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센 평야의 혈투 (4) >
쾨니히슈타인의 여러 시장 골목 중 과일과 각종 곡식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따뜻한 대륙 남서부 에이다르 왕국에서 넘어온 사과! 너무 달아서 설탕 같아요! 5개의 1실버! 어서 담아가세요!”
“배 드세요! 겨울 배가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에이, 너무 비싸다! 좀만 깎아 줘요!”
“사는 김에 보리 한 됫박 들여가세요. 요걸로 보리빵 만들어 먹으면 그게 아주 또 별미야!”
가진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과 손님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펼쳐진다.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소란스러운 그 흥정의 한 가운데 자리한 작은 청과상.
그리고, 그 가게로 들어서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 하나.
손님의 방문을 확인한 순박한 얼굴의 가게 주인이 밝게 미소 짓는다.
“어서 오세요. 좋은 물건 많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여기까진 평범한 대화지만, 그다음 이어진 대화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연어가 좀 들어왔나요?”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다는 걸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찾는 것을 말하는 손님.
과일 파는 청과상에서 연어를 찾다니?
하지만, 손님의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은 가게 주인은 밝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물론이죠. 여기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계산대 밑에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주는 가게 주인.
손님이 봉투를 건네받으며 슬쩍 그 안을 살펴보는데,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몇 개 들어있다.
연어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주인이 내어준 물건은 엉뚱하게도 사과였다.
하지만 손님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가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았고, 동전 몇 푼으로 값을 치른 뒤 미련 없이 뒤를 돌아서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순박하게 웃는 가게 주인의 작별 인사를 들으면서.
***
끼이익-
녹슬고 낡은 경첩의 비명을 들으며, 문을 열어젖힌 사내.
“으, 더럽게 춥네.”
턱,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탁자 위에 내던진 사내가 방 한쪽에 마련된 작은 화로에 불을 붙인다.
“... 이제 좀 낫네.”
화로의 불꽃에 얼었던 몸을 적당히 녹인 사내가 탁자 위에 던져두었던 종이봉투를 거꾸로 뒤집는다.
와르르, 봉투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빨간 사과들.
그리고,
툭-
탁자 위에 놓인 사과 위로, 봉투 바닥에 깔려있던 자그마한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 바덴하임의 첩자 벤피셔가 돌돌 말려 있는 그 쪽지를 펴들고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여관에 머물며 장기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 중이라...”
지난 며칠간 보고 받은 정보에서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쪽지 속의 내용에, 벤피셔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새끼들,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영 의심스러운 정보의 내용에 벤피셔의 마음속에 불길한 느낌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 안 되겠어.”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니나 아르펜과 푸른 방패 용병대의 상황을 확인하러 가보기로 마음먹은 벤피셔.
하지만,
콰쾅-!!!
그 순간, 벤피셔가 숨어 있던 안가(安家)의 낡은 나무문이 박살 나며 정체 모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 누구냐?!”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방문에 놀란 벤피셔가 소리를 지르며 다급히 방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검을 꺼내들었는데...
“어이, 너 그거 휘두르면 손모가지째로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 괜히 피 보지 말고 얌전히 가자. 응?”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불청객들의 선두에 선 사내가 여유로움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벤피셔에게 말했다.
“아, 손님이니 내 소개부터 해야지. 나는 바덴하임의 쥐새끼를 잡으러 온 백검기사단 2조장, 루츠 비어만이다.”
“...!”
“손에 든 거, 얌전히 내려놓고 투항해라, 그럼 ‘일단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
“하... 시발.”
탱그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대의 말을 들으며, 벤피셔의 손에서 천천히 검이 떨어져 내렸다.
“옳지, 옳지. 잘 생각했어.”
무기를 버리는 벤피셔의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는 백검기사단 2조장, 루츠 비어만.
하지만 그는 몰랐다.
벤피셔가 벽에 세워져 있던 검을 집어든 순간,
후두둑-!!!
