수는 없으니, 과연 ‘걸어 다니는 재앙’이란 수식어에 어울릴만한 존재라 하겠다...]
오우거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소설 속 내용.
상급 기사는, 바로 그런 오우거를 홀로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을 지닌 존재였고...
“... 그리고 이제, 나도 그런 사람이 된 거지.”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꺼내며, 동굴 깊은 곳에 누였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우둑, 우두둑-!
앉은 자세에서 손목과 팔목,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너무 좋네.”
전신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에너지.
히든 피스의 능력을 흡수하며 몸에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날려버린 탓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 이러다 레벨 더 오르면 진짜 날아다니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홀로 웃음을 짓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전은 끝났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다.
“자, 그럼... 어디 새로 얻은 히든 피스 성능 확인 좀 해볼까?”
***
겨울잠 깬 곰 마냥 동굴 깊은 곳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나를 보며 깜짝 놀란 일행들.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어보니, 내가 잔다고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간 후로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쩐지, 자고 나왔는데 휑하니 모닥불도 없고 아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니.
“자,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겔베르트 대장, 아드리안 님과 함께 주변을 정찰하며 땔감과 식량을 구해오겠습니다. 엔리케 조장은 저 다음으로 눈이 좋으시니, 동굴 입구에서 경계 임무를 부탁드립니다. 데론 경께서는 동굴 안쪽에 머물며 아가씨를 보호해주십시오.”
일행들에게 미리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읊어주었다.
당연히,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야, 너는 피곤해서 자야겠다고 말했던 놈이 꼴랑 삼십 분 만에 다시 기어 나와서 정찰을 가겠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
“그래 이 새끼야! 객기도 적당히 부려야 참고 넘어가 주지... 죽으려고 환장했냐? 여기서 지금 죽여줘? 확 마빡에 화살을 꽂아 줄까부다!”
일단 겔베르트와 엔리케는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나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과시했고,
“이보게, 데미언. 우리를 염치없는 자들로 만들 셈인가? 자네가 지난밤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우리를 위해서 산속 정찰을 다니지 않았나? 그리고, 이 동굴로 오는 길에 몬스터들과 싸운 것도 자네였어. 잔말 말고, 어서 들어가서 더 쉬게나. 나머지 일행들 마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데론의 경우엔 좀 더 연륜이 느껴지는 말솜씨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괜찮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등 대고 누워 마음 편하게 삼십 분이나 잤으면 많이 잔 거죠. 다들 저한테만 잠 못 잤다고 하시는데, 따지고 보면 엔리케 조장도 불침번 서느라 거의 못 잤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주무셨다는 것도, 언제 몬스터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한 장소에서 불도 못 피우고 선잠 잔 거 아닙니까? 그건 뭐 잔 것도 아니죠.”
“허허...”
청산유수로 쏟아지는 나의 답변을 들은 데론이 헛웃음을 흘리는 게 보였다.
‘저놈 저거,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말도 잘하네’
... 대강 이 정도의 의미를 담은 웃음인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그게 최적의 계획일 겁니다. 안 그래요, 조장?”
“음? 어, 그게...”
엔리케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잽싸게 말을 잘랐다.
“그래요, 엔리케 조장은 제 말에 공감하시는 것 같고. 대장은요?”
“야, 인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역시! 대장이 제 편 들어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뭐라 잔소리를 쏟아낼 것 같아 겔베르트의 입도 냉큼 틀어막아 버렸다.
“이로써 제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 셋입니다. 데론 경과 아드리안 님이 계시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 계획대로 움직이시는 것으로 하...”
“잠깐만요, 제 의견은 왜 안 물어보시죠?”
“...!”
억지 섞은 우격다짐으로 정찰 계획을 밀어붙이려던 나의 행동에 제동을 건 사람.
바로, 데론의 곁에 가만히 앉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니나였다.
“저도 일행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예, 물론 그렇...”
“만약에 할아버지... 아니, 데론 경과 아드리안, 제가 그쪽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똑같이 찬성 셋, 반대 셋이 되는 건데요. 왜 결정이 났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할 말이 없었다.
니나의 말에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서, 니나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
세상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 살아온 고향 리트렌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 바로 어제였다.
