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1) >
철퍽! 철퍽!
“아휴, 씨... 길이 진짜 개판이네.”
질척거리는 진흙탕 길을 걷던 엔리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허! 날이 풀려서 더 진창길이 되어 버린 게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았을 테니.”
그의 앞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던 데론이 엔리케를 다독이듯 말했다.
2월, 아직은 겨울에 해당하는 시기.
하지만 봄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듯 해가 떠 있는 시간만큼은 한껏 포근해진 날씨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 진짜, 내 생애 가장 빡센 겨울이었다. 이제 봄이 오는구나.”
넋두리하듯 털어놓은 겔베르트의 목소리에 나 역시 말을 얹었다.
“저두요. 진짜 징글징글했습니다.”
“동감, 나도 너무 힘들었다. 특히 버니언 산맥에선... 어후! 말을 말자.”
그야말로 끔찍했던 버니언 산맥에서의 일을 떠올린 겔베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 진짜 그때 힘들었지. 뭔 놈의 몬스터가 끝도 없이 꾸역꾸역 산에서 몰려 나오는데... 활을 쏘다쏘다 나중엔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
버니언 산맥에서의 일을 얘기하는데 빠질 엔리케가 아니다.
손까지 휘저어 가며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재현하는데, 그 생생함이 이름난 연극배우의 실력 못지않았다.
“으아, 근데 조장은 그때 안 쫄렸어요? 몬스터들이 그렇게 많이 쏟아지는데?”
“쫄기는 새끼야... 마! 명색이 용병이 되 가지고, 뒤에 지켜야 할 호위 대상이 있는데 쪼는 게 말이 되냐?”
“오오오! 존나 멋있어!”
“몬스터 이빨에 물려 팔다리 뚝뚝 잘려나가는 상황이 되어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끝까지 싸워야지. 그게 용병 정신이야, 이 새끼들아!”
“엔리케! 엔리케!”
“상남자 엔리케! 진짜배기 용병!”
“그래그래, 내가 바로 그런 분이지. 그 무서운 ‘치페른의 폭군’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싸운 사나이가 바로 나 아니냐! 하하핫!”
푸른 방패의 후배 용병들로 구성된 열렬한 추종자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엔리케였다.
물론, 그가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이도 있었다.
“대장.”
“음?”
“지금 저 새끼가 하는 얘기, 다 뻥이죠?”
슬며시 겔베르트의 곁으로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
그 질문에,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겔베르트가 답한다.
“뻥이 아니기가 더 힘들겠다. 앞에서 데미언 죽어라 싸울 동안 바위 뒤에 숨어서 화살만 깔짝깔짝 쏘던 새끼가 사나이는 무슨.”
“역시... 제가 괜한 질문을 했군요.”
“허허허! 역시 자네들은 참 재밌는 친구들이야, 허허허헛!”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데론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나의 입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 드디어 도착했네요.”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지만, 오랫동안 바랐던 말이었기에 일행 모두가 즉각 반응했다.
“...!”
“도착했다고?”
“어, 진짜냐?!”
“막내... 아니, 이제 네가 막내 아니구나? 데미언, 진짜 도착한 거 맞아?”
“야, 맞네. 저기 표지판 하나 있잖아!”
멀리 보이는 낡은 나무 표지판 하나.
그곳엔 뭐라고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아직은 거리가 멀어 다른 사람들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시력을 지닌 나에겐 코앞에 있는 것처럼 아주 잘 보였다.
남작령 다닐렌츠(Danilenz).
<로스트 킹덤>의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인 그 땅에, 마침내 도착했다.
***
마르크(Mark).
그는 다닐렌츠의 영주 가문인 카릴베르크 가의 시조(始祖)였다.
마르크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여 년 전인 왕국력 612년에 다닐렌츠의 작은 마을 카릴에 살던 사냥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당연하게도, 그는 성(姓)조차 갖지 못한 평민이었다.
마을의 북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장대한 아이펠 산맥의 무수히 많은 산짐승을 잡아 생을 연명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사냥꾼의 삶.
그런 마르크의 인생을 바꾼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에 일어난 ‘펠미어(Pelmeer) 전쟁’이었다.
