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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62화 (58/197)

< 바이센 평야의 혈투 (6) >

데론을 비롯한 푸른 방패의 동료들이 대여섯 배가 넘는 숫자의 적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그 시각.

밤새 야영지에서 쓸 물을 뜨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진 숲에 와있던 나는,

“...?!”

갑자기 감각에 걸려든 불청객들의 존재를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 둘, 셋... 뭐야, 왜 이렇게 많아?”

어렴풋이 잡아도 스무 명이 넘는 숫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스륵-

일단 손에 들고 있던 큼지막한 양철 양동이를 수풀 사이에 숨겨놓고, 근처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를 붙잡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사람 몸통보다도 훨씬 두꺼운 나무였는데, 대충 보아도 높이가 10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읏차...!”

나무 타는 요령은 별로 없었지만, 압도적인 힘을 이용하니 몸이 쭉쭉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금세 도착한 나무 꼭대기.

내 몸무게에 눌려 나무가 적잖이 휘청거렸지만, 금세 안정을 찾았다.

그사이 내 감각에 포착되었던 불청객들의 무리는 빠르게 내가 있던 숲속으로 진입했다.

꽤 멀리서부터 강행군을 이어온 것인지,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녀석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놈들은 내가 기어오른 나무 바로 옆으로 다가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으, 씨발! 힘들어 죽겠네...”

“진짜. 나 발에 물집 다 잡혔어. 존나 쓰라리다... 크으...”

“야, 그래도 좀만 참아! 그 꼬마 년만 잡으면 바로 우리 돈방석이라고!”

“그 년 잡으면 얼마 준다고 했었지? 의뢰 완수비 말이야.”

“에... 그거 오백 골드인가 그렇지 않았어?”

“어휴, 빡대가리 새끼... 야, 그걸 그새 까먹었냐? 오백이 아니라 팔백이다, 팔백!”

“야, 팔백 골드면 보자... 우리가 스물네 명이니까, 나눠 먹으면 1인당 몇 골드씩이냐?”

“어, 그... 파, 팔백 나누기 이십사하면은...”

“...”

“크흠, 큼!”

“에헴...”

왁자지껄 떠들던 놈들의 목소리가 금세 잦아든다.

배움이 짧다 못해 거의 없다시피 한 용병 놈들의 현실을 알려주는 대화였다.

“에이씨! 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고 꼬마 계집에 머리통부터 챙기고 나서 고민하자고!”

“그래 맞아!”

“근데 좀... 어린 애를 죽이려니까 좀 마음에 걸리네.”

“미친 새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지난번 의뢰 때 목표였던 그 늙은이는 아주 좋다고 배때지에 칼 쑤셔넣더니만...”

“야, 씨발. 이게 그때랑 같냐?”

“다를 건 또 뭐야? 늙은이도 네 애비가 아니고 그 꼬맹이 년도 네 딸 아니잖아? 그냥 돈 벌려고 일하는 거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아니... 그래도 애새끼는 좀 찝찝해서 그러지. 꿈에 막 나온다니까?”

발밑에서 들려오는 놈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었군.’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저들의 인생 자체까지 욕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용병의 하나였으니까.

다만...

‘우리를 건들려고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그들은 니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 전체에 위협이 될 명백한 적(敵)이었기에.

모두,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

“야 이 새끼들아, 그만 퍼질러 있어라! 휴식 끝났다! 다들 일어나!”

“아오, 대장! 뭐 얼마나 쉬었다고 벌써 일어납니까?”

“맞습니다! 최소 이십 분은 쉬어야 합니다!”

“좆 까는 소리들 하고 앉았네! 야, 이 개새끼들아! 우리가 여기서 퍼질러 앉아 있는 동안 다른 용병대 새끼들이 그 꼬마 년 모가지 따면 어쩔래? 그럼 우린 그냥 새 되는 거야!”

“쓰읍...”

대장의 윽박지르는 말을 들으며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는 용병들.

여유 있게 온다면 나흘 정도 걸릴 거리를 이틀 안에 주파한 터라 다들 극심한 피로감에 절어있는 상태였다.

“의뢰 완수비가 자그마치 팔백 골드다, 팔백 골드!!! 며칠만 더 고생하면, 아니 어쩌면 오늘만 고생하면 그 돈을 받게 될 수도 있어! 그런대로 이렇게 자빠져 있을 거냐? 어?”

하지만 그런 부하들의 상황을 알아챈 대장이 돈 얘기를 꺼내자, 늘어지던 분위기가 확 끓어올랐다.

“씨이발, 그럴 순 없지! 야, 일어나자! 가자고!”

“카악- 퉤! 그래, 함 해보자. 팔백 골드 따서 똑같이 나눠 갖고 반년 정도 푹 쉬면 되지 뭐.”

“일어나! 일어나자!”

