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번째 히든 피스 (3) >
[... 카델린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그는 왕도 카를리온 근교의 숲으로 몬스터 사냥을 나섰다.
예로부터 몬스터 사냥은 귀족의 명예와 용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졌다.
하여 카델린은 장차 왕위를 물려받게 될 왕국의 ‘국본(國本)’으로서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사냥에 나섰다.
날 때부터 남다른 괴력을 지니고 있었던 왕자 카델린.
그는 스스로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가려 뽑은 몇 명의 기사만을 경호 인력으로 대동하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숲속에서, 왕자를 암살하기 위해 들이닥친 백여 명의 반란군과 맞닥뜨린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 그를 경호하던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결국 홀로 남게 된 카델린.
반면, 남아있는 반란군의 수는 무려 마흔일곱이나 되었다.
허나 그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그는 장차 수백여 년간 왕국의 전설로 길이 남게 될 장면을 만들어낸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국 살아서 숲을 빠져나온 것이다.
심지어 전투 막바지엔 가지고 있던 검까지 부러진 상태에서 맨손으로 적들을 때려죽이는 가공할 무위(武威)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뒤늦게 반란군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달려온 왕국군에 의해 구출된 카델린.
그는 어찌 홀로 싸워 그 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살아나올 수 있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아무리 많은 적들과 싸운다 한들 사자의 심장은 지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고, 바로 여기서 ‘사자심왕(獅子心王)’이라는 그의 칭호가 유래되었다.
한편, 전투 당시 카델린은 은으로 만들어진 사슬에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매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때려죽인 적들의 피로 물들어 다이아몬드의 색이 붉게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목걸이는 ‘카델린의 아뮬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왕가의 보물 취급을 받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고...
- 펠린느 왕가(王家) 인물열전(人物列傳)에서 발췌 ]
***
카델린의 석상이 가리키는 방향 끝에는 카를리온의 주거 단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해 굶는 것이 일상인 빈민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정도의 살림살이를 지닌 이들이 거주하는 곳.
그 주거 단지 한 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건물이, 바로 나의 목적지였다.
“아이고, 엄청 낡았네...”
가까이 다가가 살핀 건물은 멀리서 보이는 것 이상의 오랜 세월을 품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건물보다 조금 더 높은, 약 3층 높이로 지어진 정체불명의 건물.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섞어 전형적인 왕국 양식으로 쌓아 올린 건물의 외관을 천천히 살피며, 나는 출입문이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 안에는 아무도 없고.”
아직 건물 안쪽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었지만, 넓게 펼쳐져 주변 일대를 장악 중인 검성(劍聖)의 감각 덕분에 나는 건물 안에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뭐지? 폐건물인가?”
그렇게, 건물의 외관을 살피던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려 출입문의 문고리를 잡던 그 순간,
“어이, 이보시오. 젊은 청년! 거기 들어가려는 거요?”
“...?”
길을 가던 행인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너저분한 수염을 지닌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뭐 하는 건물인가 궁금해서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으흠... 딱 보아하니 외지인이네. 맞지?”
“예, 맞습니다.”
“그래, 그러니 그 건물에 대해 모르는 게지... 그거, 원래 경비대가 쓰던 감시탑인데, 안 쓴지 몇 달 됐어.”
“감시탑이요?”
“그래, 감시탑. 경비대원들이 머물면서 동네에 뭔 일 있나 살피던 건물인데... 몇 달 전부터 갑자기 우리 동네 치안 관리하던 인력을 줄였지 뭐가?”
“음...”
“그래서 그때부터 주인 없는 건물이 된 거지. 시팔! 돈 없이 사는 놈들은 도둑질당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거야 뭐야? 에이, 카악~ 퉤!”
말하던 와중에 성질이 끓어올랐던 것인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씩씩대는 그였다.
“뭐, 암튼. 그래서 이제 주인 없는 건물이 됐는데... 큼! 그래도 조심하게나.”
“조심... 이요? 왜요?”
버려진 건물인데 왜 조심하라는 거지?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은, 금세 돌아왔다.
“그게... 여기가 버려진 건물인 게 알려진 다음에 동네 불량배 놈들이 몰려와서 지네들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것 같더라고.”
“아...”
난 또 뭐라고.
‘...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줄 알았지.’
아무리 내가 상급 기사의 실력을 갖춘 강자라고 할지라도 귀신은 좀 무서웠다.