침략자의 손에서 도망치기 위해 범죄자 놈들이나 이용하는 땅굴 속을 기었고, 거친 풀숲을 정신없이 뛰어야 했으며,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산속에 쓰러져 잠을 잤다.
늘 모든 것이 갖춰진 영주성에서 안온하게 자라온 열두 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잔혹한 비극.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려서, 이 먼 곳까지 데론과 아드리안에게 번갈아 업혀 이동해야 했던 니나였다.
당연히 이 상처에서 회복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주인공이라 다르네. 우리 니나, 너무 대견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니나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자신을 덮친 거대한 비극을 이겨낼 의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굳건한 정신력.
그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니나가 지닌 최대의 재능이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격을 애써 갈무리하며, 나는 공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이런 일엔 경험이 없으시다 보니, 저희끼리 의논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려 한 것은 아니니, 용서해주시길.”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
내 말을 듣고도 가타부타 말이 없는 니나.
혹시 화 난 건가?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저를 무시하려는 의도로 그러신 게 아니라는 것 알고 있어요.”
고된 상황에 지쳐 파리해진 입술로, 니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럽고 의젓한 말투였다.
“다만, 데론 경의 말처럼 어제부터 데미언님이 너무나 많은 짐을 홀로 지고 계신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어요.”
“...!”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를 돕기 위해 나서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제 리트베르크를 대표하게 된... 흠흠, 사람으로서 이 말을 진작 드렸어야 하는 데 제가 너무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아가씨! 어찌 그런 말씀을...”
니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란 내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얘기를 하고 그런담?
“아무튼... 데미언님.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고 들지 마세요.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해내야죠. 우린... 동료잖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큼, 괜찮습니다.”
시커먼 아저씨들이 빨리 들어가서 쉬라며 윽박지르듯 하는 말만 듣다가 어린 니나가 걱정하는 말을 듣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이게 바로 아빠들이 딸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가?
‘니나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너를 무사히 다닐렌츠까지 데려다주마!’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더욱더 니나를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
“크롹?! 컥!”
콰직!
섬전(閃電)처럼 뻗어 나간 나의 검이 오크의 머리통을 꿰뚫는다.
“크롸아아아!!!”
내게 머리통이 꿰뚫려 죽은 오크의 근처에 있던 다른 놈들이 녹슨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나를 죽이려고 덤벼든다기보단, 어딘가 겁에 질려서 허둥대는 듯한 모습이었다.
투쟁심으로 이름 높은 오크들이 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드루와, 이 새끼들아!”
쉬이이이이잉!
스가각! 푹! 콰지직!
베고, 찌르고, 쪼갠다.
신들린 듯이 사방을 휘젓는 나의 검 끝에 걸린 오크들의 머리와 팔다리가 사정없이 잘려나간다.
후둑! 후드득!
토막 난 오크들의 사체가 사방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하나, 둘, 셋... 합이 다섯.
한 호흡에 다섯이나 되는 오크를 썰어 넘겼다.
쉽다.
너무 쉬운 싸움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오크를 상대로 싸울 때 별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흡사 풀을 베어 넘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팟-!
『 고유 특성: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상대 몬스터 전의(戰意) 상실 효과(대형종 이상 제외) 』
바로, 세 번째 히든 피스의 힘을 흡수하며 얻은 고유특성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와,
『 보유 스킬:
- 오크 왕의 분노(전설 등급)
몬스터 상대로 전투 시 공격력 400% 증가 』
전설 등급의 스킬, ‘오크 왕의 분노’ 덕분이었다.
“와, 막내 너 미쳤냐? 갑자기 왜 이러는데?”
나와 함께 정찰 임무에 투입된 겔베르트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정찰 도중 발견한 오크 부락에 뛰어들어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전부 다 도륙을 내었으니, 놀랄 수밖에.
“와아...”
함께 정찰 임무에 따라온 아드리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냥 안 친해서 말을 못 하는 건가?
“후우... 일단 여기 쓸 만한 게 있는지 좀 뒤져 봅시다. 그런 다음에 상황 봐서 복귀하던가, 아니면 더 둘러 보든가 하자고요.”
“그래. 그러자.”
한 차례 싱거웠던 전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 전리품 습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4) -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