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52화 (48/197)

< 다시, 텔마르크 (4) >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사와 한 떼의 병사들.

‘혹시... 바덴하임 놈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순간적으로 머리는 스치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두려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나타난 방향 쪽으로 몸을 피했던 니나와 일행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과 분노가 끓어올랐을 뿐이다.

“후우...”

으직- 으드득!

오우거의 얼굴에 틀어박혀 있던 검을 다시 뽑아냈다.

며칠 전 쓸어버린 오크 부락에서 우연히 얻은 고급 등급의 펄션이었는데, 오우거의 단단한 가죽과 뼈를 수십 번이나 후려친 탓에 검의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자루와의 결합 부분도 덜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 무기는, 상관없다.’

저 정도 병력쯤은 이 나간 검이 아니라 목검 한 자루만 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차 한잔 마실 시간 정도면 죄다 두들겨 맞아서 바닥을 굴러다닐 것이다.

지금의 내가 다다른 경지는,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뭐 어지간히 레벨 노가다를 뛰었어야지...’

지난 보름간 나와 일행들은 버니언 산맥의 깊고 깊은 숲을 지나며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크고 작은 몬스터들을 썰어 넘겼다.

거기에 방금 오우거를 잡아내며 얻은 막대한 경험치까지 더해졌다.

그 결과,

팟-!

『 데미언 / Lv. 70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

나는 드디어, 레벨 70의 고지에 도달했다.

오우거와 싸우기 직전 레벨이 67이었는데, 놈을 쓰러뜨린 후 단번에 세 단계가 더 뛰었다.

‘레벨 70이라니... 찌질했던 옛날을 생각하니 진짜 감개무량하다.’

극적인 성장을 이룬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막내야, 저 새끼들... 혹시 바덴하임 놈들 아니겠지?”

내 옆에서 천천히 목을 풀며 활을 들어 올리는 사내, 엔리케.

그 역시 지난 보름간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활로 쏴 죽이며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팟-!

『 엔리케 / Lv. 37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호크 아이(Hawk Eye) 』

걸어 다니는 ‘전투병기’라 불리는 기사들의 능력치가 보통 레벨 35 정도에서 시작한다.

즉, 엔리케는 이 시대 전장의 비주류 취급을 받는 궁수의 몸으로 무려 기사급의 능력치를 달성했다는 얘기였다.

나와 처음 만났을 당시 그의 레벨이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현재의 모습이었다.

“저놈들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네요. 스무 명도 안 되는 것 같은... 엇?”

오우거의 얼굴을 쪼갰던 이 나간 펄션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내 눈에, 허겁지겁 손을 흔들며 뛰어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특유의 붉은 빛 도는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는 잘생긴 얼굴의 소년.

“엔리케 조장님! 데미언 형님! 쏘지 마세요! 이분들, 우리 편이에요!!!”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

“조장님! 형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오우거와 벌인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된 숲 한복판을 날 듯이 달려 내게 다가온 아드리안.

녀석은 다급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와 엔리케의 몸 상태부터 물었다.

“괜찮아. 그냥 몇 군데 긁히고 타박상 입은 정도다.”

“어, 나도 멀쩡해. 고생이야 뭐 괴물이랑 드잡이질 한 데미언이 했지. 나야 바위 뒤에 숨어서 활만 쐈는데, 다칠 일이 있나.”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

아드리안은 얼마 전부터 ‘형님’이란 호칭을 붙이며 내게 깍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신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살 차이긴 하지만 내가 나이도 더 많아서 형님, 아우 관계가 되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더구나 아드리안은 원작에서도 꽤 비중 있는 캐릭터로 성장하는 인물.

그런 아드리안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는 건 내 쪽에서도 두 손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호형호제’를 허락해주었다.

“그나저나, 니나 아가씨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말씀대로 오우거가 등장하자마자 몸을 피하신 덕에 다친 곳 하나 없으십니다.”

“다행이구나. 다른 분들도?”

“예. 스승님과 겔베르트 대장님도 괜찮으십니다.”

“후우, 잘됐네. 그나저나... 저놈들은 뭐야?”

나의 시선이 아드리안과 함께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향했고, 이내 아드리안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텔마르크의 병사들입니다.”

“... 텔마르크?”

“예, 형님. 근방 숲속에서 오우거가 나타났다는 약초꾼의 제보가 들어와 파견된 병력이라고 합니다.”

아드리안의 대답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음, 이곳과 텔마르크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근데, 저 정도 병력으로 오우거를 잡겠다고 나서? 말이 되나?’

뒤에 따라오는 후발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건 기사 하나에 스무 명 남짓한 병사가 전부였다.

‘... 오우거를 잡기는커녕 오우거 손목 한쪽 떼어가기도 벅찰 것 같은데?’

그런 내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텔마르크의 병력을 바라보며 아드리안이 추가적인 설명을 늘어놓는다.

“저기 다가오는 텔마르크의 병력, 정찰대랍니다.”

“정찰대?”

“예. 오우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급하게 파견됐다고 하더군요. 실제 오우거 사냥에 투입될 병력은 따로 있다네요.”

그래, 어쩐지 오우거 잡겠다고 나서는 병력치고 너무 적다 싶었다.

그제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짓는데, 아드리안이 존경의 감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형님이 잡으신 저 오우거, 이쪽 텔마르크 영지에선 엄청 유명한 놈이었답니다.”

“유명한 놈이었다? 네임드 몬스터라는 얘기야?”

“예, 거의 오십 년 전부터 이곳 치페른 산에 둥지를 틀고 활동했다던데요? 그래서 따로 부르는 별칭도 있답니다. ‘치페른의 폭군’이라고... 혹시 두 분은 아십니까?”