‘검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귀신은 벨 수 없는 거니까... 크흠!’
하지만 불량배 따위야 몇십 명이 몰려오든 문제 될 게 없었다.
한편, 내 반응이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해 보였던 탓일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온 아저씨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말한 그놈들, 보통 불량배 놈들이 아녀. 내가 듣자 하니, 도둑 길드 쪽에도 연줄이 좀 있는 것 같던데? 진짜 조심해야 해!”
“아, 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감사했다.
처음 본 외지인이 괜한 해코지를 당할까 봐 마음을 써준 것 자체가 보기 드문 친절이기에, 순수하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제가 딱히 드릴 건 없고 이거라도 가지시겠어요? 감사의 표시입니다.”
“으응? 이게 무슨...”
내가 아저씨에게 건넨 것은, 아까 카델린 석상 앞에서 만난 노인이 선물로 준 식당 할인권이었는데...
“헛! 이, 이거 ‘헬무트의 식탁’ 할인권이잖아! 오! 정말 고맙네, 고마워!”
“예? 어, 예...”
생각보다 너무나 좋아하는 아저씨.
예상과 달리, 그 노인의 가게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유명한 곳이었나 보다.
***
끼이익-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경첩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감시탑 내부로 들어섰다.
원래는 잠겨 있던 문인데, 그냥 힘으로 문고리를 잡아 뽑아버린 후 문을 열었다.
“어차피 버려진 건물이라고 했으니까... 흠흠!”
문고리 부쉈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뚜벅- 뚜벅-
건물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발 닿는 곳마다 작게 먼지가 일었다.
차가운 한겨울의 냉기가 감도는 방 안.
발로 살짝만 걷어차도 부서질 듯한 낡은 나무 탁자와 의자 서너 개가 놓여 있고, 한쪽엔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벽난로가 자리 잡고 있다.
“흠, 술병이라...”
탁자 위엔 술병과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가 올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아저씨가 말한 불량배들이 남긴 흔적 같았다.
“여기선 딱히 볼 게 없고...”
휙,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방 안 탐색을 마친 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나무로 짠 틀에 천을 얹어 만든 간이침대가 두 개, 큼지막한 옷장과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경비대가 감시탑 건물을 사용하던 당시 침실로 쓰던 곳인 듯했다.
“여기도 아니고...”
다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감시탑의 3층.
“비었네.”
3층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흐음...”
주의 깊게 살펴본 나무 바닥엔 여기저기 긁히고 찍힌 자국이 나 있었다.
마치 칼이나 창 같은 뾰족한 금속제 무기를 떨어뜨렸을 때 생긴 듯한...
“무기? 무기... 아!”
대충 짐작이 간다.
“여기, 무기고였네.”
2층에서 쉬던 경비대 병사들이 감시탑 옥상으로 올라가 근무를 서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챙기는 곳.
바닥에 새겨진 상처들은 병사들이 무기를 챙기다가 떨어뜨려 생긴 흔적일 것이다.
“아래층 물건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여기 있던 것만 싹 가져갔구만.”
이해는 간다.
2층에 놓여 있는 싸구려 간이침대와 옷장 따위는 버리고 가도 그만이지만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무기와 갑옷은 버리고 갈 수가 없었겠지.
“하기야, 경비대 병사들도 무기는 사비로 좋은 거 사서 다닐 테니까... 잘 챙겨야겠지.”
어디서나 고달픈 공무원(?)의 삶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나는 옥상으로 향했다.
삐걱삐걱-
걸음마다 비명을 내뱉는 낡은 나무 계단의 끝,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보인다.
철컹-
다행히도 이번엔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굳이 문고리를 잡아뽑을 필요가 없었다.
“흠...”
그렇게 도착한 감시탑의 옥상.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이 빙 둘러쳐져 있고, 1층에 만들어진 벽난로에서부터 이어진 굴뚝이 솟아 있다.
“어... 저기 있네.”
난간을 잡고 멀리 보이는 카델린의 석상을 향해 시선을 맞췄다.
석상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 끝이 정확히 내가 있는 감시탑을, 아니...
정확히 말해, 옥상 한쪽에 솟아 있는 굴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석상으로부터 이곳 감시탑은 꽤 먼 거리였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시야를 지닌 나에겐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명확하게 느껴질 뿐이다.
“후우! 이거, 안에 있는 물건 안 다치게 칼질 잘 해야 하는데...”
