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54화 (50/197)

< 푸른 방패의 귀환 (1) >

사방이 어둑해질 시간이 되어서야 크라벤의 성문에 도착한 우리 일행.

해가 짧은 겨울철이기에, 이미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폐문(閉門)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이고, 병사님! 저희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예?”

“정말 멀리서 왔습니다! 내리 열흘을 밖에서 노숙했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일몰 후엔 성문을 지날 수 없다. 지엄하신 영주님의 명을 어길 셈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예외는 없다. 출입 시간이 지났으니 내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라.”

“병사님! 병사니임! 제발 부탁드립니다! 들여보내 주십쇼!!!”

“저희 아이가 아픕니다! 이 겨울 날씨에 밖에서 노숙하면 얼어 죽을 텐데...!”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 다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텔마르크 영지군에게 위협을 행사하는 적도로 간주하여 처벌하겠다. 거기 너, 뒤로 물러서라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성안에 들여보내 달라 애걸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낸다.

너무 무정하고 야멸차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지 텔마르크는 펠리노어 왕국의 적국(敵國)인 브리카니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땅.

한 마디로, 최전방이라는 얘기다.

그런 중요한 지역의 주도인 만큼, 성문의 개폐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고 사람들의 출입 역시 엄격하게 관리하는 게 당연했다.

‘... 이러니 도둑 길드 놈들이 성벽 밑에 몰래 땅굴 파서 통행료 장사하고 그러는 거지.’

한번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도시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성문 근처에 천막을 쳐두고 노숙을 하게 되는 거다.

‘아마 우리끼리만 왔다면 저 사람들처럼 천막 친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각, 다각-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랭턴이다. 설마 내 얼굴을 모르진 않겠지?”

말머리를 몰아 일행의 선두로 나선 텔마르크의 기사 다니엘 랭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허업! 텔마르크 영지군 성문 경비대 소속, 십인장 조슈아! 래, 랭턴 경을 뵙습니다!”

“랭턴 경을 뵙습니다아!!!”

텔마르크 영지군의 고위급 인사라 할 수 있는 다니엘의 등장에 놀란 병사들이 허겁지겁 군례를 올린다.

“그래, 수고가 많다. 영주님의 명을 받아 치페른 산의 오우거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문을 열어라.”

“어흡, 예옛! 알겠습니다,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야! 문 열어, 빨리 문 열라고!”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했다간 다니엘에게 한 소리를 들을까 싶어 다급하게 성문 안쪽으로 소리치는 병사.

잠시 후,

쿠웅- 철커덩!

문의 개폐 장치가 조작되는 소리가 들리고,

쿠구궁! 그그그그그-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열리는 문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크라벤의 풍경.

성문 근처, 환하게 등을 밝히고 밤 장사에 돌입하는 번화가 상점들과 여관, 술집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랭턴 경, 이제 들어가시죠.”

“음, 그래.”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며 군례를 올리는 병사에게 고개를 까닥인 다니엘이 우리 일행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다.

“자, 들어가시죠. 축복받은 땅 텔마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외르크 경은 저와 함께 영주성으로 가시면 되고...”

텔마르크 영주성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선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넌지시 니나를 바라보았다.

함께 영주성으로 가겠냐는 물음을 담은 눈빛이었다.

다니엘의 의도를 파악한 니나가 차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푸른 방패 용병대와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휴식을 취한 이후 내일 아침 일찍 영주성으로 가 남작님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요.”

“으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용병들이 머무는 여관은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계시기엔 여러모로 불편할 것인데...”

다니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니나는 그 예쁜 얼굴에 방긋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버니언 산맥 한복판에서도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잘 먹고, 잘 잤습니다. 여관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잠자리가 되어줄 테죠.”

“... 허!”

니나의 당돌한 대답에 다니엘의 옆에 있던 외르크가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운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아르펜 가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랭턴 경.”

다니엘의 입에서 나온 ‘아르펜 가주’라는 표현에 순간적으로 니나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른다.

