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센 평야의 혈투 (5) >
니나 일행이 바이센 평야에 들어서기 사흘 전_
바이펠베르크의 주도, 쾨니히슈타인 근방에 자리한 작은 도시 로하임(Roheim).
푸드득-
“... 음?”
그 로하임 시내에 마련된 한 건물에 머물고 있던 바덴하임의 첩자 우드릭은 갑자기 창문으로 날아온 전서구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둘러 전서구의 발목에 묶여 있던 쪽지를 끌러 펼쳐보자, 낯익은 동료의 필체가 보였다.
[첫 번째 까마귀 둥지가 깨어짐, 참새는 날아갔다.]
“... 하!”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우드릭이 탄식을 토했다.
쪽지 속 ‘까마귀 둥지’란 바이펠베르크에 숨어든 바덴하임의 첩자들이 자신들이 머무는 안가(安家)를 달리 이르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까마귀 둥지’란 바이펠베르크의 주도인 쾨니히슈타인에 설치된 안가를 뜻하는 용어였고, 쪽지의 말미에 적힌 ‘참새’는 얼마 전 하달된 임무의 목표인 리트베르크의 후계자 니나 아르펜을 이르는 단어였다.
그 간단한 문장의 내용만으로도 쾨니히슈타인 쪽의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우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젠장!”
꾸깃-
손에 쥔 쪽지를 신경질적으로 구긴 우드릭.
창가에서 돌아선 그가 손에 있던 쪽지를 불이 붙은 화로에 집어 던진다.
화르륵!
불이 붙은 쪽지가 완전히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을 확인한 우드릭은 방 한쪽에 놓인 옷장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옷장의 안의 모습이 드러난다.
화려한 색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칙칙하고 허름한 모양새의 옷들만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우드릭의 옷장.
하지만 굳은 표정이 된 우드릭이 옷장 안에 걸린 옷 사이를 거칠게 헤집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작은 금고가 얼굴을 내민다.
철컹, 끼리릭-
자신의 목걸이에 걸려 있던 열쇠로 금고의 문을 열자 번쩍이는 금화와 금괴, 수북한 전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 일단 다 가져가 보자.”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재물을 있는 대로 챙긴 우드릭이 묵직해진 가죽 가방을 챙겨 들고 다급하게 문밖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로하임 시내 외곽에 자리한 길드 사무소였다.
***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는 말이 있다.
어떤 계획을 세움에 있어, 영리한 사람은 그 계획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여러 대안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황금백’ 바덴하임 백작의 지낭(智囊)으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이케 역시 그런 ‘꾀 많은 토끼’ 같은 인물이었다.
알프레트의 지휘 아래 구축된 바덴하임의 첩보망은 상대 영지의 각 도시에 근거지를 두고, 서로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도시에 전서구를 통해 연락이 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결과...
“목표, 니나 아르펜과 그 일행들은 현재 바이펠베르크 북부에 위치한 라이프링겐으로 이동 중입니다.”
“금패 용병 겔베르트와 그가 이끄는 푸른 방패 용병대 11명, 사자 기사단 출신의 기사 데론 베르켈이 적의 주 전력입니다.”
“이들이 라이프링겐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착수금은 1인당 40실버입니다. 그리고 목표인 니나 아르펜의 목을 가져오는 용병대에겐, 즉시 800골드의 의뢰 성공비를 지급하겠습니다.”
쾨니히슈타인 인근, 5개 도시의 용병 길드에 동시에 등록된 거액의 의뢰.
1인당 40실버라는 넉넉한 착수금도 대단했지만, 의뢰 완수 시 지급되는 800골드의 성공 사례비는 해당 소식을 접한 모든 용병의 눈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야, 이 새끼들아! 지금 걸을 새가 어딨어? 해 떠 있는 동안은 뛰어! 뛰라고!”
“그놈들이 라이프링겐에 들어가면 더 기회가 없어! 도시 안에서 사고 쳤다간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 칼 맞아 죽을 거야!”
“시팔, 횃불 용병대 새끼들이 어제 출발했다는 얘기 못 들었어? 더 빨리 달려 이 새끼들아!”