건물 옥상에 설치되어 있던 새장의 문이 열리며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는 사실을.
***
“... 곧 해가 지겠군.”
슬슬 붉게 물들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 겔베르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뒤쪽에서 따라오던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베르켈 경, 슬슬 야영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겔베르트의 뒤쪽에 말을 타고 따라오던 노 기사, 데론 베르켈이 대답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 푸른 방패, 정지.”
“푸른 방패에! 정지이이이!!!”
나직한 목소리로 겔베르트가 명령을 내리면 부대장 메이슨이 우렁찬 목소리로 해당 명령을 복창한다.
그와 동시에 한 몸처럼 제자리에 멈추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
평소엔 시장바닥 건달패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전에 들어갔을 땐 그 어떤 정예병보다도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이었다.
“일몰이 가까워졌다. 현 위치에서 이동을 멈추고 전원 야영 준비에 들어간다. 각자 위치로.”
“야영 준비! 각자 위치로오오오오오!!!”
다시 한번 겔베르트의 명령과 메이슨을 포함한 푸른 방패 대원들의 복명복창이 이어진다.
“자, 일단 저는 물 뜨러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데미언! 수고해라.”
“보니까 물 구하려면 좀 멀리까지 나가야 할 것 같던데... 고생해라, 막내.”
“옙,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자자, 보자... 일단 수레에 있는 짐부터 내려야지. 여기! 이쪽으로 끌고 와!”
“바람이... 크흠, 동쪽에서 부네. 이쪽이 동쪽 맞지?”
“아니지, 병신아! 해가 이쪽으로 지고 있는데! 그럼 여기가 서쪽이잖아!”
“아, 맞네. 시발, 잠깐 헷갈린 거 가지고 지랄은... 크흠, 천막은 이쪽에다 세우자. 야, 말뚝 가져와!”
“대장, 그럼 저희는 주변 순찰 시작하겠습니다! 야, 너랑 너! 빨리 따라와!”
야영지 형성을 위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
야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들의 움직임엔 경험에서 비롯된 여유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모습.
이 같은 야영 준비의 풍경은 푸른 방패가 얼마나 체계가 잘 잡힌 용병대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 중의 하나였다.
한편, 야영 준비로 한창 정신없는 푸른 방패 대원들과 달리 데론과 아드리안은 한쪽에 비켜서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의 최중요 보호 대상인 니나의 경호를 위해 야영 준비 작업에서 열외 되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예, 스승님.”
“야영을 준비하는 저들의 움직임을 잘 보고, 머릿속에 새겨라. 저게 바로 제대로 체계가 서 있는 정예군의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흐음, 그나저나 참 신기하구나. 용병들의 야영 준비 모습이 어찌 군에서 가르치는 야전의 기본 교리와 이리도 꼭 닮아 있는 것인지... 허참!”
데론의 시선 끝, 부하들과 함께 밤이슬을 막아줄 천막을 설치하는 겔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친구... 단순히 용병 바닥에서만 구른 인물이 아니야.’
그렇게, 데론에 겔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리던 차...
“저기... 스승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이냐.”
공손한 눈빛을 한 제자 아드리안이 스승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도 가서 야영 준비를 돕는 게 어떨지... 계속 작업에서 열외 되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듭니다.”
“음, 그래. 그렇게 해라. 어차피 니나 아가씨 곁엔 내가 있으니 문제 없을 것이다.”
“예, 스승님. 그럼...”
말을 마친 아드리안이 잽싸게 달려가 겔베르트와 부하들이 세우던 천막의 한쪽 끝을 잡는다.
“저도 돕겠습니다!”
“오, 진짜 막내! ‘찐막내’ 등장!”
“엥? 그게 뭔 소리야? 아드리안이 데미언보다 더 어려?”
“어, 데미언이 아드리안보다 한 살 더 많다더라.”
