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9화 (45/197)

< 다시, 텔마르크 (1) >

우리는 오크 부락을 쓸어버린 뒤 얻은 전리품을 들고 동굴로 복귀했다.

돌아온 동굴엔 따뜻한 모닥불이 만들어낸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보다 쓸만한 게 좀 있었습니다. 일단, 오크 놈들이 거주지로 쓰던 천막을 걷어왔습니다. 동굴을 떠나 야영할 때 쓰면 될 겁니다.”

“오, 식량도 챙겨온 겐가?”

“예, 베르켈 경. 오크 놈들이 먹으려고 잡아둔 것인지 죽은 토끼와 사슴이 쌓여 있더군요.”

“음,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걸 봐선 잡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네.”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냄새는 좀 나겠지만... 그래도 굶는 것보다는 낫죠.”

“음? 막내야, 이건 왜 뜯어왔냐? 뭔 풀이야?”

“아, 그건 허브의 일종인데... 고기 삶을 때 물에 함께 넣고 끓이면 비린내가 좀 가셔요. 저희야 뭐 대강 참고 먹는다 치더라도 아가씨께서 좀 힘드실까봐...”

내가 한가득 짊어지고 온 정찰 임무의 전리품들을 데론과 엔리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동안, 동굴 벽에 기대앉은 겔베르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오크들을 쓸어 버릴 때 보여준 나의 실력 때문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팟-!

『 겔베르트 / Lv. 47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

스킬, ‘창조주의 눈’을 통해 파악한 겔베르트의 현재 레벨은 47.

네임드가 아닌 평범한 기사 정도는 웃으면서 가볍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치였다.

‘진짜 대단하네...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레벨이 43이었으니, 1년에 두 단계씩 올라간 셈인가?’

겔베르트 정도의 높은 능력치를 지닌 이들은 레벨 한 단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임 <로스트 킹덤>의 시스템 설계 자체가 레벨 40을 기준으로 성장세가 크게 꺾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게임 내 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년간 꾸준히 수련을 거듭해도 레벨 한 단계를 올릴 수 있을까 말까 할 수준이랄까?

‘... 나야 히든 피스 덕분에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한 방법이 불가능하지.’

나처럼 ‘꼼수’를 쓰지 않고 정석대로 한다면,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것이 레벨 상승이었다.

더구나 나처럼 상태창을 볼 수 없는 다른 이들은 자신의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기에, 레벨이 올라도 그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그리고 그런 착각은, 수련의 의지를 꺾게 마련이다.’

분명 잘 해내고 있는데,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수련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겔베르트는 실로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라 할 만했다.

‘근데, 옆에서 미친 듯이 성장하는 나를 보고 있으니 허탈감이 든 것이겠지.’

쉽게 말해, ‘현타’가 왔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거북이 옆에 토끼도 아니고 치타쯤 되는 속도로 뛰어가는 놈이 나타나면 거북이 입장에선 맥이 풀릴 수밖에.

‘하, 이걸로 대장이 상처받아서 괜히 수련 때려치우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

“... 데미언.”

심각한 얼굴을 한 겔베르트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아, 예. 대장.”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지?

몰려오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키던 그때...

“몸 상태 괜찮으면, 오랜만에 나랑 대련이나 할까? 동굴 입구가 꽤 널찍하던데...”

“...!”

“왜, 싫어?”

“어, 아니요. 그게...”

겔베르트가 이 타이밍에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대장이랑 대련한 지도 꽤 오래됐네.’

처음 용병대에 들어와 모든 것이 어설펐던 시절엔 매일 같이 겔베르트와 검을 맞대며 가르침을 받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용병대 임무가 바빠지고, 내가 겔베르트의 실력을 확실하게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나에게 검을 가르쳐준 스승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겔베르트는, 한참 어린 후배이자 제자에게 추월당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닌, 뭐라 말로 설명하기 불편한 그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련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보는 겔베르트의 눈빛엔 일말의 부끄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명백히 높은 실력을 지닌 강자(强者)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이의 간절함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대장이랑 대련, 진짜 오랜만이네요. 전 좋습니다!”

내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겔베르트가 괜히 민망한 듯 코끝을 쓸며 대답한다.

“크흠, 그래? 그럼... 내가 근처에서 튼튼한 나뭇가지 몇 개 주워올게. 둘 다 피곤하니까, 진검 쓰는 대신 가볍게 길만 짚어보자고. 괜찮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나, 갔다온다?”