누구보다 먼저 의뢰에 성공해 800골드를 손에 넣겠다는 일념으로, 각기 다른 다섯 개 도시에서 출발한 수백의 용병들이 무서운 속도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저기다! 저기에 목표가 있다! 바로 들이쳐!!!”
“크하하핫!!! 800골드는 우리 꺼다아아아!!!”
“싹 다 죽여버려! 가자아아아!!!”
“우리는 어린 꼬마 년의 머리부터 노린다! 다른 새끼들은 신경 쓰지 마!”
탐욕으로 물든 용병들의 시퍼런 칼끝이, 마침내 바이센 평야에 도달했다.
***
“푸른 방패! 전원 전투 태세에에에에!!!”
겔베르트의 날이 선 외침이 울려 퍼지고, 야영지 설치에 여념이 없던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각자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 든다.
“엔리케! 몇 놈이나 되냐?”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겔베르트가 언덕 위의 엔리케에게 묻는데, 돌아오는 목소리에 절망이 어린다.
“일단 시야에 들어온 놈만 해도 족히 칠, 팔십 놈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그중 열댓 놈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고... 심지어 그 뒤로 더 몰려오는 것 같슴돠! 멀리 먼지 구름이 보입니다!”
“제길...”
엔리케의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짓씹듯 욕설을 뱉어낸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거기에 더해 이곳은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
지형의 이점에 기대어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는 전술의 묘리도 이용할 수가 없다.
“하, 좆 됐네, 이거... 카악, 퉷-!”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뱉어내기라도 하듯, 바닥에 침을 뱉어낸 겔베르트가 굳게 결심이 선 눈으로 데론을 바라본다.
“베르켈 경, 니나 아가씨를 모시고 몸을 피하십시오. 여기서 저희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습니다.”
“으음...”
본래의 성격대로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겔베르트의 제안을 물리치고 함께 싸우려 했을 데론.
하지만 지금 그는 지켜내야 할 대상인 니나와 함께였기에, 겔베르트의 말을 단칼에 물리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베르켈 경! 어서!”
“알겠네, 무운을 빌...”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린 데론이 니나와 함께 몸을 피하려던 그때,
“아니요, 저희는 도망치지 않아요! 함께 싸워요, 할아버지!”
“... 아가씨!”
앞으로 나선 니나가 굳은 결심이 선 얼굴로 말한다.
“말을 타고 있는 적들이 그렇게 많다면, 어차피 도망쳐봤자 멀리 못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한 식구잖아요! 이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거예요.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일은 없어요!”
“아가씨, 너무 위험합니다!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애끓는 데론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니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어요!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아요!”
“아가씨...!”
걱정과 답답함, 대견함이 복잡하게 뒤섞인 데론의 눈빛.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 찰나의 고민을 마친 데론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아드리안!”
“예, 스승님!”
“설령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가씨를 시켜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해내겠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더라도 아가씨의 몸에 적들의 칼이 닿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비장하게 소리치는 어린 제자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데론이 이번엔 겔베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대원들과 함께 전열을 구축하여 버텨주게. 내가 적진에 뛰어들어 난전을 유도하겠네!”
“알겠습니다, 베르켈 경!”
짧은 대화였지만, 겔베르트는 데론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겔베르트 자신과 손발이 잘 맞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니나를 중심으로 진형을 이루어 버텨내고, 강력한 무력을 지닌 데론이 상대 진형을 파고들며 공격한다.
데론의 막강한 개인 기량에 많은 부분을 기댄, 현재로선 가장 현실적인 전술이었다.
한편, 그 와중에도 적들이 일으키는 먼지구름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니...
“대장, 놈들이 사거리에 들어왔습니다! 사격 개시합니다아아아!!!”
그렇게 외친 엔리케가 적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다.
퉁! 퉁! 퉁!
험준한 버니언 산맥에서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쓰러뜨리며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른 엔리케의 활 솜씨였다.
목표를 보고 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활시위를 당기는 엔리케.
순식간에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이 각기 다른 적들의 몸통과 머리를 보기 좋게 꿰어놓는다.
“커흐윽!!!”