아직 니나는 왕실로부터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

지금으로선 ‘아르펜 가주’라는 호칭 외에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슬픔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 니나의 생각을 알아챈 다니엘이 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여관 근처에 병사들을 몇 명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감시가 아니라 귀한 분을 보호하기 위한 텔마르크의 배려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시라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마르크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니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니엘이 이번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데미언님, ‘치페른의 폭군’을 토벌해주신 것에 대해 텔마르크 영지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와 관련해 영주님께서 따로 포상을 내려주실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관련 일정은 따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머무실 장소가 혹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곁에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겔베르트가 대신해주었다.

“저희는 크라벤 시장 근처 있는 여관 ‘친절한 당나귀’에 묵을 생각입니다. 오래전부터 저희 용병대가 머물던 곳입니다.”

“아, 친절한 당나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리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그렇게 다니엘과 외르크를 떠나보낸 후, 우리 일행은 여관 친절한 당나귀로 향했다.

이동하는 도중, 이제는 우리 용병대 식구들과 부쩍 친해진 아드리안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왔다.

“저기, 겔베르트 대장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음? 뭔데?”

“데미언 형님이랑 조장님이 잡은 그 오우거 말입니다, 그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듣기로는 오우거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엄청 돈이 된다고 들었는데...”

아드리안의 질문에 그의 옆에서 걷던 니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니나도 그게 제법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 그 오우거? 그거야 뭐... 야, 데미언! 네가 직접 설명해줘라.”

“하하, 그럴까요?”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음, 일단 오우거를 잡은 게 나와 엔리케 조장이니 그 부산물에 대한 소유권은 우리 푸른 방패 용병대에게 있는 것이 맞아. 문제는... 당장 우리에겐 그 오우거 사체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는 거지.”

“능력이라면...”

“체구가 작은 몬스터들의 경우엔 수레에 실어서 작업장이 있는 곳으로 옮기면 되는데, 오우거 같은 대형종 몬스터의 사체는 그게 불가능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오우거 덩치가 집채만 하니까 통째로 옮길 수가 없거든.”

“네, 그렇죠.”

“그래서 오우거의 사체를 처리할 땐 관련 전문가들이 오우거의 사체가 있는 장소로 가서 임시 작업장을 설치하고, 거기서 일을 하지. 오우거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수거하고, 뼈를 바르고... 그렇게 대강 사체를 처리한 다음에 나온 부산물을 차곡차곡 수레로 옮기는 거야.”

“아...”

거기까지 말하고 니나를 살피는데,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엄청 흥미롭게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이네. 귀여운 녀석!’

절로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나는 설명이 이어나갔다.

“텔마르크 측 사람들이야 애초부터 오우거를 잡을 작정으로 온 거였으니까, 오우거 사체를 담당하는 전문가들도 당연히 데리고 왔을 것이고...”

“아하, 그래서 랭턴 경이랑 대장님, 형님이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신 거군요?”

“그렇지. 텔마르크 측에서 알아서 오우거 사체를 처리하고, 부산물 판매까지 맡아주는 대신 수익금의 일부를 떼어주기로 했다.”

“얼마나 떼어주는 건데요?”

이번엔 옆에서 지켜보던 겔베르트가 대답을 해준다.

“보통은 수익금의 절반 정도를 떼어주거든. 그게 업계 표준이다. 우리도 텔마르크 측에 그 정도 주기로 했어.”

“아니,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요? 오우거 잡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업적인데, 텔마르크 쪽에서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거 아닌가요?”

“어쩔 수 없어. 오우거 사체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몬스터 사체 처리 전문가들은 죄다 영지 소속 공방에 묶여 있거든. 텔마르크 쪽 도움 못 받으면, 어차피 그 오우거 사체 갖다 팔지도 못하고 버려야 해.”

“... 그렇구나.”

자신이 몰랐던 분야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해한다.

열심히 세상 공부에 매진 중인 제자의 모습이 기꺼웠던 것일까?

아드리안의 스승인 데론이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좀 편하게 웃으시네.’

지난 몇 주간 니나를 지키느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노 기사 데론이었다.

늘 긴장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오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다.

“아, 저 질문 한 가지만 더요!”

“음? 뭐가 또 궁금한데?”

