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65화 (61/197)

< 네 번째 히든 피스 (2) >

왕도(王都) 카를리온.

펠리노어 왕국의 시조, ‘건국왕(建國王) 카를 1세’의 이름에서 유래된 왕국의 수도.

‘왕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도시답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카를리온이었다.

특유의 그 대단한 규모로 일행 모두를 놀라게 했던 남부 최대의 군사도시 쾨니히슈타인만큼은 아니었지만, 카를리온의 성벽 역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장대한 크기를 지녔다.

일행 모두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카를리온의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와... 저게 카를리온이구나.”

“확실히 크네. 쾨니히슈타인 정도 되는 건가?”

“아니야, 쾨니히슈타인 성벽이 더 높았어. 근데 도시 규모 자체는 카를리온이 훨씬 큰 듯?”

“확실히 때깔이 좀 다르긴 하다. 쾨니히슈타인은 군사도시라서 그런지 분위기 자체가 좀 칙칙해 보이고 그랬는데, 카를리온은 성벽부터 느낌이 화사하네.”

말 그대로였다.

잿빛의 칙칙한 색감만이 감돌던 쾨니히슈타인의 성벽과 달리 카를리온의 성벽은 화려한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이곳저곳에서 나부끼며 도시의 첫 느낌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었다.

“성문도 무진장 크다! 저렇게 큰 걸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도르래가 문짝마다 한 대여섯 개는 달려 있겠는데?”

“그러게. 문 개폐 담당하는 병사들 진짜 빡세겠다.”

“어휴, 별걸 다 걱정한다. 야, 이 새끼들아. 너네가 그걸 왜 신경 쓰는 건데?”

왁자지껄 떠드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히 웅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도시 카를리온의 성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크긴 크네.”

카를리온의 성문은 마차 두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될 만큼 넓은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널찍한 성문의 크기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던 엔리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겔베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근데... 저기요, 대장.”

“뭐? 왜?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참나, 이제 그냥 말만 걸었는데도 시빕니까?”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제대로 한번 시비 털어볼까?”

주먹을 치켜들며 괜한 으름장을 놓는 겔베르트에게, 엔리케가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다급하게 대답한다.

“에헤이! 또 이런다, 또! 뭔 얘기만 하면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듭니까? 짐승도 아니고...”

“뭐? 짐승?”

“크흠! 그게 아니라...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천천히 좀 들어봐요, 좀. 내가 질문이 있어서 그래요. 대장님의 높은 식견과 남다른 경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높은 식견과 남다른 경험... 하하! 그래, 내가 그런 게 좀 있긴 하지.”

푸른 방패 공식 ‘덤앤더머’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저 성문 말입니다, 보기에는 널찍하고 멋있긴 한데... 전투 할 때는 엄청 불리한 거 아닙니까? 아니, 성문이 저렇게 넓으면 여닫을 때도 엄청 오래 걸릴 거고, 기본적으로 문짝이 아무리 튼튼해봤자 성벽보다 튼튼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엔리케는 나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 질문을 들은 겔베르트의 얼굴엔 한심하다는 표정만이 가득했다.

“... 너, 저 동네를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에? 아니... 카를리온이잖아요.”

“그래, 카를리온. 펠리노어 왕국의 심장부이자 국왕 폐하가 계신 곳이지.”

“...?”

영 감을 잡지 못하는 듯한 엔리케의 표정을 보며 겔베르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 있던 데론이 껄껄 웃으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허허, 카를리온의 저 넓은 성문은 왕국의 심장부를 자처하는 도시로서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거라네.”

“자신감... 이요?”

“그렇지. 어떤 적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아...!”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엔리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보인 데론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는가? 이곳 카를리온에는 국왕 폐하의 명을 따르는 용맹한 사자(獅子)들이 산다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도 그중의 하나였고 말이야. 허허허!”

펠리노어의 국왕을 따르는 용맹한 사자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다.

사자기사단(獅子騎士團).

