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텔마르크 (5) >
외르크 라인홀트(Jörg Reinhold).
올해 나이 마흔여섯이 된 그는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강대한 무력을 상징하는 세 명의 상급 기사 중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외르크는 영지 동북부 숲 지대에 나타난 오우거를 쓰러뜨린 후 영광스러운 상급 기사의 이름을 얻었다.
그 이후 바이펠베르크의 깃발 아래 여러 전투에 참전해 활약하던 중 백작의 봉신 중 하나인 텔마르크의 영주, 티노 라이만 남작의 요청을 받아 버니언 산맥으로 향했다.
이른바 ‘치페른의 폭군’이라 불리는 오우거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홀로 영지 동북부 숲 지대의 오우거를 쓰러뜨리고 상급 기사의 명성을 얻은 게 2년 전이었다.
그때도 가능했던 일이 지금 안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크롸아아아아아아악!!!”
며칠 동안 이어진 지루한 추적 끝에 마주한 오우거 ‘치페른의 폭군’은, 외르크의 빈곤했던 상상력을 완벽하게 깨부수는 존재였다.
2년 전 그가 상대했던 녀석과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의 막강한 힘과 체력을 지닌 돌연변이 오우거였던 것!
콰앙! 콰아아아앙-!!!
건물 기둥을 뽑아 휘두르는 듯한 놈의 곤봉 공격엔 땅을 꺼뜨리고 산을 무너뜨리는 힘이 실려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머리통이 깨지고 몸뚱이가 부서져 나갈 어마어마한 위력!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해가며 죽어라 검을 휘둘렀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외르크의 검은 수십 번의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놈의 두꺼운 가죽을 뚫어내지 못했다.
‘2년 전 그놈은 대여섯 번만 검을 맞아도 가죽이 쩍쩍 갈라졌는데...!’
반면 이 돌연변이 오우거 놈의 가죽은 어찌나 질기고 튼튼한지, 흡사 방패를 두드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혼자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
오우거 사냥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온 텔마르크의 정병 오십에 더해 몬스터 토벌에 잔뼈가 굵은 용병들이 무려 백오십.
도합 이백의 병력이 외르크의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외르크가 검을 휘두르고 오우거의 사각으로 빠져나가면, 그 즉시 병사들이 창을 찌르고 화살을 날려 후속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우길 한 시간여.
콰지직!!!
“크롸아아아악!!!”
마침내, 놈의 몸통에 길이만 6미터에 이르는 대(對) 오우거 용 장창이 틀어박혔다.
“크흐윽!!! 뒤져라, 이 괴물 새끼!!!”
싸우던 도중 놈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갈비뼈가 다섯 대나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 외르크.
하지만 그는 상급 기사다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통증을 참아냈고,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찢어낸 오우거의 뱃가죽 틈에 병사들에게 건네받은 창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크와악! 크롸아아아아아!!!”
오십 년 가까이 텔마르크 남부 지역의 공포로 군림해온 전설적인 괴수는, 질기게 이어온 자신의 생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콰직! 퍼어억!!!
분노한 놈이 휘두른 곤봉에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이 피떡이 되었다.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공격을 피해 다급히 땅바닥을 구른 외르크.
“커흑!”
그의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뚫고, 살가죽을 찢었다.
실로 눈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었다.
“크롸아아아!!!”
우지직!!!
주변의 적들을 떨쳐낸 돌연변이 오우거, ‘치페른의 폭군’이 제 배를 뚫고 틀어박힌 장창을 주먹으로 후려쳐 단숨에 부러뜨린다.
그리곤 몬스터 특유의 흉험한 기운이 담긴 눈빛으로 외르크와 텔마르크의 병사들을 잠시 쏘아보더니만, 별안간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 돼... 지금, 죽여야... 쿠웨엑!!!”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뻗던 외르크가 왈칵 피를 토했다.
놈이 큰 부상을 입은 지금 추격해서 반드시 죽여야 했다.
만약 놈이 저대로 도망쳐 살아난다면, 그래서 죽음의 위기를 딛고 더욱 강해진다면 그다음엔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변모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크허윽...”
가물거리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넋이 나간 텔마르크의 병사들이 손발을 덜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오우거는 사라졌지만, 놈이 전장에 흩뿌린 공포(恐怖)의 잔재가 여전히 자리에 남아 병사들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크흑... 컥! 바, 반드시... 반드시 내 손으로... 널 죽여주겠다... 크흐윽!!!”
바로 그것이, 피투성이가 된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 그래서, 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예정된 모든 일정과 업무를 제쳐놓고 말을 달려 텔마르크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여 그 날의 치욕을 갚으려 했는데...”
허탈함이 배인 눈빛으로, 외르크가 쓰러져 있는 오우거의 시체를 바라본다.
“... 이제, 그럴 수 없게 됐군요.”
그의 허망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지난 3년 내내 이놈 죽일 생각만 하면서 칼을 갈았을 텐데, 본의 아니게 내가 그 복수의 기회를 뺏어버렸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저 텔마르크를 향해 가고 있었을 뿐이고, 그 와중에 ‘치페른의 폭군’이 등장했으며, 살기 위해 놈을 죽였을 뿐이다.
하지만...
‘... 아이고, 이 아저씨 완전히 넋이 나간 거 같은데?’
외르크의 텅 빈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내가 아주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아, 이거 괜히 높은 양반이랑 척지게 된 거 아냐?’
