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63화 (59/197)

< 바이센 평야의 혈투 (7) >

말을 타고 전장에 난입한 정체불명 소녀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혼란.

오랫동안 용병으로 살아오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인 겔베르트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푸른 방패 전원 돌격!”

“돌겨어어어억!!!”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각자의 무기를 치켜든 채 돌진을 개시하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

“여기가 뒤질 자리인 건 알고 찾아 왔냐, 이 새끼들아?!”

“이런 씨바...”

콰직!!!

순식간에 적에게 육박해 들어간 겔베르트의 바스타드 소드가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용병의 머리통을 단숨에 쪼개버린다.

무기를 들어 막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쾌속하고 강렬한 공격이었다.

“캬! 그래! 이 맛이지!”

쾨니히슈타인에서 강화석을 먹여 새롭게 벼린 바스타드 소드의 달라진 위력에 겔베르트가 감탄을 터트린다.

돈 들인 보람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실로 짜릿한 손맛이었다.

“하! 이런 개새끼들이... 뭣들 하냐? 쳐라!”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던 상대가 뛰쳐나온 것을 본 용병대장 하나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와아아아아!”

“다 죽여버려어!!!”

“가자! 으아아아아!!!”

대장의 명령을 듣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용병들.

그 모습을 본 용병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신 또한 전투에 가담하려 하는데...

“감히 나를 두고 딴 데로 눈을 돌리는 것이냐!”

“흐익?!”

그의 상대는 뛰쳐나오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늙은 사자였으니...

휘우우우웅!!!

노 기사의 저력을 오롯이 담은 일격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날아든다.

아무리 늙었다 한들 사자는 사자.

무섭게 날아드는 사자의 발톱엔 단번에 상대의 살가죽을 찢고 뼈를 분지를 힘이 담겨 있었다.

“이런 씨부라알!!!”

기겁한 용병대장이 왼손에 든 방패를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 직후 방패 위에 떨어지는 무지막지한 충격!

콰쾅!!!

단단한 참나무를 두 겹으로 덧대어 만든 용병대장의 방패가 일격에 부서지며 사방으로 나뭇조각을 흩날린다.

그러고도 데론의 검에 실린 힘은 남아돌아서, 방패를 들고 있던 용병대장의 손목뼈마저 부러뜨려버렸다.

“크흐윽!!!”

이십 년 가까이 용병 바닥에 있었고, 어지간한 고통엔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용병대장이었지만 뼈가 부러지는 아픔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낼 순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고통에 한쪽 무릎이 살짝 꺾이며 휘청거리는데,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뻗어진 데론의 발차기가 용병대장의 배를 걷어찼다.

“쿠에엑!!!”

울컥, 용병대장이 피를 토하며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다.

데론의 발차기엔 평범한 사람이 맞는다면 일격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으스러질 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물론 용병대장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단박에 내장이 깨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제대로 걷어차인 터라 데미지가 어마어마했다.

“이런... 씨이... 발...”

바닥에 널브러진 용병대장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어물거린다.

한 번의 칼질, 한 번의 발차기.

단 두 차례의 공격만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벅-

“허드렛일에도 쓰지 못할, 그따위 어설픈 실력으로 리트베르크의 천금을 노렸던 것이냐.”

살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용병대장을 내려다보는 데론.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 용병대장의 눈빛이 다급해진다.

“아니... 그... 사, 살려...!”

“제 실력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단호한 데론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휘이잉- 콰직!!!

***

“이거... 굳이 내가 안 끼어들어도 되겠는데?”

동료들을 돕기 위해 기를 쓰고 달리던 나는 어느새 발걸음을 천천히 늦추고 돌아가는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두 눈 가득,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완숙한 기사의 경지에 오른 데론과 겔베르트는 말할 것도 없었고, 후방에서 가해지는 엔리케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나머지 푸른 방패 대원들의 실력도 대단했다.

‘얼핏 보면 마구잡이로 개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절묘하게 옆 사람과 어깨선을 맞추며 전진하고 있는 푸른 방패의 사내들.

이토록 치열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동료들과 간격, 전열을 유지하며 적을 밀어붙이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오랜 경험으로 빚어낸, 집단 전투의 정수(精髓)를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었다.

‘다들, 확실히 성장했어.’

길 가다 만난 도적 떼 몇 놈, 들짐승 몇 마리를 상대로 설렁설렁 싸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변화.

