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56화 (52/197)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2) >

“정말요? 정말 저희랑 다닐렌츠까지 같이 가는 거예요? 데미언 오빠도 같이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와아, 정말 잘 됐다!!!”

나를 포함한 푸른 방패 전 인원이 자신들과 함께 다닐렌츠로 향한다는 말을 들은 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녀석, 이럴 때 보면 또 되게 어린애 같단 말이지.

아, 참고로 나는 푸른 방패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했다.

애초에 용병대를 떠나겠다고 말을 꺼낸 거 자체가 겔베르트와 동료들을 돈으로 사서(?) 다닐렌츠로 데려가기 위한 일종의 블러핑이었다.

얘기가 다 잘 된 지금에 와선 굳이 용병대를 나갈 필요가 없게 된 거지.

“흐음, 우리 입장에서야 정말 좋은 일인데... 거 참 희한하구만. 텔마르크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용병대가 갑자기 다닐렌츠로 가게 된 이유가 뭔가?”

우리가 함께 간다는 말을 듣고 마냥 좋아하는 니나와 달리 데론은 갑작스럽게 결정된 푸른 방패의 동행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다운 침착함.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해 다 준비된 변명 거리가 있었다.

“아, 베르켈 경. 예전에 한 번 말씀을 드렸었는데... 제가 사실, 왕국 북부 출신입니다.”

“아, 그랬지. 겔베르트 자네가... 그, 안할트 영지 출신이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겔베르트의 입에서 갑자기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데론이 뭔가 눈치를 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야 알겠군. 혹시, 자네 용병대의 주요 활동지를 고향 근처로 옮기려는 건가?”

우리가 바랐던 그대로의 말을 꺼내주는 데론의 모습에, 겔베르트가 반색하며 대답한다.

“하하하! 역시 연륜은 못 속이겠군요. 맞습니다. 이번에 부하 녀석들과 함께 북부로 이동해서 자리를 잡아볼까 합니다. 오우거 잡고 받은 돈이 꽤 많은지라, 정착 자금도 충분합니다.”

“으흠, 그런 사연이라면... 이해가 가는구만.”

“예, 그렇게 된 거고... 그,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저희가 다닐렌츠 쪽에 자리를 잡는다고 하면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높으신 분의 도움이 있으면 그쪽 용병 길드와도 사업 얘기하기가 편해져서요.”

“다닐렌츠는 나 역시 초행일세. 하지만... 그곳 영주님께서 내가 모셨던 바일 남작님과 아주 절친했던 사이라고 하시니, 말 꺼낼 기회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내 노력해봄세.”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당연한 것을. 이 베르켈, 비록 늙고 볼품없으나 생명의 은인을 위해 노력할 양심 정도는 가진 사람이라네. 허허허!”

겔베르트가 줄줄 쏟아내는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데론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의 제자인 아드리안 역시 실력이 검증된 든든한 ‘형님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기쁜 눈치다.

그리고, 여기 누구보다 기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 야, 막내야.”

“예, 조장.”

“우리 다닐렌츠 도착하면 그날 바로 백 골드씩 나눠주는 거 맞지? 확실한 거지?”

“아이, 똑같은 소릴 몇 번을 하게 만들어요? 속고만 살았나...”

“흐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 인마. 백 골드라니, 내 인생에 그런 거금을 한꺼번 받을 일이 또 있을까!”

“절대 안 까먹을 테니까, 다른 대원들한테도 니나 아가씨 앞에서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는 지금 의뢰 수행 차 다닐렌츠에 가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는 방향이 겹쳐서’ 함께 가는 겁니다.”

“알았어, 인마.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대장 겔베르트를 포함한 푸른 방패 용병대 12명 전원이 왕국 북서부 다닐렌츠로 향하는 니나의 여정에 합류했다.

***

백작령 바덴하임의 주도(主都),

그라이츠(Greiz)_

“... 리트베르크 남작의 딸이 살아있다고?”

부하의 보고를 들은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꼬마 년이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을 노릇인데, 목격된 장소가 텔마르크다? 그게 말이 되느냐?”

“그게...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일단은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은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

퍼억!

“커흑!”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금속 장식을 부하의 얼굴에 집어 던진 백작이 고성을 토해낸다.

“이런 개 버러지 같은 놈이! 내가 지금 그걸 물었느냐? 그 꼬마 년이 어떻게 리트렌을 탈출해서 그 먼 텔마르크까지 갔는지, 그것을 물은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부족했습니다!”

백작이 던진 물건에 맞아 이마가 쭉 찢어진 부하가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거듭 고개를 숙인다.

평소 아랫사람 대하기를 물건 다루듯 하는 백작의 가혹한 성품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각하, 노기를 거두시지요. 귀하신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입니다.”

씩씩거리는 백작을 만류하는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

언제나 그렇듯 조금 긴듯한 금갈색의 머리를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단장한 묘한 눈빛의 사내.

바로, 백작의 오른팔이자 바덴하임 영지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이케였다.

그는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면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한 광경을 하도 자주 봐서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리석은 대답으로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너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만 나가보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싸쥐고 물러나는 부하의 뒷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알프레트.

철컥-

그가 빠져나가고, 백작의 집무실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알프레트가 간사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각하가 아끼시는 바덴하임의 사자가 이번엔 실수를 좀 한 모양입니다. 분명 저희에겐 남작의 딸이 죽었을 거라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의 정적(政敵)을 흠집 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이제 사자도 늙은 것인가? 이런 실수를 할 녀석이 아닌데... 쯧!”

알프레트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는 백작이었다.