“그래 가보자!!! 우리가 바로 최강 용병대 ‘로하임의 송곳니’다! 하하하!”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용병들이 목표에 대한 추격을 개시하려던 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익-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매가 날아드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 응?”

“에? 이제 뭔 소리...”

콰직!

어디선가 날아든 단검 한 자루가 용병대장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꽂혔다.

어찌나 세게 던진 것인지, 단검의 날 부분은 물론 검 자루의 절반 이상이 용병대장의 머리에 틀어박힐 정도였다.

“끄르륵...”

예상치도 못한 공격에 즉사한 용병대장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천천히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다.

바닥에 쓰러진 후에야 울컥거리며 진한 핏물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용병대장의 몸뚱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충격적인 상황에 용병대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뭐, 뭐야?!”

“기습이다! 기습이야!!!”

“대장이 당했다! 다들 전투 태세!”

“어디야! 어느 쪽인데?”

갑작스러운 대장의 죽음에 깜짝 놀란 용병들이 악을 쓰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든다.

“어디야? 어디냐고!”

“씨발, 안 보이는데?”

마음이 급하면 판단이 흐려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안 그래도 무성한 수풀로 인해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숲속인데, 잔뜩 흥분하다 보니 더욱 적의 움직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개새끼야! 나와! 나오라고!”

“시발! 죽여버린다아아아!”

악을 쓰며 상대를 도발해보지만, 정체불명 상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상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도발에 응답했다.

푸화악!!!

“꺼흐윽!”

별안간 목을 베인 용병 하나가 피를 뿌리며 휘청거리다 앞으로 엎어진다.

무기를 내던진 손으로 목을 틀어막아 보지만, 쏟아지는 피의 양만 봐도 죽음이 확정적인 수준이었다.

“델슨! 델스으으은!!! 이 씨바알!!!”

그가 언제 공격당했는지, 어떻게 목을 베였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이 개새끼, 암살자다! 암살자야!”

경동맥이 예리하게 베여 죽은 동료, 델슨의 시체를 살핀 다른 용병이 꽥꽥거리며 소리쳤다.

이토록 기척 없이 다가와 은밀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라면, 암살자가 분명했다.

휙- 휙- 휙-

다시 한번 들려오는 바람 소리.

저 소리가 들린 직후 자신들의 대장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 있는 용병들이 바짝 긴장하여 사방을 둘러보는데,

푹! 푹! 푹!

“꺼흑!”

“켁...!”

“끄흐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든 세 자루의 단검에 목과 이마, 심장을 꿰뚫린 용병 셋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쓰러졌다.

단검이 날아온 방향이 일정했다면 대강의 위치라도 짐작했을 텐데, 죽은 세 사람이 서 있던 장소와 단검이 날아온 각도가 제각기 달라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이 시발... 이 새끼들 한 새끼가 아니다! 여러 명이야! 여러 명!”

그렇기에, 용병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상대가 여러 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사방팔방에서 공격이 가해질 리가 없었다.

“뭉쳐! 서로 어깨를 맞대고 뭉치라고오오오!!!”

살아남은 이들 중 선임 격인 사내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고, 곧 용병들은 대여섯 명씩 뭉쳐 둥근 원형의 대형을 이뤘다.

그게, 그들의 실수였다.

휘이익- 턱!

“어엉?”

갑자기 둥근 원형의 한 가운데 떨어진 누군가의 모습에 놀란 용병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이 자식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안녕?”

기겁한 용병들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의 인사가 들리고.

휘이잉- 푸화아아아아악!!!

이어, 시뻘건 피 분수가 솟구쳤다.

***

“이제 끝났나...”

휘잉- 후드득!

나는 검을 허공에 한 차례 휘둘러 검날에 묻은 적들의 피를 털어냈다.

용병대 ‘로하임의 송곳니’ 소속 용병 스물네 명을 모두 쓰러뜨리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남짓이었다.

홀로 스무 명이 넘는 적들을 상대하는 일이었지만, 적들과 나 사이에 까마득한 격차가 존재하는 이상 어려울 것 없는 싸움이었다.

“꽤 실력 있는 놈들인 것 같았는데...”

푸른 방패 수준은 아니었어도, 어디 가서 허접하다는 소리는 절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역량이 있는 용병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받지 말아야 할 의뢰를 받았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 다음 생애는 용병 같은 거 하지 말고, 다른 일 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쓰러진 놈들에게 조의(弔意) 아닌 조의를 표한 나는 앞서 사용했던 투척용 단검과 쓸만한 물건들을 서둘러 회수한 후 숲을 벗어나 야영지 방향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런...!”

숲을 나오자마자 얼핏 보아도 칠, 팔십 명은 되어 보이는 적들이 동료들을 포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친, 왜 저렇게 적이 많아?!’