하지만 지금처럼 아군의 몇 배나 되는 적들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는 걸 지켜보니 확실해졌다.

원작과 달리 ‘일찍 죽지 않은’ 푸른 방패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상대의 실력도 만만치는 않아. 심지어 쪽수는 훨씬 많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적들은 각각의 소속이 다른 자들이 모여 이뤄진 불안정한 연합군의 형태였다.

그럼, 무슨 문제가 생길까?

“아악! 이 시발새끼가 지금 날 찔렀어! 내 팔! 피 존나 나오잖아!”

“뭐야 이 개새끼들! 배신이냐? 배신한 거야?”

“아니, 이런 병신아! 내가 칼질하는데 그 앞으로 네가 껴든 거 아냐! 여기서 배신이 왜 나와!”

“크허억! 어흐윽...”

“이런 미친놈이... 갑자기 넌 왜 자빠지는데?”

“저, 저 씹새끼가 내 다리를 걸었다고, 씨발! 아흐...”

“내가 언제 다리를 걸었다고 그래? 네가 부딪쳐서 자빠진 거지!”

“야이, 돌대가리 새끼들아! 다들 한꺼번에 공격을 하라고! 쪽수 많으면 그 장점을 이용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좆까, 병신아! 넌 뭔데 명령질이야? 나 알아?”

“이런 씨발놈이? 딱 봐도 내가 선배인데 어디서!”

... 대강 이런 식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동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뒤엉켜 싸우는 상황.

손발이 맞지 않고 그저 머릿수만 많을 뿐이니, 서로에게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저 녀석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나의 시선이 돌진하는 푸른 방패의 반대편, 우리를 잡으러 몰려온 용병들의 뒤통수를 매섭게 찌르고 있는 정체불명의 원군에게로 향한다.

스스로를 ‘바이펠베르크의 아린’이라 칭하며 달려든 소녀.

몇 살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소녀의 나이가 갓 성년이 되었거나 그즈음일 것이란 추측을 하게 만든다.

‘딱 봐도 키는 커 보이고...’

말 위에 올라탄 상태라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전체적으로 늘씬한 느낌이 드는 몸을 지닌 소녀였다.

길게 쭉쭉 뻗은 팔다리로 막힘 없이 펼쳐내는 검술이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심지어 말을 타고서 저렇게 잘 싸우다니...’

말 위에서 저토록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소녀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야, 다들 저년부터 죽여!”

“활! 활 가진 놈 없냐?”

“어흐윽! 일단 말에서 끌어내리라고 병신들아!!!”

“이 시발...!”

촤아아악! 푸확! 콰지직!

소녀를 태운 말이 달릴 때마다 그 주변에 피 분수가 솟구친다.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검을 휘둘러 만들어내는 장쾌한 돌파.

말을 몰고 마냥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방향전환과 도약까지 해내며 쉬지 않고 적을 격살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인마일체(人馬一體)’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도록 만들었다.

‘... 어마어마하네.’

보는 이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대단한 기예(技藝).

저 정도로 수준 높은 마상 검술을 펼치는 이를 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지난 브렌도르프 전쟁 당시 벨가르트 측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기사 요한 브란트와 비슷한 수준이랄까?

소녀의 나이가 요한 브란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실력이었다.

‘물론 그때 그 녀석에 비해선 경험도 적고 힘도 부족해 보이지만...’

펼쳐내는 검술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눈앞의 소녀가 훨씬 더 수준이 높아 보였다.

‘... 그럴 수밖에 없지. 아예 가지고 태어난 재능의 레벨이 다른데.’

맹렬한 기세로 전장을 휩쓰는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것은, 잘 아는 이를 만났을 때 지을 수 있는 반가움의 미소였다.

정체불명의 소녀, 바이펠베르크의 아린.

갈색 가죽 투구 밖으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진한 흑색의 단발머리 아래, 소녀의 푸르른 눈동자가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바이펠베르크 주도(主都) 쾨니히슈타인, 영주성_

“지금쯤이면 슬슬 황금백의 돈을 받아먹는 용병 놈들이 리트베르크의 꼬맹이를 따라붙었겠군요. 바이센 평야 초입쯤 갔으려나...”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결재 서류들을 하나씩 처리하며 지나가듯 말을 꺼내는 젊은 사내.

바이펠베르크 백작 대리, 자작(子爵) 로이스 그뢰네마이어.

