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57화 (53/197)

< 바이센 평야의 혈투 (1) >

1457골드.

단 한 시간 만에 내가 쾨니히슈타인 무기상 거리에서 쓴 돈의 액수였다.

‘진짜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게 이런 건가...?’

이 정도 금액이면 아마 내가 자란 크라벤 빈민가를 기준으로 거리 전체를 몇 년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깝지 않은 투자였어.’

지닌 바 실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플 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푸른 방패의 동료들.

개개인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몇 년 동안 함께 싸우며 길러온 끈끈한 조직력까지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평소엔 감히 살 생각도 할 수 없던 수준의 고가 장비들을 맞춰주었다.

당연히, 동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야! 이거 봐봐! 크으, 때깔 죽이지 않냐?”

“어우, 그놈의 도끼 사랑은 진짜... 넌 용병이 아니라 나무꾼이냐? 전장에 나선 사나이라면 당연히 검을 써야지. 나처럼!”

“근데 비싼 거라 그런가?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 검이 무게 중심이 잘 잡혀서 그런지 무게가 별로 안 느껴져.”

“갑옷도 그래. 몸에 아주 쫙 달라붙는 느낌이... 크으!”

“야 이 새끼들아, 새로 산 장비 자랑할 시간에 막내한테 고맙다는 말부터 해라!”

“어어, 맞네. 인사부터 해야지. 데미언, 진짜 고맙다!”

“내가 용병 일 시작한 후로 이렇게 좋은 갑옷은 처음 입어본다. 고맙다, 막내야!”

“데미언 만세! 네가 짱이다!!!”

동료들의 격한 환호와 감사의 인사가 쏟아졌다.

좋은 무기는 적은 힘만으로도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게 하고, 좋은 갑옷은 전장에 나선 용병들에게 여벌의 목숨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제 푸른 방패 전원이 그런 좋은 무기와 좋은 장비를 갖추게 되었으니, 용병대의 전력이 급상승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대원들의 처우를 위해 이렇게 개인 사비를 털다니... 악덕 용병대장인 누구와는 다르다! 데미언을 푸른 방패의 대장으로 추대하자!!!”

“데미언을 대장으로! 대장으로오!!!”

“악덕 용병대장은 물러가라! 물러가라아!”

“물러가라아!”

“아잇, 엔리케!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요!”

늘상 그렇듯 엔리케는 이번에도 선 넘는 소리를 하며 동료들을 선동하다 나한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문제는...

“돈 잘 쓰는 데미언을 푸른 방패의 대장으로! 대장으로오!!!”

... 나를 대장으로 추대하자는 사람들 틈에 겔베르트도 끼어 있었다는 거다.

“뭐야?! 대장은 왜 그 말에 같이 찬성하고 있는 건데요?”

“... 크흠, 봤어?”

싸움터가 아닌 곳에서 보면 그냥 얼간이들 집합소 같은 푸른 방패의 식구들이었다.

“야, 근데... 우리야 좋은 장비 사줘서 좋긴 한데, 데미언 너 괜찮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막내한테 좀 미안하긴 하다. 야, 이거 나중에 우리가 돈 벌어서 갚자. 이게 한두 푼도 아니고... 그래야 하지 않겠냐?”

갑작스러운 큰 지출에 놀란 동료들이 나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지만, 그 정도 돈은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뭐... 돈이야 또 벌면 되니까.’

이미 내 머릿속엔 다닐렌츠 영지에서 돈을 벌 방법이 열 가지도 넘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쓴 돈은 그 방법들도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 라기엔 좀 많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돈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큰 부담이 아니라는 얘기다.

동료들의 무기와 갑옷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면서 겸사겸사 니나에게도 갑옷을 하나 사주었다.

소매가 없는 조끼 형태의 가죽 갑옷이었는데, 재질이 남달랐다.

바로, ‘대형종 몬스터 등급의 문지기’라 불리는 트롤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었던 것!

몬스터 가죽 중 최고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오우거 가죽만큼은 아니었지만, 트롤의 가죽도 상당히 질기고 튼튼했다.

‘기본적으로 오크나 고블린 같은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놈이 트롤이니까...’

트롤의 가죽 역시 어지간한 창칼이나 화살 공격 정도는 뚫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평범한 병사들은 어림도 없고, 적어도 기사급 실력자 정도는 되어야 검으로 가죽을 베어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엄청 사악했지...’

그 조그마한 조끼의 가격이 무려 40골드나 했다.