“엥? 치페른의 폭군? 우리가 잡은 게 그놈이라고?!”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엔리케가 펄쩍 뛰며 말했다.

치페른의 폭군(暴君).

나 역시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텔마르크 쪽에서 몬스터 토벌 의뢰를 나가면 꼭 한 번쯤은 언급되는 이름이었으니까.

‘... 짬을 처먹을 대로 처먹은, 평범한 오우거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힘과 체력을 지닌 돌연변이 같은 놈이라고 했었지.’

엔리케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잡은 오우거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통 오우거의 수명은 길어야 삼십 년이었다.

근데 치페른의 폭군이라 불린 이놈은 장장 오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남아 활동하며 텔마르크 영지 남부의 주민들을 불안에 떨도록 만들었다.

한 마디로, 보통 놈이 아니었던 거다.

‘무협지로 치면 영물 같은 거네... 이 새끼 이거, 내단 같은 건 없나?’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엔리케가 자기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페른의 폭군, 그 이름 들으니까 이제 생각이 나네. 이놈이 텔마르크 남부에 입힌 피해가 너무 막심해서, 3년 전쯤에 영주인 라이만 남작이 주군인 그뢰네마이어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었거든.”

“도움이라... 오우거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기사를 빌려달라고 한 건가요?”

“그래. 데미언 너도 알겠지만, 텔마르크엔 상급 기사가 한 명도 없잖아?”

“예, 그렇죠.”

“자신을 따르는 봉신의 제안이었던지라, 백작도 흔쾌히 자기 휘하의 상급 기사 한 명을 파견해준 거지. 그를 중심으로 텔마르크 군은 오우거 토벌대를 조직했고, 결국 추격에 성공하긴 했는데... ”

“죽이진 못했군요?”

그때 죽었다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을 리가 없을 테니, 타당한 추론이었다.

“어, 맞아. 당시 파견되었던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가 놈한테 큰 상처를 입히긴 했는데,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고 들었어. 도망을 엄청 빨리 갔다나? 그리곤 버니언 산맥 깊숙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는데... 이놈이 그놈이었다니. 허!”

“... 어쩐지, 칼이 더럽게 안 들어가더라고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평범한 오우거들을 압도하는 힘과 체력을 지닌 네임드 몬스터, 치페른의 폭군.

보통의 상급 기사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지닌 나의 검을 수십 번이나 맞고도 버텨내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오우거 한 마리 잡았다고 바로 레벨 70 넘어가는 게 이상하긴 했지...”

“예, 형님? 지금 뭐라고 하셨...”

“아니, 혼잣말이다. 그보다... 인사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벅, 저벅-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한 사람.

“축복받은 땅 텔마르크의 온당하신 주인, 티노 라이만 남작님을 모시고 있는 기사 다니엘 랭턴입니다. 홀로 오우거를 격살한 젊은 영웅을 이렇게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젊은 기사 하나가 격한 인사말을 늘어놓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한 서른 초반 정도 되려나...?’

그렇다고 해도 이제 고작 열일곱인 나에 비해선 훨씬 많은 나이였다.

더구나 상대는 준 귀족으로서 대우받는 기사의 신분.

그런 양반이 이토록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먼저 건네는 걸 보고 있자니, 새삼 오우거를 잡아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랭턴 경.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입니다.”

나는 다니엘의 손을 공손히 맞잡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먼저 저 자세로 나왔다고 해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며 건방 떨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었기 때문이다.

힘 좀 생겼다고 바로 싸가지 없이 행동한다?

‘... 그럼, 나와 우리 일행의 평판이 떨어질 거다.’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천박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이런 말이 나올 테지.

더불어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녀, 니나 역시 실망할 것이고.

‘원래 애들 앞에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 크흠!’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나의 공손한 인사를 받은 다니엘이 감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 이토록 대단한 위업을 이루신 분께서 이리도 겸손하시다니... 오늘 이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런 분이 우리 텔마르크의 깃발 아래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내 얼굴에 쉬지 않고 금칠을 해주는 다니엘.

저렇게 행동하는 게 이해는 간다.

성년도 되기 전에 오우거를 때려잡은 미친 기량의 용병이 나타났다.

당연히, 나를 텔마르크 측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령 영입을 못 하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옳은 선택일 테니, 계속 저렇게 아부성 발언을 던지고 있는 거다.

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이미 갈 데가 있단다.’

괜한 헛물을 켜는 다니엘이 안쓰러워서, 나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저는 아직 실력도, 경험도 부족한 일개 용병일 뿐입니다. 감히 랭턴 경 같은 훌륭한 기사의 곁에 머물기엔 격이 맞지 않습니다.”

한껏 겸손을 차린 나의 발언.

하지만 다니엘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우거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데미언 님께서 상급 기사의 격(格)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실력과 경험에 대한 검증은 끝이 난 셈이지요.”

“...”

직설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그의 반박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뭐... 기사한테 존댓말 받는 게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길 테니까.

‘그래도, 좀 민망하긴 하네.’

몰려드는 어색함에 괜히 코끝만 문지르고 있는데, 한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랭턴 경, 임시 지휘 막사 설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본대를 향해 이곳 위치를 알리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음, 그래? 알겠다.”

보고를 마친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니엘이 나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지휘 막사가 설치되었다고 하니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귀한 분들을 모시기에 한없이 부족하고 누추한 곳이지만, 이곳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곳에서 쉬고 계시다가 저희 군의 본대가 도착하면 함께 텔마르크로 가시지요.”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다니엘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설치된 지휘 막사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의 고향,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입니다.”

나는 오우거를 잡기 위해 바이펠베르크 영지에서 파견되었다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를 만났다.

< 다시, 텔마르크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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