그 말을 남기고 머쓱하게 돌아서는 겔베르트.

나에게 말을 건네기 전보다 한층 크고 넓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겔베르트, 당신은 리트렌에서 죽기는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하하하!’

***

“후우...”

산 아래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겔베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개 털렸네.”

말 그대로였다.

검로(劍路)만 짚어보는 식으로 가볍게 진행하려 했던 데미언과의 대련.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호승심이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련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가볍게 하던 것이 어느새 필사적인 것이 되었고, 잔잔했던 호흡이 숨넘어갈 것처럼 거칠어졌다.

하지만...

“와씨, 한 대도 못 때렸네.”

겔베르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데미언의 몸에 끝끝내 닿지 않았다.

반면, 데미언의 나뭇가지는 겔베르트의 몸 곳곳에 얼얼한 충격을 남겼다.

팔, 다리, 가슴, 어깨, 등,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머리를 제외한 온몸에 데미언의 공격을 허용했다.

그나마 머리를 맞지 않은 것도 데미언이 배려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좋네.”

얻어터지기에 바빴던 시간이지만, 왜인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왕국 내에 몇 없는 금빛 용병패의 소유자.

기사를 제압하는 용병.

텔마르크 영지 최강 용병대의 대장.

그런 자잘한 명성들에 취해 잃어버렸던 젊은 날의 초심(初心).

정의롭고 강한 힘을 지닌 멋진 기사를 꿈꾸었던 어린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배우는 게 많네. 와... 데미언 이 새끼, 아까 거기서 어떻게 피한 거지? 분명 공격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이었던 데미언과의 대련 내용을 복기하며, 묵묵하게 성장 중인 겔베르트였다.

***

리트베르크의 주도(主都), 리트렌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영주성.

이 성의 본래 주인이었던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이 썼던 집무실 책상에 칼날 같은 기세를 풍기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꺼운 갑옷 차림 아래 잘 단련된 근육질의 팔다리와 날카로운 눈매, 견실한 턱을 지녔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의 이름은 에리히 프라이슬러.

나흘 전 바덴하임 군의 선봉장으로 전장에 나서 끈질기게 버티던 리트렌의 성문을 열어젖혔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잠시 내려놓았던 바덴하임 영지 군무관의 지위를 회복한 사나이.

그가, 잔뜩 긴장한 기색의 부하에게서 지시한 임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 하여, 수색조들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남작의 딸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은 버니언 산맥 방면으로 도주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톡- 톡-

부하의 보고를 들은 에리히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하, 버니언 산맥이라... 설마 했던 생각이 진짜가 되었군.”

“군무관님, 그쪽으로 수색조를 추가 투입할까요?”

에리히의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사나이, 틸레인 슈타우터가 조심스레 묻는다.

리트베르크 정벌군 사령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임무 수행에 성공한 그였다.

바덴하임으로 복귀한다면 출세의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을 터.

하지만, 바덴하임의 모든 군사적 권한을 손에 쥔 군무관의 자리로 복귀한 에리히 앞에선 그저 얌전한 부하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 지금 신성교국 방면으로 나간 수색조가 총 몇 개지?”

“예, 10인 1개 조로 총 24개 조가 나가 있습니다.”

“24개라... 그럼, 4개 조만 남기고 20개 조를 버니언 산맥 방면으로 투입하도록. 추가로 리트렌에 있는 병력 중에서도 수색조를 편성해 보내도록 하지.”

“추가 병력은 얼마나 보냅니까?”

틸레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리히가 곧바로 대답한다.

“똑같이, 20개 조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도합 40개 조, 4백 명이 되겠군요.”

“그래,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목표를 놓치더라도 각하에게 보고드릴 면이 서겠지.”

“넵, 알겠습니다.”

에리히의 명령을 받은 틸레인과 병사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데...

“틸레인 경.”

“예, 군무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재깍 몸의 방향을 돌리며 대답하는 틸레인이었다.

“버니언 산맥 반면으로 투입하는 수색조 모두에게, 산맥 안으로의 진입은 절대 금지라는 지침을 내리게. 괜히 몬스터들과 충돌하면 병사들이 다칠 거야.”