“몬스터 부산물이요, 그거 다 팔면 얼마 정도 나오나요? 엄청 희귀한 재료이니까... 적어도 오백 골드 정도는 되겠죠?”

오백 골드면 오만 실버.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설명한다면, 약 오억 원쯤 되는 돈이다.

분명 거액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나, 오우거의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에이, 아드리안. 너 나이도 어린 녀석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되겠냐? 이거, 이거, 실망이야!”

아드리안의 대답을 들은 엔리케가 낄낄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병 경력이 풍부한 만큼 이런 쪽 지식에도 빠삭한 그였다.

“자, 아드리안. 생각해봐. 오우거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뭘 만드냐?”

“어... 갑옷이나 무기?”

“그렇지.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갑옷, 오우거 힘줄로 만드는 활, 오우거 뼈로 만든 방패... 이런 거,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거든. 물론 잡은 오우거의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에 따라서 값이 다르긴 하지. 가죽이 많이 상했으면 팔아먹기가 좀 그럴 거 아니냐, 안 그래?”

“그렇죠.”

“하지만 아무리 후려쳐도 삼천 골드는 받을 수 있어. 잘 받으면 오천까지는 그냥 간다?”

“오... 오천 골드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오천 골드? 허어...”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워한다.

관심 없는 척하던 니나 역시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는지, 아예 몸까지 돌려서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래, 오천 골드! 근데... 이번에 데미언이 잡은 놈은 ‘치페른의 폭군’이라고 따로 별칭까지 붙은 대단한 놈이었잖아?”

“어, 예. 그랬죠.”

“지난 오십 년 동안 텔마르크 남부를 공포에 떨게 만든, 무시무시한 괴수! 3년 전 저 유명한 바이펠베르크의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 경의 공격마저 버텨낸 전설의 오우거!!!”

“아, 맞네요! 그럼 더 가격이 비싸지겠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아드리안과 니나의 모습에 신이 난 것인지, 엔리케가 흡사 음유 시인이라도 된 듯 손짓 발짓을 해가며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맞아, 더 비쌀 테지. 경매가 붙으면, 적어도 두 배 이상은 가격이 뛸 거야. 어쩌면 세 배가 될지도 모르지.”

“오천 골드의 세 배면... 만오천 골드?! 큽! 딸꾹!”

너무 놀란 아드리안이 딸꾹질을 하고, 니나의 경우엔 그 큰 눈을 깜박이며 지금 자기가 들은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휴, 저 새끼 신났네, 신났어. 야, 저 자식은 네가 잡은 오우거 가지고 왜 지가 저렇게 신났냐?”

엔리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겔베르크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하하,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제가 혼자 잡은 거 아닌데요? 같이 잡은 거지.”

“지랄하네, 엔리케 저 새끼가 도움이 되어봤자 오우거 상대로 얼마나 도움이 됐겠냐? 그냥 응원단 역할 정도나 했겠지. 으휴...”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 일행의 눈앞에, 마침내 목적지인 여관 ‘친절한 당나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드디어 도착했군.”

간판에 쓰인 여관의 이름을 확인한 데론이 반갑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식사다운 식사, 잠자리다운 잠자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반갑게 여관으로 들어가려는데...

퍼억-!

“흣!”

하필 그때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손님과 몸을 부딪친 데론이 짧은 신음을 흘린다.

데론도 데론이었지만, 밖으로 나오던 이도 꽤 건장한 체구를 지닌 사내였기에 충격이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

여관에서 나온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데론에게 사과를 건네다 무언가를 목격하고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동시에, 여관으로 들어서던 나와 겔베르트, 엔리케의 몸도 굳어버렸다.

무뚝뚝한 인상을 지닌, 검은 피부의 사내.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던 머리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믿음직한 얼굴과 목소리만은 잊을 수가 없다.

덜덜 떨리는 눈빛과 입술로,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겔베르트.

“... 메이슨?”

그러자, 상대 역시 목이 메인 음성으로 대답한다.

“... 돌아오셨군요, 대장.”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

그가, 이곳 크라벤에 살아 돌아와 있었다.

< 푸른 방패의 귀환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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