그는 왕도에서 왕실근위대장의 직무를 수행 중인 아버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를 대신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섭정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예,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 니나 아르펜 일행의 이동 속도와 추격하는 용병대의 이동 속도 차이를 고려하면 지금쯤 맞닥뜨렸겠군요.”

“흐음, 결과는요?”

로이스가 앉아 있는 집무실 책상 옆, 마치 한 자루 잘 벼려낸 검을 보는 듯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서 있던 중년 사내가 그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한다.

“당연히, 니나 아르펜 일행이 이길 겁니다. 변수가 없다면요.”

“호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역시 일전에 말씀하신 그 친구 때문입니까?”

“예.”

“흐음...”

잠시 보던 서류에서 눈을 뗀 로이스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한 중년 사내, 외르크 라인홀트를 바라보았다.

“하긴,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친구라 했으니...”

“맞습니다. 돈 몇 푼에 움직이는 엉덩이 가벼운 자들로는 절대 그 어린 친구를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하하, 라인홀트 경께서 누굴 그리 칭찬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아버지 디트리히에게서 물려받은 푸르른 벽안(碧眼)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분 좋게 웃는 로이스.

그렇게, 외르크와의 짧은 대화를 마친 그가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하려던 차...

콰당!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다급하게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자, 자작님! 큰일 났습니다!”

로이스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뢰네마이어 가문의 집사장.

공적으로 영주성의 대소사를 모두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이었고, 사적으로는 로이스를 비롯한 백작의 자녀들에게 삼촌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집사장이,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당황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집사장...? 아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집사장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확인하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로이스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곧장 나왔다.

“아, 아가씨가... 넷째 아가씨가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집사장의 말을 들은 로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한참 전에 에셀바흐로 성지(聖地) 순례를 떠난 녀석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일주일 전, 에셀바흐로 향하는 길 중간 야영지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뭐라, 일주일? 그걸 왜 지금에야 보고하는 겁니까!”

“아가씨를 호위했던 병력에 전서구가 없어 보고가 늦었다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 근처 도시로 향해 전서구를 구해 연락을 보냈고, 이제야 소식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하아...”

털썩-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은 로이스.

“... 오, 주 아르닌이시여!”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막내 여동생의 기행(奇行) 소식에 지친 로이스가 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

“그래서, 우리 일행에 끼워달라고?”

“예, 왜요? 안 돼요?”

“아니, 그게... 우리가 무슨 성지 순례객 행렬도 아니고...”

곤란한 표정으로 진땀을 흘리는 겔베르트.

어찌 된 영문인지, 니나의 목숨을 노린 적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던 한 시간 전보다 더욱 힘들어하는 얼굴이었다.

“하! 아까 싸울 때 내가 엄청 도와줬잖아요, 나쁜 놈들 물리치는 거! 그래도 안 된다고요?”

“아, 그건 고맙지. 확실히! 엄청나게 고마운데... 그거랑 이거랑 바로 연결지을 수가 없는 게, 우리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모르긴 뭘 몰라요! 아까 말했잖아요! 바이펠베르크의 아린!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여행하는 미모의 소녀 기사!”

“푸훗!”

“큭!”

“푸흐흐흐...!”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소녀의 모습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진다.

“뭐야, 왜 웃어요? 지금 웃은 사람들 얼굴 내가 다 봤어. 아저씨들, 이따 나랑 한판 붙어요.”

“... 히끅!”

한판 붙자는 소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던 푸른 방패 대원들이 모두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돌린다.

동화에서나 볼법한 대사를 뻔뻔하게 늘어놓고 있는 저 소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검술 실력을 지녔는지 여기 모인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앳된 얼굴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강한 실력.

어지간한 얼치기 기사 따위는 칼질 몇 번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지닌 소녀였다.

“혹시 아저씨들 따라가려면 돈 내야 해요? 그럼 돈 줄게요. 나 거지 아니예요.”

“하아... 이게 돈 내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소녀 아린을 상대로 겔베르트가 하소연하듯 대답한다.

바로 그때,

“어이, 꼬맹이.”

“...?”

그런 겔베르트를 구원해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게 말해서 뭐하냐? 입만 아프지. 그러지 말고 나랑 대련 한판 하자. 만약 네가 나를 이기면 우리 일행에 끼워줄게. 어때, 한번 해볼래?”

“... 하!”

뜻밖의 제안에 코웃음을 치는 소녀, 아린.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금발 소년, 데미언의 녹색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

< 바이센 평야의 혈투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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