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70화 (66/197)

< 구출 (3) >

노먼은 자신이 있었다.

사자기사단 현역 시절 그가 많이 동경하고, 의지했던 형님이자 그 자체로 위대한 기사였던 데론 베르켈.

하지만 이제 그도 나이가 들어 오십 대 후반, 인생의 황혼을 향해가는 나이였다.

현직에서 물러나 멀리 왕국 남쪽에 자리한 리트베르크 영지로 군무관으로 부임했던 데론.

말을 타는 시간보다 책상 앞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는 과거의 날카로웠던 기세를 찾기 힘든,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도 훈련받은 병사 수십 명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저력을 품고 있을 테지만...

‘... 형님이 한창 날아다니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해 볼 만하지.’

노먼 자신이 홀로 데론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늘 저택에 상주 중인 십수 명의 경비병들과 가까이 두고 부리는 기사 여럿이 있었다.

거기에, 최측근인 귄터를 보내 소집한 왕도 방위군 7연대 소속의 중대급 병력이 저택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귄터 녀석을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쯤 거의 도착했을 거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싸우지 않고도 데론의 손에서 검을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커허억!!!”

“켁!”

“끄헉!”

“크헤엑!”

와장창창! 콰앙! 쾅!

자신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네 명의 부하 기사들이 순식간에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검을 뽑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밀어닥친 상대의 공격.

단단히 갖춰 입은 기사의 갑주로도 감히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 자신만만했던 노먼의 부하들을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응접실 이곳저곳에 처박아 버렸다.

“이, 이게 무슨...?!”

노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단 눈으로 보고도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데론과 함께 나타난 정체불명의 금발 사내.

옆에 선 데론과 뭐라고 몇 마디를 나눈 직후 갑자기 사라졌던(그렇게 보일 정도로 빨랐다!) 그는 ‘엇’하는 순간 노먼의 부하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노먼 슬레작. 베르켈 경과 함께 사자의 깃발 아래서 싸웠다지.”

“...?!”

“기사단 출신이니 더 잘 알겠군. 개인의 영달을 위해 옛 전우를 배신한 자의 최후가 어떨지 말이야.”

“자, 자, 잠깐! 잠깐만!”

상대는 아직 소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앳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 보이는 얼굴 위에 서린 냉엄한 표정이 오십이 넘는 나이의 산전수전 다 겪은 왕국군 대령, 노먼 슬레작의 손발을 벌벌 떨도록 만들었다.

반항? 저항?

눈앞의 사내는 그런 것 자체를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차라리 경험 없는 하룻강아지였다면 최후의 발악이라는 핑계로 냅다 검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먼은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고, 그렇기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의 선 이는, 감히 상대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강자(强者).

격이 다른 이에게서 느껴지는 진득한 위험의 냄새가 정신이 아득하도록 느껴지고 있었다.

스륵-

몸에 깊이 새겨진 오랜 기사의 버릇 그대로 검 자루에 가져갔던 손을 슬며시 내려놓는 노먼.

여기서 검 자루에 손을 대었다간, 검이 뽑히는 속도보다 더 빨리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배, 배신이라니...! 아니야, 뭐... 뭔가 오해가...!”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노먼의 모습에 금발의 사내, 데미언이 피식 웃음을 보인다.

“오해? 지금 오해라고 했나?”

스르릉-

천천히, 데미언의 손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우우웅...

검에서 소리가 들린다.

불길한 빛깔로 번들거리며 울부짖는 검날.

사실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노먼에게만은 검이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를 갈구하는 검의 울음.

당연히 그 피는, 노먼 자신의 것일 테다.

퍼억!

“으허억!!!”

별안간 가해진 발길질에 다리가 꺾인 노먼이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다지 힘도 얹지 않고 가볍게 건드린 것 같은데, 힘줄이 끊어지고 다리뼈가 분질러지는 듯한 극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어흑! 어흐으윽...!”

왕국군 지휘관의 체통이고 뭐고 너무 아파서 노먼이 소리를 지르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데미언의 얼굴은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콰악-!

“컥! 허억!”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노먼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채는 데미언.

