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50화 (46/197)

< 다시, 텔마르크 (2) >

콰앙!

“키익!!!”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인간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고블린 한 마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목표였던 인간이 재빠르게 들어 올린 둥근 모양의 나무 방패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친 탓이다.

“흐으읍!”

방패를 들어 고블린의 전진을 가로막은 인간,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데론 베르켈이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방패를 수평으로 휘두른다.

퍼억!!!

앞서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고블린의 머리에 정확하게 방패의 모서리 부분이 찍힌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깨진 고블린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머리 부분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푹 파인 모습이 방패에 실렸던 위력을 짐작하게 했다.

“후우우...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트베르크 무력을 상징하는 노 기사 데론 베르켈의 보호를 받는 존재, 리트베르크의 영주 가문 아르펜 가(家)의 유일한 핏줄인 니나 아르펜이 데론의 너른 등 뒤에서 침착하게 대답한다.

“네, 할아버지.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장하십니다! 곧 끝날 테니, 조금만 더 버텨 주시길!”

리트베르크의 모두가 사랑했던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 소녀는, 이제 사납게 덤벼드는 몬스터의 모습을 보고도 떨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키이이잇!!!”

“어딜 감히!!!”

쾅!

또 한 마리. 데론의 방패에 얻어맞은 고블린이 안면이 깨져 바닥을 나뒹군다.

쓰러졌던 놈이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망치처럼 휘둘러진 데론의 오른발이 턱을 걷어찼다.

콰직!

“켁!”

데론에게 턱을 걷어차인 고블린이 짧은 비명과 함께 다시 바닥에 쓰러진다.

턱뼈가 완전히 부서져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충격이 어마어마했는지 눈을 까뒤집은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흐랏차!”

콰앙! 쾅!

데론이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여지없이 머리통이 깨지고, 내장이 터지며 튕겨 나가는 고블린들.

분명 방패란 방어의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나 데론의 손에 들린 방패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공격 무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 좋구나!”

며칠 전 오크와의 전투에서 얻은 참나무 방패의 견고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데론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린다.

고블린 머리통을 얼마나 깼는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었다.

주 무기인 검은 아직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방패만으로도 고블린 따위는 가볍게 격살할 수 있는 막강한 실력.

이것이 바로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기사 데론 베르켈의 위엄이었다.

“키이이익!”

“캬아악! 캬캿!”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번엔 두 마리의 고블린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무기를 들고 다니는 중형종 몬스터 오크들과 달리 작고 볼품없는 고블린들의 무기.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길어봐야 숏소드, 보통은 단검 수준의 짧은 날을 지닌 무기를 사용했는데, 그나마도 싸구려 잡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런 칼이라도 맞으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법.

더구나 데론은 등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니나가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콰쾅! 까아앙!

동시에 울려 퍼지는 충격음.

하나는 데론의 왼손에 들린 방패에서, 다른 하나는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나는 소리였다.

방패와 검을 함께 휘두르며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가해지는 고블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론.

양손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데론의 눈빛에선 한 치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캬앗! 캬아아아!”

“키이익! 키킷!”

카아앙! 터엉! 쾅! 태엥!

상대가 그저 방어에만 치중하자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한 고블린들이 신나게 데론을 공격했다.

찌르고, 때리고, 베고.

하지만, 고블린들은 공격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처음과 달리 어느 한쪽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쿠콰앙!!!

“케륵!”

“케에엑!”

데론이 힘차게 뻗어낸 방패에 부딪힌 고블린들이 숨통 틀어막히는 소리를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비척거리며 물러나는 두 고블린의 모습을 본 데론이 우렁찬 외침을 터트린다.

“자, 지금!!!

“옙! 흐아아앗!”

이어, 데론의 단호한 외침을 들은 누군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슈우우우우우웅!!!

푸화아아악!

검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거세게 피를 뿌리며 두둥실 떠오르는 두 고블린의 머리.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목을 잃은 놈들의 시체가 서로 엉켜 허우적거리다 와르르 무너진다.

“하아, 하아!”

스승 데론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고블린 두 마리를 처리한 사내,

갈색 머리의 소년 아드리안이 검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내며 사방을 경계한다.