그들은 왕국의 주인인 국왕의 명령만을 따르는 친위대(親衛隊)이자, 왕국의 3대 기사단 중 하나였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친위대답게 군마와 무기, 갑옷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지원들 받는 그들.

데론 베르켈은 바로 그 사자기사단 출신의 기사였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감회가 남다른 얼굴을 한 채 가까워지는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옛 생각이 나는군. 허허헛! 자, 들어가세나. ‘사자의 고향’으로!”

***

왕국 북서부 끄트머리에 자리한 영지 다닐렌츠.

그곳에 가기 위해 꼭 카를리온을 지나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굳이 카를리온을 들렀다 가는 길을 택했다.

왜?

“자, 그럼 다녀오겠네. 잘들 쉬고 계시게나.”

“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베르켈 경.”

우리 일행은 니나, 아드리안과 함께 숙소를 나서는 데론을 배웅해주었다.

젊은 시절 사자기사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기사 데론.

그 당시 연을 맺었고, 최근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던 여러 인맥이 왕도 곳곳에 포진해있었다.

그 중엔 귀족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으며, 왕국의 각 기관에서 일하는 고위 관리들도 있었다.

데론은 니나와 함께 그들을 만나 바덴하임의 리트베르크 침공이 불법적이고, 매우 부당한 명분 아래 이뤄진 것임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물론,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황금백의 인맥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천천히 멀어지는 니나와 데론, 아드리안의 모습을 숙소 창문 너머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말을 걸어왔다.

“크흠, 데미언.”

“예? 왜요.”

“너, 카를리온 오면 어디 갈 데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 예. 안 그래도 슬슬 나가려던 참이에요.”

“엥? 막내 너 어디 가는데? 나도 데려가!”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엔리케가 다짜고짜 합류를 청했고, 그 모습을 본 겔베르트가 핀잔을 주었다.

“이 새끼는 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따라간다고 하네? 어휴, 하여간...”

하지만 그런 겔베르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전혀 타격받지 않는 엔리케였다.

“뭐, 막내가 가는 곳이니 뭔진 몰라도 좋은 일로 나가는 거겠죠.”

“아주 뭐 믿음이 대단하시네. 누가 보면 네가 얘보다 동생인 줄 알겠다?”

“아, 나보다 돈 많고 싸움 잘하면 형이죠. 그래, 말 나온 김에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야겠다. 형! 데미언 형! 흐흐흐!”

특유의 부러진 앞니를 보이며 내게 실실 웃음 짓는 엔리케였다.

“아니요, 사양할게요. 나보다 명백히 늙어 보이고 늘 술독에 빠져 사는 동생은 싫습니다.”

“아이, 우리 사이에 그렇게 정 없이 얘기할 거야?”

“예, 우리 사이에 그래도 됩니다. 아무튼, 대장. 저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잘 다녀와라. 너무 늦게 오지는 말고.”

대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서 숙소를 나오는데, 겔베르트에게 질문을 던지는 엔리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막내 어디 가는 건데요?”

“왕립사관학교 앞에 있는 석상 구경하러 간다더라.”

“석상? 뭔 석상이요?”

“궁금하면 네가 따라가 보던가 이 새끼야아!!!”

결국, 큰 소리를 내지르고 마는 겔베르트였다.

***

‘사자심왕(獅子心王)’ 카델린 아치(Cadelin Archie von Felline).

그는 펠리노어 왕국의 5대 군주로, 왕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적 성취를 거둔 왕으로 추앙받는다.

그의 등장 이전까진 포나우 강 이북 지역에 머물렀던 펠리노어 왕국.

하지만 카델린의 치세 동안 펠리노어 왕국은 포나우 강 이남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고, 바이센 평야의 대부분을 점유하며 이후 막대한 경제적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카델린은 ‘실로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끝 모를 힘을 지닌 천하장사’였다고 전해진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어도 꿈쩍하지 않던 바윗돌을 뿌리째 뽑아 집어던지고, 화가 나면 맨손으로 벽을 때려 부술 정도의 괴력을 지녔던 카델린.