그야말로 압도적인 병력 차.

누가 봐도 우리 측에게 불리한 상황.

하지만, 놀랍게도 전투의 흐름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지 않았다.

“어떤 겁대가리 없는 놈이 이 늙은이의 검을 받아보겠느냐! 흐아아아아아!”

바로, 미쳐 날뛰는(?) 데론의 검 앞에 겁을 먹은 용병들이 돌진을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 시발! 뒤로 가 뒤로!”

“야이 개새끼야! 미, 밀지 말라고!”

휘우우웅- 푸화악!!!

“아아악! 내 팔!!!”

“끄르륵...!”

데론의 검에 팔다리가 썰리고 가슴이 갈라진 용병들 서너 명이 썩은 짚단 넘어가듯 우르르 쓰러진다.

“어흑, 나, 나! 나도 칼 맞았어...!”

“시팔, 사자 기사단 출신이라더니 진짜 존나게 잘 싸우네!”

“저 늙은이 나이가 육십에 가깝다며? 정보가 잘못된 거 아냐? 어?”

데론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주변에 있는 용병들이 혼비백산해 뒤로 물러섰다.

멋모르고 처음에 달려들었던 용병대 하나가 데론의 검에 죄다 썰려 나가는 것을 본 이후 그 같은 현상을 더욱 심해졌다.

“이 개새끼들아! 빨리 앞으로 튀어나가! 밤새도록 이 지랄 하자고? 어?”

“앞으로 튀어나가긴 개새끼야! 그럼 네가 앞으로 나가! 저 미친 늙은이가 휘두르는 칼, 네가 받아보라고!”

“어어? 지금 나한테 개새끼라고 했냐?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네가 꼬라보면 어쩔 건데? 딱 봐도 개 허접인 새끼가, 자신 있냐?”

“개지랄들 말고 앞에 가서 싸우라고! 너네는 아가리로 싸우냐?”

“아가리? 이 좆만 한 새끼야, 넌 자신 있냐? 나 은패 용병이야!”

개판이었다.

지금 니나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다섯 개 도시에서 각자 의뢰를 받고 몰려온 용병들이었다.

800골드라는 의뢰 완수비에 눈이 뒤집혀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올 만큼 사정이 궁핍한 이들.

당연히 그들 사이에 통일된 지휘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모여든 용병들 모두가 어떻게든 피해 없이 돈만 따먹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덕분에 니나 일행과 푸른 방패는 별다른 피해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됐어, 저 새끼들 병신 짓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겠어.”

한눈에 적들의 상황을 알아챈 겔베르트가 말했다.

몰려든 수십의 용병 중 그 누구도 피해를 감수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안전해져 버렸다.

“물 뜨러 갔던 데미언이 돌아오면, 바로 공세로 전환한다. 메이슨이랑 엔리케는 아드리안과 함께 아가씨를 호위하고 나머지는 그냥 돌진해서 포위망을 뚫는 거다. 알았냐?”

“예, 대장!”

그렇게, 푸른 방패의 모두가 돌격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크히이이이이이잉!!!

모두의 시선이 별안간 들려온 말의 울음소리를 쫓는다.

“말? 갑자기 왠 말?!”

“저건 또 뭐야?!”

“기마병? 아, 아니, 그보다...!”

큼지막한 말 위에 올라탄 채로 몰려 있는 용병 무리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한 사람.

어마어마한 속도의 말 위에서 능숙하게 중심을 잡는 그는 한 자루 짧은 투창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간악한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무도한 짓거리를 벌이는 것이냐!!!”

용병들에게 호통치는 그의 목소리가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는 점!

“웬 미친년이 여기 와서 행패냐! 뒤지고 싶으냐!”

큼지막한 도끼를 든 용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을 타고 있었지만 딱 봐도 체구가 작은 여자인 데다, 목소리 자체도 어린 티가 났다.

앞쪽에서 미쳐 날뛰는 늙은 기사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이쪽이 낫겠다 싶어 나선 것이다.

하지만,

휘우우우우우!!!

어느샌가 주인의 손을 떠난 투창이 용병의 지척까지 날아와 있었다.

그야말로 섬전과도 같은 속도!

“이런 미치...”

깜짝 놀란 용병이 다급히 도끼를 들어 올려 창을 쳐내려 했지만,

콰직! 푸화악-!

“꾸에엑!!!”

이미 용병의 가슴팍에 도달한 투창은 그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 땅에 박혀버렸다.

“허!”

그 탁월한 투창 실력에 데론마저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스르릉- 촤앙!!!

투창을 던져 단숨에 용병 하나를 쓰러뜨린 정체불명의 여성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며 외친다.

“나, 바이펠베르크의 아린이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정의가 이 세상에 살아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하아앗!!!”

< 바이센 평야의 혈투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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