나의 걱정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외르크 라인홀트는 그 개인만 봤을 때도 상급 기사라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대단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바이펠베르크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영지 내에서 손꼽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바이펠베르크는 앞으로 다가올 왕국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반드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할 중요 세력 중의 하나.
얽혀있는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외르크와의 관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저를 대신해, 3년 전 이 포악한 괴물 놈에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그대의 검을 빌어 꿈꾸었던 복수를 이루었습니다.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는 오늘 그대에게 받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외르크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반응에,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와, 이 아저씨... 내 생각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이었잖아?!’
딱히 우리 측이 잘못한 건 없으니 대놓고 뭐라고 하진 못하더라도 불편한 뉘앙스 정도는 풍길 줄 알았다.
하지만, 외르크는 내 예상과 달리 깔끔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감사의 인사까지 전했다.
외르크를 비롯해 그가 몸담은 바이펠베르크에 대한 모두의 인상이 좋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
“여기, 이쪽에 계신 어린 숙녀께선 거친 용병 일을 하시는 분 같지 않아 보이는군요.”
외르크가 툭 지나가듯 던지는 말에 훈훈했던 지휘 막사 안의 분위기가 차게 식어버렸다.
외르크가 언급한 ‘어린 숙녀’란 당연히 니나였고, 그의 말을 들은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역시 궁금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아무래도 용병분들과 함께하고 계시니, 호위 임무를 부탁한 의뢰주 분들 아니시겠습니까? 제 생각은 그런데, 그게 맞는지는 잘... 하하하!”
안 그래도 니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였으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 기사 데론의 존재감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했던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외르크가 있으니 거침없이 참았던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어, 음...”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당황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니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옆자리의 데론이 입을 열어 뭐라 얘기를 하려던 그때...
“... 저는, 왕국 서남부 국경 지대에 자리한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의 유일한 후계자, 니나 아르펜입니다.”
“아, 아가씨!”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선 니나의 행동에 깜짝 놀란 데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런 데론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외르크를 바라보며 말한다.
“백작령 바덴하임의 무도한 침략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영지를 빼앗겼고, 아버지께선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저는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지배자인 아르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가주의 신분으로써 이번 전쟁의 불의(不義)함을 모든 왕국민들에게 알리고, 바덴하임의 더러운 모략으로 실추된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푸른 방패 용병대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요.”
길었던 발언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쏟아낸 니나였다.
어린 소녀가 보여준 그 강단 있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막사 안에 모인 모두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엔, 그저 압도당하는 것을 넘어 뿌듯함과 대견함을 함께 느끼는 중이다.
‘크으, 뉘집 딸인지 정말 야무지다, 야무져! 말을 어쩜 저렇게 똑부러지게 하고... 하하하! 잘했다, 우리 니나!’
전쟁에서 패하고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도망치고 있다는 말을 저렇게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바꿔서 말할 수 있다니!
확실히 귀족의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그것보단... 주인공의 위엄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로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의 정체를 알게 된 외르크와 다니엘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자...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지금부터 저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몸담은 영지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외르크의 반응이 중요하지.’
나는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비해 전신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리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외르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감았던 눈을 뜬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외르크.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니나의 양쪽에 있던 데론과 아드리안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검을 뽑아 들거나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 사이 니나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간 외르크.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니나의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만,
턱-
그 자리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아 고개를 숙인다.
“...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의 고향,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가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지배자인 아르펜 가문의 가주 니나 아르펜님을 뵙습니다.”
***
이틀 후_
“저곳이 바로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입니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성벽을 가리키며 뿌듯한 미소를 보이는 기사 다니엘.
그의 설명을 들으며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소녀 니나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른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니나의 목소리.
지난 몇 주간의 고됐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가씨.”
늘 그렇듯 니나의 곁에 선 데론의 목소리에서도 격정이 묻어난다.
목숨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의 눈을 피해 각종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험지(險地) 버니언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수없이 많은 위험을 이겨내며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이곳이... 푸른 방패의 고향이라고요?”
“예, 아가씨.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크라벤의 정경에 감격한 눈빛을 한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크라벤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이씨... 크윽! 크라벤아! 내가... 내가 돌아왔다아! 크흐윽!”
... 엔리케는 이미 울고 있었고.
눈물도 모자라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못 볼 꼴을 보여주는 엔리케의 모습을 일별한 겔베르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일행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 녀석.’
그리고 그곳엔,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푸른 방패의 막내가 있었다.
‘데미언, 네가 우리 모두를 살렸구나.’
처음 용병대에 들어왔을 땐 빼빼 마른 몸에 모든 것이 어설프기만 했던 녀석.
그러나 지금은 홀로 오우거를 격살하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고블린과 오크 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힘을 지닌 사내가 되었다.
‘상급 기사라...’
어렸을 적 겔베르트 자신도 꾸었던 꿈.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바랐던 그 꿈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 버렸다.
‘영원히 닿지 못할 곳에 있는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부족했던 녀석이 그곳에 닿아 그 꿈을 이뤄내는 것을 보았다.
‘... 나도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자신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지금보다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 뭐... 해보자, 까짓거. 안 되면 막내가 어떻게든 도와주겠지.”
끝 모를 피곤으로 굽어졌던 어깨를 당당히 펴고 크라벤의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겔베르트.
깨어질 운명을 딛고 더욱 단단하게 돌아온 푸른 방패의 머리 위로, 새하얀 겨울의 눈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 다시, 텔마르크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