“잘했다, 아드리안. 자신 있게 잘 휘둘렀어!”

“예, 스승님.”

스승의 칭찬을 받고도 냉정한 눈빛을 잃지 않는 아드리안.

속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참지 못하고 냉큼 뛰쳐나갈 만도 하련만, 그는 공을 탐하기보단 오로지 니나의 곁에 머물며 그녀를 지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흐아아아아!”

콰지직!!!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 바스타드 소드가 덤벼들던 고블린의 몸을 장작을 쪼개듯이 양단한다.

그 잘린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땅을 박찬 검의 주인, 겔베르트가 폭풍 같은 기세로 한데 뭉쳐 있는 고블린 무리를 덮쳤다.

“다 갈아 마셔주마, 이 새끼들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자신들에게 돌진해오는 겔베르트의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카카카캉!

겔베르트가 휘두른 검과 부딪친 고블린들의 무기가 단번에 부서지고 깨어져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케르륵!”

“캬악!”

그 부서진 무기의 쇳조각에 눈을 찔리고, 몸 이곳저곳이 베이고 찢겨 나간다.

으득, 푸화악!!!

하지만 그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밀어닥친 겔베르트의 후속 공격에 머리통이 깨지고, 몸통이 부서진다.

“후우우...!”

눈 깜짝할 새 뭉쳐 있던 고블린 여섯을 도륙 낸 겔베르트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퍽! 퍽! 퍽!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

그의 시선에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머리통이 꿰어 쓰러지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의 솜씨인지, 굳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저 새끼는 진짜 싸울 땐 다른 인간이 되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겔베르트의 시선 끝에서 정신없이 화살을 날리고 있는 한 사람.

“더 들어와 봐, 이 좆만 한 괴물 새끼들아! 다 덤비라고오오오!!!”

전투의 고양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엔리케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향해 고함을 내지른다.

퍽! 퍽! 퍽! 퍼억!

그에 손을 떠난 화살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블린의 머리와 몸통에 꽂히는 것을 본 아드리안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한다.

“정말 대단한 활 솜씨...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스승님.”

“그래. 나도 꽤 오래 살았다만 저 정도의 역량을 지닌 궁사는 처음 보는구나.”

한마음으로 엔리케의 귀신 같은 활 솜씨에 감탄하는 스승과 제자.

하지만, 감탄을 넘어 이른바 ‘경외(敬畏)’의 감정을 느끼게 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흐으읍!!!”

푸화아아악! 으지직! 콰직!

한번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최소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이 쓰러졌다.

다른 이들에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던 녀석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 바쁘다.

혹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서서 허둥거리기가 일쑤.

그 모두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 앞에 평등한 죽음을 맞이한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덤볐어야지, 이 미련한 괴물 새끼들아!!!”

맹수처럼 포효하며 겁먹은 고블린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녹안(綠眼)의 소년.

데미언.

그는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리트렌을 극적으로 탈출한 뒤 바덴하임 군의 추격을 피해 버니언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벌써 열흘 하고도 엿새째 필사의 도주를 이어가고 있는 니나 일행의 실질적 리더였다.

스각! 촤아악! 콰직!

깊은 숲속에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잔혹한 혈풍(血風).

데미언이 가는 걸음마다 고블린의 목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케르륵! 키야아아악!”

남아있던 고블린 무리 중 가장 큰 덩치를 지니고 있던 녀석이 그 모습을 보고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눈앞에서 너무나 허망하게 죽어 나가는 동족들의 모습이 놈의 가슴에 끝 모를 분노를 안겨주고 있었다.

“... 너구나.”

데미언은 뾰족한 못이 박힌 곤봉으로 바닥을 후려치며 길길이 날뛰는 커다란 고블린의 모습에 주목했다.

놈은 다른 고블린의 서너 배는 될 법한 큰 덩치와 검붉은 피부, 거기에 더해 머리 한가운데 큼직한 뿔 하나를 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보통의 고블린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모습.

하지만 데미언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놈의 이름을 읊조릴 뿐이었다.

“... 홉 고블린(Hobgoblin).”

녀석은 고블린 일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중형종 몬스터의 하나로, 일반 고블린과 비교해 월등한 체구와 힘, 압도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먹잇감으로 노리던 인간들을 잡기 위해 백여 마리에 달하는 일족의 대병력을 이끌고 나온 터.