오늘 산 물건 중에 제일 비쌌지 아마?

“오빠,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마워하는 니나의 모습을 보니 좋은 선물을 해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 니나야, 오빠가 널 이렇게나 생각한단다.

한편, 나는 데론에게도 좋은 검 한 자루를 선물했다.

데론은 우리 일행의 최연장자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니나에겐 친할아버지 같은 분.

더불어 레벨 50이 넘는 막강한 실력을 지닌 기사였기에, 투자가 아깝지 않았다.

데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검도 나쁘지 않은 검이었다.

애초에 한 영지의 군무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싸구려 칼을 차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버니언 산맥에서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썰어내느라 데론의 검은 날이 많이 상해있었고, 이참에 아예 새 검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허! 이런 귀한 선물을... 정말 고맙네, 데미언! 잘 쓰겠네.”

나에게 검을 선물 받은 데론은 진심을 감격한 듯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에게 선물한 검의 가격은 25골드로, 등급은 고급(Advanced)이었다.

하지만 검을 살펴본 데론은 거의 희귀(Rare) 등급에 준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검이라고 했다.

아마 희귀 등급 검을 만들려다가 잘 안 된 실패작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은 게 대체 얼마만 인지... 묘한 기분이 드는군.”

“하하하,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선물을 해드려야겠네요.”

“아니지, 다음엔 내가 자네에게 선물을 줘야 어른으로서 면이 서지 않겠나? 이 늙은이에게도 멋 부릴 기회를 좀 주시게나, 허허허!”

나이로 치면 거의 손주 뻘인 나였지만, 데론은 늘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특히, 내가 오우거를 때려잡은 후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나를 무인(武人)의 한 사람으로 존중하겠다는 의도일 터.

대우받는 것 같아서 좋긴 한데, 나이도 훨씬 많은 어르신이 내게 존대를 하니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니나의 경우처럼 조손지간으로 지내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그래, 아직은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천천히 하자. 천천히!’

한편, 겔베르트는 새로 무기를 사는 대신 원래 쓰던 바스타드 소드를 수리해서 계속 쓰기로 했다.

써오던 검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다나 뭐라나?

그 덕분에 나는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게임 <로스트 킹덤>만의 오리지널 설정 하나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

짧은 겨울 해가 슬슬 산 너머로 향하는 시간.

다른 일행들은 모두 도시 광장 근처에 잡은 숙소에서 쉬고 있었고, 나와 겔베르트만 따로 길을 나선 상황이었다.

깡! 깡! 까앙!

가게 안팎으로 벌겋게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코끝에 진하게 느껴지는 쇳가루 냄새와 한겨울의 추위를 잊게 만드는 화로의 열기가 가득한 곳.

우리는 쾨니히슈타인 무기상 거리에 자리한 어느 대장간에 와 있다.

“오호... 이게 바로 대장이 말한 ‘그거’ 군요?”

“어, 맞아. 처음 보냐?”

“예, 처음 보네요. 텔마르크 쪽 대장간에선 이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럴만하지. 기본적으로 이걸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최소 달인(達人)급 대장장이는 되어야 이걸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걸?”

“아하?”

“근데 그 달인급 대장장이가 그렇게 흔하지가 않아. 이 넓은 왕국 다 뒤져봐야 한 이백 명 될까?”

“왕국 전체에 이백 명이라... 적긴 하네요.”

“그나마 여기 쾨니히슈타인쯤 되니까 달인급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을 쉽게 찾는 거지, 다른 도시엔 거의 없어.”

“그렇구나...”

겔베르트의 설명을 들으며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물건 자체가 내가 만들어낸 게임 <로스트 킹덤>의 고유한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손에 들려 있는 둥글둥글한 생김새의 검은 돌.

이것이 바로,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무기를 강화하는데 쓰이는 물질인 ‘강화석(强化石)’이었다.

“이거 크기에 비해서 무게가 꽤 나가네요. 이름만 돌이지, 그냥 금속 덩어리 같아요.”

“그렇지 뭐. 그러니까 쇳덩이랑 섞였을 때 더 튼튼해지는 거 아니겠냐?”

바로 그때, 대장간 안쪽에서 열심히 망치질 중이던 중년 사내 하나가 우릴 보고 말을 걸어왔다.

“허헛, 강화석을 만지작거리시는 걸 보니 쓰는 무기에 밥 주러 오신 모양이오?”

“맞습니다. 여기 주인장 되십니까?”

“그렇소만?”