스르릉-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허리춤에서 천천히 뽑혀 나오는 검.
그리고,
휘우우웅- 카아앙!!!
평범한 이들의 눈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휘둘러진 내 검에 일순간 불꽃이 튀어 오르고,
크르르릉- 콰앙!!!
마치 무른 나무토막을 썰어내듯, 깔끔하게 사선으로 베인 굴뚝의 윗부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옥상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이곳입니다, 형님.”
“음.”
앞선 몇몇 사내의 호위를 받으며 버려진 경비대 감시탑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
그는 각진 턱에 짧게 자른 머리,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떡 벌어진 어깨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한눈에 봐도 힘깨나 쓰는 인상을 지닌 그의 이름은 에곤.
왕도 카를리온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도둑 길드의 중간 간부였다.
그렇다고 길드장과 말을 섞을 정도의 고위 간부인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할당받은 구역의 사업과 조직원을 관리하는 행동대장 정도의 위치였다.
요 며칠 그는 길드에서 이런저런 목적으로 사용할 건물을 찾고 있었는데, 버려진 건물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확인하러 나온 길이었다.
“이게 원래 경비대에서 쓰던 건물이랬지? 지금은 관심 끈 건물이고. 맞아?”
“예! 제가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경비대가 안 쓴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난 건물입니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 만에 하나 경비대가 다시 이 건물 쓰겠다고 나와서 일 꼬이면, 그때 너는 내 손에 죽는 거야. 알지?”
말을 마친 에곤이 큼지막한 자신의 주먹을 슬쩍 들어 올리며 불량배를 위협했다.
그에게 ‘무쇠 주먹’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바로 그 주먹이었다.
그야말로 쇠망치 같은 에곤의 주먹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본 불량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다급하게 대답한다.
“절대, 절대로 돌아올 일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제가 이리저리 줄을 대서 알아봤는데, 적어도 몇 년간은 이 건물 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게... 반년 전에 새로 취임한 구역 경비대장이 아주 돈 욕심에 눈이 벌건 놈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담당하는 구역의 경비대 인력을 확 줄이고, 거기서 줄인 예산을 제 뒷주머니로 챙긴다고... 해서 적어도 그 자식이 구역 경비대장으로 일하는 동안은 이 건물에 오는 놈이 없을 겁니다.”
“허, 우리 길드로 와야 할 놈이 직업을 잘못 찾았네.”
“예. 마, 맞습니다. 하하하하!”
에곤의 농담에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
그들은 모두 이 동네에서 깝죽거리며 돌아다니는 나이 어린 불량배들로, 도둑 길드의 정식 조직원이 되길 희망하는 이들이었다.
“그래, 건물 안쪽 좀 보자.”
“옙,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 엉?”
에곤을 안내해 감시탑의 출입문 쪽으로 향하던 불량배 하나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그들이 매일 밤 들락거리던 감시탑 1층의 출입문 손잡이가 부서져 있었다.
“아니, 이게 왜...”
“문고리가 아예 통째로 뽑혔네?”
“시발! 어떤 새끼가 여길...!”
“옆 동네 카메르 그 돼지 새끼 아닙니까? 여기 엄청 탐냈잖아요?”
등 뒤에 버티고 선 에곤 때문에 더욱 당황한 것인지, 불량배들이 저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로 그때,
번쩍!
해질 시간이 되어 어둑해지던 주변을 일순간 밝게 비추는 정체불명의 빛이 발생했다.
“어엉? 뭐야? 갑자기 무슨...”
“나만 본 거 아니지? 지금 뭔가 번쩍했잖아?!”
“나, 나도 봤어! 분명히 주변이 확 밝아졌었는데...”
“귀, 귀신인가?”
“시발, 일주일 내내 아무도 안 왔었는데...”
알 수 없는 현상에 허둥거리며 멍청한 소리만 늘어놓는 불량배들.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에곤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이... 건물 위, 옥상이다. 누군가 거기에 있다.”
“예? 거, 건물 위 말입니까?”
“그래. 아마도 그 새끼가 이 문고리를 잡아 뜯은 놈이겠지.”
잔뜩 인상 쓴 얼굴로 감시탑 옥상 쪽을 노려보던 에곤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서 있던 불량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빨리 튀어 올라가서 확인해봐 이 새끼들아!”
“어, 옙!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우, 움직여! 빨리 가자!”
에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도둑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여섯 명의 불량배들이 다급하게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 네 번째 히든 피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