“그래? 그건 몰랐네... 야, 아드리안, 너는 우리 용병대 들어올 생각 없냐? 응?”
“예? 아니, 저는...”
“야, 앞길 창창한 어린 애한테 뭔 개소릴...”
“그래 인마, 베르켈 경이 저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 데 뭔 소릴 하는 거냐? 저 양반 제자를 네가 뺏겠다고?”
“어흑, 내가 지금 뭔 소릴... 야, 아드리안! 방금 내가 한 얘긴 못 들은 거로 해줘라!”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해 떨어지기 전에 천막이나 빨리 치라고! 아드리안, 그 끝에 더 평평하게 당겨! 천막 울지 않게.”
“아, 옙!!!”
왁자지껄, 아드리안이 합류한 후 좀 더 화기애애하게 변한 분위기.
한참 형님뻘인 용병들과 어울려 열심히 천막을 설치하는 어린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데론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스승인 자신이 미처 가르쳐주지 못한 세상의 많은 부분을, 저기 보이는 뜨거운 사내들 채워줄 것이다.
“우웅...”
바로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아는 데론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어웅... 할아버지, 여기 어디예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졸린 눈을 비비며 데론 곁에 세워진 작은 수레 위에서 몸을 일으킨 니나였다.
“이제 바이센 평야에 들어섰습니다. 음... 대략 하루 반나절 정도면 라이프링겐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 반나절이요? 아직도 많이 남았네요? 휴우...”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이틀이 더 남았다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니나.
그 작디작은 소녀의 얼굴에 가득 차 있는 피로를 발견한 데론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힘드실까...’
바덴하임 측의 추격을 피하려 바이펠베르크의 주도, 쾨니히슈타인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5일 전이었다.
그 5일 동안, 일행은 어떠한 도시나 마을에도 들리지 않은 채 길바닥에서 먹고 자며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야영 생활에 이골이 난 푸른 방패의 대원들과 기사인 데론, 종자 아드리안도 피로를 느낄 정도의 강행군.
그런 혹독한 일정에, 아직 어린 소녀인 니나가 느끼는 육체적 고단함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지만 니나는 초췌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이 멀리까지 계속 걸어오신 분들도 있는데, 저는 수레를 타고 편하게 왔잖아요.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죠!”
“... 아가씨.”
니나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수레를 바라보며 데론이 착잡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 수레는 쾨니히슈타인에서 마련한 것으로, 다른 짐은 일절 싣지 않고 오로지 니나를 위해서만 준비된 이동 수단이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아예 마차를 사서 이동했을 테지만, 워낙 쫓기듯 다급하게 도시를 빠져나온 터라 급하게 구한 짐수레로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짐칸에 지푸라기를 두껍게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모포를 여러 장 깔아 푹신하게 만든 짐수레.
하지만, 그래 봤자 처음부터 승용(乘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차의 쾌적함과는 비교할 바가 아닐 터였다.
“다들 저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 거 알아요. 그러니, 저도 끝까지 힘 내볼게요.”
“... 참으로 어른스러우십니다.”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칭찬뿐이어서, 데론은 치밀어 오르는 걱정을 누른 채 그렇게 말하며 니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스승님, 아가씨가 머무실 천막 설치가 끝났습니다. 일단 두 분 모두 모닥불에 몸부터 녹이시지요.”
어느새 일을 마치고 수레 옆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의 말.
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론이 수레에서 내리는 니나의 손을 잡아주려던 그때...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병력 접근 중! 전원 경계 태세에에에에!!!”
야영지 근처 언덕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엔리케의 다급한 외침.
일행 모두가 하던 일을 내려두고 서둘러 엔리케가 가리킨 쪽을 바라본다.
“... 젠장.”
이윽고 겔베르트의 입에서 짓씹듯 튀어나온 한 마디.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광활한 바이센 평야 저편에서 넘실대는 악의(惡意)로 무장한 한 떼의 인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 바이센 평야의 혈투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