“시발! 저 새끼들 활을 쏜다아!!!”
“화살 조심해! 존나 잘 쏜... 꽥!!!”
“어디야? 어디서 쏘는 거야?!”
“저기, 언덕 위에... 쿠엑!”
고작 한 사람이 쏘는 활이었지만, 그 정확도와 속도가 너무나 뛰어났기에 대여섯 명의 궁수가 활을 날리는 듯한 화력이 나왔다.
“방패 있는 새끼는 방패 들어! 화살 조심하라고 이 새끼들아!”
“으으, 저 새끼 뭐야? 뭔 활을 저렇게 잘 쏴?”
“뭐야?! 저런 놈이 있다고 길드에선 말 안 했잖습니까!!!”
“떠들지 말고 대가리 숙여! 대가리 숙이라고 이 미친노... 컥!”
또 한 명, 엔리케의 화살에 목이 꿰뚫린 용병 하나가 쓰러진다.
잠깐 사이 벌써 열 명에 가까운 인원이 화살의 제물이 되자, 돈에 눈이 멀어 거침없이 달려오던 적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특히, 말을 타고 달려오던 놈들의 속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중이기에 자신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 방심하던 놈들이 대거 머리통에 화살을 꽂고 낙마하자, 나머지 인원들이 몸을 사린 탓이다.
“잘했다, 엔리케! 오십 걸음 이내에 들어올 때까지는 계속 그렇게 몰아붙여!!!”
그렇게 외친 겔베르트가 부하들에게 재차 명령을 내린다.
“빨리 움직여! 짐수레, 빨리 끌고 와!!!”
“옛!!!”
덜컹, 덜컹!!!
일행의 짐을 실어놓았던 짐수레 두 대를 가져다 앞에 세워 임시 바리케이드로 삼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저런 장애물 하나하나가 전투 시엔 큰 도움이 된다.
“백오십 걸음!!!”
언덕 위에서 들려오는 엔리케의 외침.
마치 그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한 눈빛을 한 겔베르트를 포함한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한 줄로 늘어선다.
“백 걸음!!!”
그리고, 늘어선 푸른 방패의 벽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오는 한 명의 사내.
데론 베르켈.
스르릉- 촤앙!
쾨니히슈타인에서 선물로 받은 25골드짜리 고급 등급의 검이 맑은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데론이다.
50년 가까운 수련의 세월을 증명하듯, 그의 발검(拔劍) 동작에선 한치의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는 데론.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땅의 진동이 느껴진다.
적들의 숫자가 많기에 긴장은 되지만, 두렵지는 않다.
“오십 걸음!!! 뒤로 빠집니다!!!”
탁탁탁-!!!
적들이 오십 걸음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언덕 위에서 화살을 날리던 엔리케가 부리나케 자신의 활을 챙겨 동료들의 곁으로 달려온다.
“이 개새끼드을!!!”
“이히하아아아아!!!”
“다 죽여버려! 죽여어어어!!!”
“꼬맹이 년이 저기 있다!!!”
“우리 붉은 까마귀가 가장 먼저다아아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적들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소속을 가진 적들이, 돈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아귀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파파팍!
그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를 튕기듯,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데론.
“흐아아아아아앗!!!”
나이를 잊은 듯 천둥 같은 고함을 토해내는 그의 모습을 정면에서 맞이한 적들의 얼굴에 순간 두려움의 감정이 떠올랐지만,
휘우웅- 콰지지직!!!
죽음을 피하기엔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크아악!!!”
“시발, 이거 뭔데?!”
“내 팔! 내 파아아알!!!”
“커흐윽! 끅!”
벼락처럼 떨어진 데론의 검이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오던 적들의 예봉을 꺾었다.
다급히 무기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아보려 하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슈웅, 콰직!! 푸화아아악!!!
흩날리는 핏물과 사방으로 날리는 적들의 몸뚱이.
서너 명에 달하는 베테랑 용병들의 목을 순식간에 떨어뜨린 데론이 맹수처럼 포효했다.
“이 몸이 바로 리트베르크의 데론 베르켈이다! 흐아아아아!!!”
< 바이센 평야의 혈투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