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센 평야의 혈투 (2) >
“끄르륵...”
털썩!
머릿속 정보를 다 토해낸 녀석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나에게서 뿜어진 강렬한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정신을 잃은 것이다.
뭐, 그전에 기절할 만큼 충분히 많이 맞기도 했지.
“젠장...”
놈에게서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게 붙잡힌 이 녀석은 자신을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에 소속된 조직원이라고 고백했다.
며칠 전, 우리 일행의 인상착의 정보를 지닌 익명의 사내가 도둑 길드를 찾아와 미행을 의뢰했단다.
그 익명의 사내가 어디서 온 놈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황금백의 부하일 테지.’
백작의 추적이 따라붙는 상황은 니나가 텔마르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그 추격의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하긴, 황금백 정도면 이곳저곳에 깔아놓은 정보망의 수준이 대단하겠지.’
왕국 전체까지는 아닐지라도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포나우 강 이남 지역, 즉 바덴하임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왕국 남부 지역 정도는 백작의 정보망 아래 있을 것이다.
무릇 구축된 정보망의 수준이란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입하느냐에 달린 것.
왕국 제일의 부호(富豪)라 불리는 바덴하임 백작이 만든 정보망이라면 얼마나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쾨니히슈타인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정비를 하고 움직이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도시에서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때,
‘...!’
넓게 펼쳐진 나의 감각에 걸려든 누군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맞은편 골목 끝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빼는 것이 보였다.
“어딜!”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턱, 턱!
단 두 번의 도약으로 골목길 담벼락 위로 올라선 나는 내 몸에 잠재된 검성(劍聖)의 감각이 일러주는 대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했다.
‘확실히,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른 뒤 감각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어!’
범위만 넓어진 것이 아니다.
감각 자체가 더욱 예민해지고, 또한 정밀하게 변했다.
즉, 지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도망치는 저놈은 나의 추적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휘이이잉- 턱!
일부러 놈이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기다리다 모습을 드러냈다.
“흐어억!”
철퍼덕!
갑자기 눈앞에 뚝 떨어진 내 모습에 기겁한 놈이 뒷걸음질을 치다 못해 발이 엉키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제 깐에는 나를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네깟놈이 도망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이 자식아.”
“에...?”
내 입에서 나온 알 수 없는 소리에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짓는 상대.
그런 녀석에게, 나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
***
“데미언, 어떻게 됐...”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내 모습을 보자마자 질문을 던진 겔베르트가, 내 손에 묻은 붉은 혈흔을 보며 말끝을 흐린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내가 빙긋 웃으며 손에 묻은 피를 옷에 문질렀다.
“아, 이거... 미행 붙었던 놈이랑 대화 좀 하느라고요.”
“... 대화가 많이 격했나 보네.”
“그러게요, 너무 반가워서 감정이 격해졌나 봐요. 두 놈이나 따라왔던데.”
“농담은 이쯤하고. 그래, 뭐 하는 새끼야? 백작이 붙인 놈들이 맞아?”
“아니요, 백작이 붙인 놈은 아닌데... 따지고 보면 백작 때문에 우리랑 엮인 건 맞아요. 쾨니히슈타인 도둑 길드 조직원이랍니다.”
“도둑 길드?”
내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 백작 쪽에서 길드에 의뢰를 넣었군. 그래서 꼬리가 붙은 거고?”
“맞습니다. 근데, 정확히 우리가 누군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저한테 붙은 놈, 둘 다 너무 실력이 보잘것없는 놈들이었어요. 저나 대장의 수준을 알았으면 이딴 놈들 못 붙이죠.”
“그럼 백작 쪽에서 의뢰 넣은 도둑 길드에 자기들이 아는 정보를 다 풀지는 않았다는 얘긴데... 하긴, 백작 쪽에서도 조심스럽겠지. 너무 정보를 많이 풀었다가 자기들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할 테니.”
“예, 그렇겠죠.”
겔베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펠리노어 왕국을 대표하는 대귀족 중 하나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근거지인 쾨니히슈타인.
이곳에서 바덴하임의 첩자들이 도둑 길드를 사주해 음험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의 힘이 대단하다곤 하나, ‘왕국제일검’의 분노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겠지.”
“예, 그렇죠.”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
한 시대를 기준으로, 펠리노어 왕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검사 중 단 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영광스러운 호칭.
당대의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이곳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주인인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Dietrich Grönemeyer)였다.
금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 외모적 특성에 기인한 ‘벽안무적(碧眼無敵)’이란 별칭으로도 유명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맞설 자 없는 어마어마한 검술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 대단한 실력을 인정받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왕족들의 경호를 담당하는 왕실 근위대의 수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도 전혀 무뎌지지 않은 그의 검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왕실의 위엄을 상징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 왕국제일검의 분노도 무섭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국왕 폐하의 최측근이라는 게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맞아. 안 그래도 리트베르크 전쟁 때문에 바덴하임 백작을 곱게 보지 않는 귀족 사회의 시선이 많을 텐데, 여기서 국왕의 최측근까지 건드려버리면 불 난데 기름 붓는 꼴이 될 테니...”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대장간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흠, 큼! 거, 중요한 대화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나 이제 하던 일 끝났는데?”
“아, 주인장.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그쪽도 기다렸으니까... 그래, 밥 먹일 녀석 얼굴 좀 봅시다.”
“한 번 봐주시죠. 이놈입니다.”
겔베르트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검집째로 끌러 주인장에게 내어주었다.