“예? 하지만, 수색을 하려면 진입은 피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틸레인에게, 에리히가 건조한 눈빛으로 대답한다.

“육십이 다 된 노 기사와 자라다만 애송이 종자, 열두 살 난 꼬마 여자아이.”

“...!”

“어설프기 그지없는 그 조합으로, 온갖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산맥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음, 하긴...”

에리히의 말을 들은 틸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각하께서 남작 딸의 죽음을 확인하려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전쟁 자체가 오트만 공자님의 죽음에 대한 복수전이다 보니...”

틸레인의 말을 들은 에리히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복수전이라...’

대외적으로 알려진 리트베르크 침공의 이유.

양 영지 간의 혼담을 논의하고자 외교 사절의 자격으로 리트베르크를 방문했던 바덴하임 백작의 막내아들, 오트만 바이츠제커의 죽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정당한 분노 앞에 펠리노어 왕국의 지배자인 왕실조차 고개를 끄덕였고, 이 전쟁은 정당한 명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 그저 탐욕이 빚어낸 추악한 전쟁일 뿐이지.’

백작의 막내아들인 오트만 바이츠제커의 죽음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에리히로서는 그저 불쾌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내막을 모르는 틸레인에겐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속마음.

흔들리던 표정을 다잡은 에리히가 특유의 냉막한 말투로 말한다.

“...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백작 각하에겐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군무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대대로 바덴하임 백작 가문을 섬겨온 봉신 가문 프라이슬러 가의 당대 가주(家主)이자, 백작에게 가장 큰 총애와 신뢰를 받는 가신 에리히가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의 걱정과 의문은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은 틸레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아...”

답답함이 느껴지는 깊은 한숨.

자리에서 일어서 집무실 내부를 이리저리 거닐던 에리히가 툭 던지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에리히, 에리히야... 너는 지금, 기사로서 옳은 길을 가고 있느냐?”

***

“준비 다 되셨습니까?”

“그래, 다 되었네.”

결연한 눈빛을 한 노 기사 데론이 가장 먼저 대답한다.

그의 옆에 선 갈색 머리의 소년, 아드리안 역시 뭐라 대답은 안 했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직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장은요?”

“준비 끝. 야영할 때 쓸 천막이랑 훈제로 만든 비상식량도 다 챙겼어. 네가 만들어 준 이거, 아주 든든하다”

내가 머릿속 기억을 뒤져 어설프게나마 만든 나무 지게에 한가득 짐을 실은 겔베르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는 일행을 위한 짐꾼 역할을 자처했는데, 나와 엔리케는 각각 앞뒤로 넓게 움직이며 정찰 및 경계 임무를 해야 했고, 데론과 아드리안은 니나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이유를 다 제외하더라도 우리 중 나 다음으로 겔베르트가 체력이 제일 좋으니까...’

다음으로, 엔리케.

“나도 준비 끝. 이거 사거리가 좀 짧은 게 문제인데, 어차피 숲속에서 쏠 거니까 상관없을 거야.”

그는 며칠 전 고블린 부락을 뒤져 얻은 화살을 한 움큼 쥐어 내게 흔들어 보였다.

안 그래도 화살이 다 떨어져서 불안해하던 엔리케였는데, 정찰 임무 중 발견한 고블린 놈들이 큰 선물을 주었다.

체구가 작은 고블린 놈들이 쓰던 화살이라 사람이 쓰는 화살보다 크기가 작은 게 문제였는데 엔리케가 고블린 활을 뺏어 사용하면서 문제가 사라졌다.

확실히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린다더니, 몇 번 쏴보더니 금세 감을 잡더라고.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의 홍일점이자 막내, 니나.

사실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해야할 일도 없는 그녀였지만, 니나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이 작고 어린 소녀를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할아버지, 아저씨, 오빠들의 뜨거운 의지(意志).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절절 끓어오르는 그것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다잡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준비됐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자그마한 양 주먹을 힘차게 들어 올리며 대답하는 니나.

힘들다고 어리광을 피우거나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려도 뭐라 할 이가 아무도 없건만, 니나는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참 대견하다, 대견해.

생각 같아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데론 아재의 검이 내 손목을 자르려 들 것 같아서 참았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가시죠.”

리트렌 탈출 닷새째가 되던 날의 아침.

우리는, 안온했던 동굴을 떠나 다시 어둑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다시, 텔마르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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