하지만 맛난 고깃덩어리 정도로 생각했던 인간들에게 무참히 사냥당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비통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음이 채 그치기도 전,

타타타탁!

고블린들이 흘린 피로 질척해진 숲길을 달려 힘차게 뛰어오른 데미언의 검이,

“캬아아아아아!!!”

쉬이이이이잉- 콰지직!!!

놀라 괴성을 지르는 홉고블린의 머리통에 수직으로 틀어박혔다.

휘잉-

이미 데미언이 지나고 없는 허공에 뒤늦게 휘둘러지는 홉고블린의 곤봉.

맥빠지는 바람 소리가 한 차례 들린 뒤, 홉고블린의 어깨 위에 올라탄 자세로 검을 찔러넣었던 데미언이 붙잡은 검 자루를 두 손으로 힘차게 뒤틀어 빼낸다.

“흐으읍!”

으지직- 촤악!!!

홉고블린의 머리통을 꿰뚫고 목뼈를 따라 몸통에 박혀 있던 검이 피를 뿌리며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의 길을 따라 으스러진 하얀 뼛조각들이 튀어나오고, 홉고블린의 어깨를 발판 삼아 위로 뛰어오른 데미언이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한다.

그리고,

후웅- 철퍼덕!!!

생기를 읽고 무너지는 홉고블린의 몸.

버니언 산맥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고블린 일족 ‘핏빛 바람’의 지도자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다.

“캬아아앗!!!”

“키아악! 캬악!!!”

홉고블린의 죽음과 동시에 무기를 내던지고 숲속으로 사라지는 고블린들.

자신의 감각이 닿는 모든 범위 내에서 고블린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데미언이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내쉰다.

“휴우, 귀찮은 고블린 새끼들...”

그렇게 혼잣말을 던지고 뒤를 돌아보는데, 사방에 깔린 고블린의 시체를 뒤져 쓸만한 물건을 챙기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데미언이 홉고블린을 잡아내는 순간 승리를 확신하고 서둘러 전장 정리에 나선 것이다.

“참나,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줄 생각은 않고 물건부터 챙깁니까? 너무하네!”

데미언이 괜히 볼멘소리를 해보지만,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일행들은 꿈쩍 않고 하던 일에 집중할 뿐이다.

“야, 시끄러! 고블린 피 냄새 맡고 다른 놈들 몰려오기 전에 빨리 물건이나 챙겨.”

“자자, 고블린 화살 보이면 저한테 주십쇼!”

“흐음, 스승님! 이 칼은 제법 쓸만해 보이는데요? 가져갈까요?”

“그래, 급할 때 투척용으로 쓰면 될 것 같구나. 챙기거라.”

“... 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는 데미언.

바로 그때,

“데미언 오빠,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무사했네요. 에잇, 이거 닦아야죠!”

전투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

어느새 데미언의 곁으로 다가온 니나가 그의 얼굴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아이고, 아가씨. 오빠라니요! 고귀한 귀족 가문의 핏줄께서 천한 용병에게 그리 부르시면 안 됩니다.”

지난 생애부터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 부를 만큼 니나를 아꼈던 데미언.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고 지낸 오누이 사이처럼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데미언은 속으로는 뛸 뜻이 기뻤지만, 끝까지 예의를 차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난 보름 새 마음의 키가 훌쩍 자라난 소녀는 작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아니에요, 제가 타고난 핏줄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던 리트베르크 영주 가문의 권한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걸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에게 무엇보다 고귀한 건, 보잘것없는 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분들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 앞에서 스스로를 천한 용병이니 뭐니 깎아 내리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셨죠?”

“아가씨... 감사합니다.”

감격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겨우겨우 말을 끝맺는 데미언.

매일 같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니나와 일행들은 새로운 ‘가족’을 이뤄가고 있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 이런 미친.”

목적지인 텔마르크 영지를 불과 이틀 앞둔 어느 산기슭에서,

“크워어어어어어어어!!!”

마침내 니나 일행은, ‘산중제왕(山中帝王)’ 오우거와 마주하게 되었다.

< 다시, 텔마르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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