그 덕에 훤히 드러난 노먼의 주름진 목에 차가운 예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데미언의 검날이 닿는다.

그야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

노먼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데론뿐임을 깨닫는다.

“흐윽! 흐으으... 형님! 형니임! 제가 잘못했습니다! 흐으윽!!! 데론 형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오!!!”

태어나 가장 간절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노먼.

“하아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데론의 입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저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데론의 목소리에 진득한 회한(悔恨)이 묻어난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슬픔과 실망감, 분노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데미언은 조용히 노먼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기다릴 뿐이다.

“... 그래도 한때 형제처럼 아꼈던 친구일세. 목숨까지 빼앗고 싶진 않구만. 놔주게나.”

씁쓸한 표정으로 노먼을 살려주라 말하는 데론.

데론의 말에, 데미언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혀, 형님! 감사합...”

짜악!!!

“끄어억...”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데론의 말에 허겁지겁 감사의 말을 쏟아내던 노먼이 자신의 오른쪽 뺨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핑핑 돈다.

분명 손바닥으로 친 것 같았는데 주먹, 아니 발로 얼굴을 걷어찬 것 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다.

“쿨럭! 퉷!”

투툭, 바닥에 내뱉은 핏물에 부러진 이 몇 개가 함께 섞여 나왔다.

뺨 한 대 맞았다고 이가 부러지다니?

뿐인가, 턱뼈도 살짝 어긋난 듯 어딘가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상대의 힘에 질려버린 노먼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왜... 왜에?”

“베르켈 경께선 마음이 어진 분이라 너에게 자비를 베푸셨지만, 나는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니다.”

“예? 아니, 그... 그게 무슨! 어으, 어어...!”

데미언의 말에 크게 당황한 노먼이 피가 질질 흐르는 입술을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겨우 잡았다 생각한 생존의 동아줄이 뚝 하고 끊어지는 듯한 기분.

밀려드는 죽음의 공포에 그가 비명도, 말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뱉던 그 순간,

콰앙!!!

“연대장님!!!”

누군가가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모습을 드러낸다.

“귀, 귄터?”

응접실에 들어선 이는 노먼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귄터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곧 노먼이 지시한 왕도 방위군 병력이 저택에 도착했다는 뜻일 터.

그 사실을 깨달은 노먼의 눈동자에 아주 잠시 희망의 빛이 반짝였으나...

쉬이잉- 쉬잉- 콰앙!!!

거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차이로 귄터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벽에 틀어박히는 손도끼 한 자루.

“허읍!!!”

하마터면 도끼에 머리통이 쪼개질 뻔했던 귄터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멈춰 선다.

피하기는커녕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기에, 그야말로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란 그다.

“후흡! 후우... 후... 후우!”

뒤늦게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엇박자로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을 확인하는 귄터.

“이런 미친...”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도끼날 부분이 절반 이상 벽에 틀어박힌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귄터의 귓가에 들려오는 차가운 누군가의 목소리.

“이번 건 경고였지만, 다음번엔 네 몸뚱이가 표적이 될 거다.”

“...!”

“그러니까, 아가리 닥치고 얌전히 거기 서 있어라. 참고로 도끼는 아직 두 개 남았다.”

휭, 허리춤에 달아둔 손도끼 하나를 왼손으로 들어 올리며 데미언이 귄터에게 말한다.

그가 모시는 상관의 머리 위에서 까닥거리는 손도끼의 모습.

그 어마어마한 협박에 귄터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다.

“... 아, 알겠습니다.”

단 한 수에 완전히 기세가 꺾여버린 부하의 모습을 본 노먼이 한 가닥 남아 있던 희망을 완전히 내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간절한 눈빛이 되어 자신의 목숨줄을 쥔 이에게 사정한다.

“사,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모든 지! 모든 지 다 하겠습니다!”

자신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 사정하는 노먼의 모습을 보며, 데미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야 할 거다. 내일도 동쪽에서 뜨는 해를 보고 싶다면 말이지.”

“...!”

***

“자자,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춰서 군영으로 돌아간다!”