특유의 타고난 괴력이 성격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 카델린은 ‘폭급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을 지니게 되었고, 가족, 신하를 포함한 주변인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다만, 국왕이 아닌 군인으로서의 카델린은 완전히 상반되는 평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명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언제나 관대하고 이해심 많은 훌륭한 지휘관이었으며, 전장에 나섰을 때는 그 누구보다 용맹했던 위대한 전사였다.

왕국 역사상 가장 ‘강했던’ 왕이자 위대한 군인이었던 카델린 아치.

커다란 전마(戰馬)에 올라탄 채로 위풍당당하게 검을 치켜든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거대한 석상 앞에서, 나는 한 노인의 이야길 듣고 있었다.

“... 하여, 사자심왕께선 늘 군사학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네.”

“아, 예에.”

“어떻게 하면 전투에서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병사들을 더 용맹하게 길러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시다 결국 그 고민을 해결해 줄 방편의 하나로서 이곳을 세우신 게야. 허허헛!”

왕국의 군주이자 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남다른 식견을 지녔던 카델린은 군사학에 관련된 전문 교육기관을 만들어 장차 왕국군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을 길러내고자 했다.

그 결과 세워진 것이 바로 왕도 카를리온의 북동부 도심에 자리한 펠리노어 왕립사관학교였다.

“이곳 사관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지난 수백 년간 왕국 곳곳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네.”

“음...”

“그야말로 왕국의 기틀을 다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었던 게지. 참으로... 참으로 대단하시지 않은가? 카델린 국왕 폐하 말이야.”

“아, 예. 그렇죠.”

“어찌 그 당시에 이토록 먼 미래의 일까지 예견하시고 사관학교를 세우신 것인지... 허허헛!”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벌써 20분째 내게 왕립사관학교의 대단함과 카델린 아치의 위대함에 대하여 설명 중인 노인이었다.

이 할아버지... 대체 뭐야?

“하하, 저기 어르신...”

“응? 뭔가?”

이대로 놔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난 실례를 무릅쓰고 노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죄송하지만, 어르신께서도 이곳 사관학교 출신이신가요?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빙긋 미소를 지은 노인이 껄껄 웃으며 답한다.

“허허허! 사관학교 출신은 아니고... 요 앞에서 작은 여관과 식당을 운영하는 늙은이일세. 무려 4대째 이어온 가업이지. 지금은 내 아들이 맡아서 운영 중이라네.”

“예? 식당이요?”

“그래, 식당. 우리 가게에서 파는 게 다 맛있지만, 특히 소세지가 일품이야. 사관학교 출신이라면 우리 가게 소세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네! 사관학교 교수와 교관들도 자주 회식을 하는 카를리온 최고의 맛집이지. 읏차!”

스윽, 품속에 들어갔다 나온 노인의 손에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들려 있다.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받게나.”

“뭡니까, 이게?”

“우리 식당 할인권일세. 그걸 내면,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준다네.”

“...”

“구경 잘 하다가, 출출해지면 들리시게. 허허! 난 그럼 장사 준비를 해야해서 이만...”

휘적휘적 멀어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장사 잘하시네.”

적잖은 나이에도 저토록 열정적으로 가게 홍보에 힘쓰시다니.

시간 날 때 한번 들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천천히 눈앞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국왕의 모습을 조각한 석상이었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실력을 지닌 조각가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 때문인지 카델린의 석상은 돌을 깎아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만큼 섬세하게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쪽... 아닌가? 이쪽인가?”

하지만 난 카델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혹은 그의 갑옷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의 관심은 오직 하나뿐.

석상 오른손에 쥐어진 검이 가리키는 방향.

멀리, 도심 내부의 치안 상황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작은 감시탑이 보였다.

“... 저긴가.”

바로 저곳에,

내가 챙겨야 할 네 번째 히든 피스, ‘카델린의 아뮬렛’이 있다.

< 네 번째 히든 피스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