스르릉-
겔베르트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 상태를 살피는 주인장.
잠시 후,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니, 이거... 보아하니 고급 등급도 아니고, 그냥 일반 등급의 검인데 이걸 굳이 수리해서 강화할 필요까지 있나? 그냥 여기 있는 고급 등급 검을 하나 새로 사는 게 더 간단할 듯 한데?”
“그게... 좀 사연이 있는 녀석이라 그렇습니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주인장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사연이 있는 검이라...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구만.”
“수리에 강화까지, 작업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지금 이래저래 작업이 밀린 게 있어서,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릴 거요. 그나마도 장담 못 하지.”
“사흘... 하, 너무 늦는데.”
바덴하임 백작의 추격이 따라붙었다는 걸 확인한 상황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겔베르트였다.
“어떻게, 웃돈을 좀 드릴 테니 더 빠르게 안 되겠습니까?”
“웃돈? 허, 얼마나 주시려고 그런 소릴... 일단 수리비에 강화 작업 추가하는 것까지 해서 30실버요. 거기에 웃돈으로 한 5실버 정도만 얹어주면, 이틀까진 어떻게 당겨보겠...”
턱-
“...?!”
주인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싯누런 금화 한 개를 올려주며 말했다.
“저희가 좀 바빠서, 일단 선금으로 1골드. 내일 아침 일찍까지 작업 마쳐주시면 1골드를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아, 대신 날림으로 하시면 안 되고, 꼼꼼하게. 가능하시겠습니까?”
“...”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금화를 잠시 바라보던 주인장이 한껏 공손해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준비해놓겠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
“그럼, 일단 나는 숙소로 돌아가 있으마. 가서 일행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전할 게.”
“예, 대장. 저는 도둑 길드를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위치는 아까 그놈들에게 물어 알아뒀습니다.”
내가 도둑 길드를 찾아간다고 하자 바로 걱정스러운 눈빛이 된 겔베르트다.
“혼자 괜찮겠냐? 내가 숙소 가서 몇 놈 추려서 나올까?”
“걱정마세요. 그깟 도둑놈들 소굴이 위험해봤자 ‘치페른의 폭군’만 하겠어요?”
내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하! 맞네. 순간적으로 네가 어떤 놈인지 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숙소에 가셔서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알았다. 그래도... 조심해라.”
“예. 대장.”
겔베르트와 헤어진 뒤, 나는 앞서 잡아 족친 조직원 두 놈에게서 알아낸 도둑 길드 본부의 위치를 향해 이동했다.
서로 다른 두 놈에게서 나온 대답이 같았으니, 아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누가 도둑놈들 소굴 아닐까 봐 길드 본부의 위치는 도시 빈민가 쪽이었는데, 내가 살던 크라벤 빈민가와 비슷한 냄새와 분위기가 느껴졌다.
‘역시, 어딜 가든 없이 사는 동네 풍경은 비슷하구나.’
여기 오는 길에 시장에서 3실버를 주고 구매한 허름한 로브의 모자를 손끝으로 당겨 써 얼굴을 가렸다.
혹시라도 내 얼굴을 알아본 도둑 길드 조직원이 있을까 우려한 탓이다.
‘뭐, 알아본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귀찮아서 그런다, 귀찮아서.
“하... 한 푼만 줍쇼. 한 푼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구걸하는 거지를 지나쳐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맴도는 거리를 걸었다.
이토록 추운 날씨에 집도 없이 길가에 나앉은 잿빛 얼굴의 사람들.
그들의 주변엔 먹을 것 없고, 가진 것이 없어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사람들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익숙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빈민가 특유의 분위기였다.
‘분위기 참... 개떡 같네.’
머릿속에 감도는 씁쓸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도둑 길드 본부로 추정되는 건물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저기군.’
빈민가 한가운데 자리한 2층짜리 석조 건물.
그 건물을 중심으로 건장한 체력을 지닌 대여섯 명의 사내가 사각(死角)이 없도록 배치되어 주변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빈민가 주민들과 다르게 어지간히 잘 먹고 지내는 듯 때깔이 좋았다.
“어이, 너 뭐야?”
수상한 놈이 나타나 지네 건물로 다가오자 경계하는 녀석들.
그중 민머리에 험악한 얼굴을 한 녀석 하나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 새끼. 얼굴만 봐도 아주 적성을 잘 찾은 것 같다.
‘그래도 밥값은 한다 이거지?’
피식,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 나는 표정을 굳히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길드에 의뢰를 하러 왔소.”
“의뢰? 너 누구 소개로 왔어?”
생각보다 성실한(?) 문지기의 태도에 작게 감탄하면서, 나는 지금 무기상 거리 골목길 어딘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녀석의 이름을 댔다.
“자말에게 소개받았소. 이리 가면 된다고 들었는데...”
짤랑-
내 주머니에서 나온 은화 몇 개가 나를 가로막은 사내의 손으로 전해진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사내들이 ‘아’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저거 내가 먹었어야 하는데!’
뭐, 대강 이딴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한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표정이 밝게 바뀐 민머리가 슬쩍 길을 터주며 말한다.
“커흠, 흠! 손님이셨군. 들어가시오. 문 열자마자 정면에 테이블이 하나 보일 텐데, 그놈이랑 대화하면 될 거요.”
“고맙소.”
민머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철컥, 끼이익-
낡은 나무문 특유의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나는 도둑놈들의 소굴에 들어섰다.
< 바이센 평야의 혈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