얻어터져 얼굴이 엉망이 된 연대장 노먼을 대신해 의아해하는 병사들의 앞에 나선 귄터.

그는 ‘야간 비상소집 훈련 해제’라는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고, 비장한 각오로 달려왔던 병사들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표정으로 씨근덕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잘했네. 나는 자네가 저 친구들과도 드잡이질을 할까 봐 걱정했는데...”

저택 안쪽에서 창문 너머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던 데론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하하, 제가 싸울까 봐 걱정하셨습니까?”

“조금은 걱정했지.”

“백 명 정도는 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데요.”

홀로 백 명의 병사를 상대한다는, 그야말로 일당백(一當百)의 선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지만 그런 나를 보는 데론은 놀라긴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 이후엔 빼도 박도 못하게 반역자 신세가 될 걸세. 왕도를 지키는 왕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였으니... 자네도 그걸 알고 있어서 굳이 싸우지 않고 돌려보낸 것 아닌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읽는 듯한 데론의 말에,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 나이 때에 비교할 자가 없는 대단한 무력에 과감함과 침착함을 고루 지녔고, 거기에 정치적 상황도 고려하는 넓은 시야까지... 자네가 대체 어디까지 크게 될지, 이 늙은이는 짐작조차 못 하겠네.”

“하하하, 늘 곁에 계시면서 지켜봐 주시면 되겠네요. 제가 어디까지 크는지.”

“어이쿠, 말만 그렇게 하고 또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 나와 훈훈한 대화를 나누던 데론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로 옆에 선 누군가를 바라본다.

“... 노먼, 이 어리석은 친구야.”

“...”

“젊은 적 그리도 멋졌단 사람이 왜 나이를 못나게 되었는가. 자네답지 않아.”

“... 크흑!”

담담하게 건네는 데론의 말에 결국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노먼.

그 눈물의 의미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데론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뭐 솔직히, 내 입장에선 알 바도 아니었고.

“노먼 슬레작 대령.”

“크흡... 어, 흡! 예!”

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대답하는 노먼.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곧 동이 트는 대로 우리는 카를리온을 떠날 거요. 그럼 오늘 새벽 있었던 일은 모두 잊혀지겠지.”

“...”

“사자의 이름으로 함께 했던 옛 전우를 죽이기 위해 사적으로 왕도 방위군을 동원했다는 사실도, 부당한 전쟁의 희생양이 된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후계자를 황금백에게 팔아먹으려 했다는 사실도 모두 잊겠소. 베르켈 경께서 그러길 원하시니.”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스럭, 품속으로 들어갔던 내 손에 서류 뭉치 하나가 들려 나온다.

“여기 이 서류들... 당신이 직접 작성하고 서명한, 카폴리노 상단과 왕도 방위군 7연대의 군수물자 납품 관련 이면 계약서의 내용은 잊지 않을 거요. 자그마치 5년 치나 되니, 쌓인 먼지도 많겠지.”

“...”

“다만, 이걸 우리만 아느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느냐의 차이는 있겠지. 그 차이에 당신 목도 걸려 있을 것이고.”

“...”

“앞으로 뭘 하고 살든 상관 않겠소. 다만, 우리와 엮이지만 마시오. 특히 바덴하임 백작 그 개새끼랑은 연을 끊으시는 게 좋을 것이고.”

“아, 알겠습니다.”

“능력 좋아 왕국군 대령까지 올라가신 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소. 그럼.”

꺼내 보였던 서류 뭉치를 다시 품속에 넣은 뒤, 나는 데론에게 말했다.

“그럼, 베르켈 경. 가시죠. 슬슬 동이 틀 것 같습니다.”

“그러세.”

아드리안과 니나, 저택 밖에서 대기하던 엔리케와 아린은 먼저 출발했기에 노먼의 저택에 남은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들어올 땐 담을 넘어 몰래 숨어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나가니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그리고 데론은, 저택에서 나와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그로부터 보름 뒤.

우리는, 왕국 북서부 변방의 영지 다닐렌츠(Danilenz)에 도착했다.

< 구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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