“문제는, 각하를 시기하는 왕국 내 세력들이 그 꼬마 계집을 데려다 체스판의 말처럼 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당장 텔마르크 남작이 이번 일을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 보고한다면...”

“바이펠베르크 백작? 허, 디트리히는 그런 일에 크게 관심을 둘 인물이 아니야. 밤이나 낮이나 그저 검에만 미쳐있는 작자 아닌가? 다만... 그 아들놈은 좀 문제가 되겠군.”

“아, 로이스 자작 말씀이시군요.”

알프레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백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로이스인가 하는 그놈. 칼질만 잘하지 정치 쪽엔 영 관심 없는 제 애비랑은 달라. 아직 나이도 어린놈이 눈동자에 욕심이 드글드글해. 제법이야.”

“제법이라고는 하나 그 또한 아비의 후광에 깃댄 잔재주 아니겠습니까?”

“아비의 후광, 가문의 저력... 그런 게 있어도 제대로 못 써먹는 놈들이 태반이야. 손에 쥐고 태어난 것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지.”

그 말을 하는 백작의 눈빛에 스치는 씁쓸한 기색.

그 눈빛이 영 자신의 기대에 차지 않는 백작의 자식들 때문임을 눈치챈 알프레트가 재빨리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크흠, 아무튼 빨리 수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퍼져 각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더 커지면, 리트베르트 병탄 작업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클클, 괜한 말이 퍼져서 이 늙은이의 면을 깎기 전에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럼 어찌할까? 이 늙은이는 머리가 굳어서 그런지 영 생각이 나질 않는데... 자네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가?”

툭, 툭-

집무실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알프레트를 바라보는 바덴하임 백작.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의뭉스러움.

백작을 모시는 가신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하지만 알프레트 아이케는 수많은 정적을 물리치고 명실공히 백작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자리에 오른 사내.

탐욕과 잔혹함이 흐르는 주군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알프레트는 그가 듣고 싶은 말을 꺼낸다.

“그 꼬마 계집이 더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한다라... 어떻게?”

집요하게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 백작에게 알프레트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겠지요. 본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

크라벤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아흐레 만에 바이펠베르크 영지의 주도 쾨니히슈타인(Königstein)에 도착했다.

“와아아! 성벽이 진짜 높아요!”

리트렌이나 크라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쾨니히슈타인의 드높은 성벽을 본 니나가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놀란 것은 니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푸른 방패의 몇몇 동료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성벽의 위용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씨, 단체로 이러면 너무 촌뜨기 티 나는 거 아닌가?

“으와아! 진짜 개쩐다! 뭔 놈의 성벽이 이렇게 높냐? 거의 크라벤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데?”

“에이, 조장! 두 배는 좀 너무 갔다! 한 1.5배 정도?”

“그게 그거지 새끼야! 아무튼 규모 작살난다는 얘기야!”

“아까 지나올 때 성문 두께 봤어요? 와, 나는 진짜... 충차로 계속 때려 박아도 끄떡도 안 하겠던데?”

“아우, 둘 다 좀! 조용히 좀 해요! 창피해 죽겠네, 진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계속 티 낼 거예요?”

나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엔리케와 다른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한편, 일행 중엔 이미 쾨니히슈타인에 와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니나 일행의 정신적 지주, 데론 베르켈과 푸른 방패의 리더 겔베르트였다.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 두 사람의 눈엔 다른 사람들에게선 볼 수 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쾨니히슈타인의 성벽은 언제봐도 어마어마하구만. 허허, 참으로 장관이야.”

“베르켈 경께선 쾨니히슈타인에 자주 와 보셨습니까?”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젊었을 적 몇 번 와 보았다네. 나이 먹어서는 서너 번 정도?”

“어휴, 역시 베르켈 경의 경험은... 저는 평생 두 번 와본 게 끝입니다.”

“허허,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자네도 알겠지만, 쾨니히슈타인이 크기만 으리으리하지 딱히 볼 것은 없어. 도시의 태생 자체가 군사 요새로 지어진 곳이다 보니 찾아갈 명소 같은 게 별로 없다네. 보게나, 얼마나 분위기가 칙칙한가?”

“하긴, 저도 처음 쾨니히슈타인에 왔을 땐 열심히 무기상들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대신 여기서 파는 무기와 갑옷들의 품질은 왕국 전체에서도 손꼽힌다네. 왕국 북부에 있는 바페슈타트 정도를 제외하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가 힘들 거야.”

데론의 말 그대로였다.

쾨니히슈타인은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가 오랜 세월 발전해 도시가 된 곳.

당연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군인이거나 군인의 가족이었고, 혹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곳이니, 당연히 도시 내에서 팔리는 무기나 갑옷의 품질도 훌륭할 수밖에.

그리고 나는, 우리 일행의 전력을 강화해줄 이런 훌륭한 기회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도시 광장의 한 가운데, 나는 큰 소리로 일행들을 불러모았다.

“뭐야, 뭔데 그래?”

“데미언, 무슨 일 있어?”

“왜?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

“으하하하! 그거 좋네!”

왁자지껄 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다는 말, 다들 아시죠? 좋은 무기와 갑옷으로 이름 높은 쾨니히슈타인에 왔는데, 명색이 칼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빈손으로 떠나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 데미언 너 혹시...”

내가 무슨 의도를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 얼추 감을 잡은 동료들의 눈에 기대감이 차오르는 게 보인다.

그리고 내 입에선, 그 기대감에 걸맞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도는 1인당 100골드, 제한시간은 1시간. 그 안에서 뭐가 되었건 다 제가 쏩니다. 자! 뭐하십니까? 빨리들 움직이세요!”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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