“검 수리를 좀 맡기러 왔습니다. 수리를 맡기는 김에, 밥도 좀 주고...”

대장간 주인과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밥 준다’는 말은 무기를 강화할 때 쓰는 업계의 은어였다.

무기에 강화석을 ‘먹인다’는 의미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그럼...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주쇼. 하던 작업이 좀 남았거든. 이게 쇠가 식으면 안 되는 거라... 너무 오래는 안 걸릴 거요.”

“예,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십쇼.”

“고맙소. 그럼, 잠시만.”

깡-! 깡-! 까앙-!

그렇게 대장간 주인이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는 사이, 나는 대장간 매대에 전시된 무기와 갑옷들을 이것저것 구경했다.

달인급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답게, 일반적인 무기상에선 보기 힘든 고급 등급의 장비들이 많이 구비 되어 있는 게 보였다.

“여기 주인장, 감각이 좋으시네요. 만드는 무기의 성능 자체는 경험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도 디자인 쪽은 타고 나야하는데...”

“오, 그래? 여관 주인이 추천한 곳이라 반신반의하면서 왔는데 다행이다.”

“추천 성공이네요. 그나저나...”

눈앞의 검 한 자루를 들어 살펴보는 척하며 나는 겔베르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있는 대장간 맞은편, 검은색 옷 입고 있는 남자 보여요? 후드 걸친 놈이요.”

“음? 어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겔베르트를 다급하게 말렸다.

“정지! 쳐다보지 마세요, 눈치채니까.”

“어? 어어...”

“저 새끼 아까 우리가 여관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온 놈이에요. 처음엔 그냥 가는 방향이 비슷한가 싶었는데... 아니에요. 우리가 대장간에 들어온 후엔 더 안 움직이고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중이거든.”

내 설명을 들은 겔베르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꼬리가 붙은 건가? 바덴하임?”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그렇겠죠?”

“젠장,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근데 예상했잖아요? 니나 아가씨가 텔마르크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바덴하임 측에 들어갔을 테니, 그놈들도 뭔가 움직임을 보일 테죠.”

“젠장, 그래도 너무 빠른데... 그럼, 저놈은 소속이 어디지? 당장 바덴하임 쪽 사람들이 여기까지 투입된 건 아닐테고...”

이를 악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내가 간단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모르면, 잡아서 물어보면 되죠.”

“뭐?”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자, 잠깐 데미언! 작전을 짜서 나랑 같이 움직이...”

하지만 겔베르트가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터억-

“허억?”

대장간 밖, 무기상 거리 한쪽에서 서성이며 나와 겔베르트를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사내.

그는 앗, 하는 사이 자신의 눈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코앞에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미행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품에서 무기를 꺼내려던 찰나,

터억-

그보다 앞서 움직인 내 왼손이 사내의 오른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고,

콰악!

“커흡!!!”

사냥에 나선 독수리의 발톱처럼 쏘아진 내 오른손이 놈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뒤, 나는 사내를 밀어젖히며 근처의 골목으로 향했다.

“...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마. 넌 내가 허락할 때만 말하는 거야. 안 그러면...”

꽈아악-

“꺼흐윽...!”

나직한 목소리의 협박과 함께 점점 강해지는 오른손의 악력.

숨이 막히다 못해 단숨에 목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압력이 사내의 목에 가해졌다.

“... 이대로, 목을 부러뜨리겠다. 내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겠지?”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나에게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놈의 목을 잡았던 오른손을 풀어주었다.

“쿨럭! 쿨럭! 커흐으으읍!”

살았다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는 사내.

바로 그 순간,

퍼억!!!

“끄허억...!”

놈의 배에 내 오른손이 틀어박혔다.

“꾸웨에에엑...!”

아무리 살살 쳤다고 해도 상급 기사에 경지에 다다른 이의 주먹질이 일반 사람과 같을 리 없다.

주먹질이 아니라 발로 걷어차인 것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테지.

“끄어어어... 커헙!”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며 바닥으로 엎어지려는 사내의 머리칼을 잡아 강제로 다시 일으켰다.

“꺼흐윽! 컥! 사... 살려 주십시오!”

“...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답해라.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에겐 언제나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을 나의 녹안(綠眼).

“... 네놈 머리통을 잡아 뜯어서 대장간 화로에 넣어버릴 거다. 내 말, 알아들었냐?”

하지만, 눈앞의 사내에겐 꿈에서 다시 볼까 무서울 사신(死神)의 눈동자로 기억될 것이다.

< 바이센 평야의 혈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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