펠미어는 펠리노어 왕국와 브리카니아 왕국을 가르는 국경선 역할을 하는 강(江)의 이름이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라 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이 전쟁을 ‘펠미어 전쟁’이라 칭했다.
멀리 남쪽 국경 끄트머리에서 벌어진 전쟁의 소식은 왕국 북서부 변방에 자리 잡고 살던 사냥꾼 마르크에게도 들려왔다.
운명의 이끌림이었을까?
전쟁의 소식을 듣고 무엇에 홀린 듯 짐을 꾸린 마르크는 주변 도시에 찾아온 왕국군 모병관의 뒤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무려 4년이나 이어진 두 왕국 사이의 전쟁.
그 치열했던 싸움의 승자는 펠리노어 왕국이었고, 브리카니아 왕국은 쓰디쓴 패배의 대가로 펠미어 강 이남으로 국경선을 한참이나 물려야 했다.
그리고, 왕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 기념비적인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나이 마르크.
펠미어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기적 그 자체였다.
녹슨 칼과 싸구려 가죽 갑옷을 걸친 일개 보병이 며칠 만에 열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십인장이 되고, 그로부터 몇 달 뒤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린 백인대장이 되는 기적 같은 변화.
전쟁 내내 신의 가호를 받은 듯 종횡무진 활약한 그는 백인대장의 자리에 오른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7명의 적국 기사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놀라운 무용(武勇)을 선보였다.
그 결과, 펠리노어의 32대 왕이자 당대의 군주였던 알브레히트 3세(Albrecht Ⅲ)는 마르크에게 그의 고향 마을 카릴의 이름을 딴 ‘카릴베르크’라는 성을 하사했으며, 그를 남작으로 봉해 카릴 마을을 포함한 다닐렌츠 지역 일대를 영지로 내렸다.
4년 전, 가난한 사냥꾼의 신분으로 고향을 떠났던 마르크.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땐 다닐렌츠 영지의 지배자인 ‘마르크 카릴베르크 폰 다닐렌츠(Mark Karilberg von Danilenz)’ 남작이 되어 있었다...
- 왕국의 역사를 바꾼 사건들, ‘펠미어 전쟁’ 편에서 발췌
***
“와아, 밀밭이에요!”
질척이는 진창길이 수레바퀴의 움직임을 방해한 탓에 데론이 모는 말 안장 위로 자리를 옮긴 니나가 눈앞에 보이는 너른 밀밭의 모습에 신이 난 듯 소리쳤다.
봄에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아직 겨울의 찬바람이 매서운 시기.
하지만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밀밭은 겨울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자... 사람 손을 탄 밀밭 같지는 않은데?”
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주변을 살핀 겔베르트의 말에, 옆에 있던 내가 질문을 던졌다.
“음, 그 얘긴 수확해서 먹을 목적으로 사람이 재배한 밀이 아니란 얘기죠?”
“그래. 이건 농사지은 밀이 아니야. 자연적으로 그냥 자란 거지.”
그의 말을 듣고 자세히 밀밭을 살펴보니 밀 사이사이에 잡초도 너무 많았고, 자란 밀의 상태도 저마다 들쭉날쭉한 것이 확실히 관리받은 작물의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큰 규모의 밀밭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워하고 있었다.
“사람이 관리 안 하고 그냥 놔뒀는데도 이렇게 밀이 잘 자랄 정도면...”
말끝을 흐렸지만, 내가 하려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한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다닐렌츠가 예전부터 땅 자체는 좋기로 소문이 났지. 봐봐, 땅 색깔이 검은색에 가까운 게 보이지?”
“음... 아, 예. 그렇네요.”
“땅 색깔 이런 곳이 진짜 농사짓기 좋은 곳이거든. 씨 뿌리고 물 좀 뿌려주면 알아서 쫙쫙 잘 자라.”
“아...”
사실 다닐렌츠가 농사짓기 좋은 땅, 이른바 ‘옥토(沃土)’에 가깝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 원작 소설에서도 여러 번 강조된 특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름진 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닐렌츠는 늘 식량난에 시달리는 영지였다.
대체 왜?
“이렇게 좋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참, 아깝다, 아까워.”
그랬다.
다닐렌츠는 드넓은 영지의 크기에 비해 사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나 부족했다.
일단 영지의 북부는 아이펠 산맥에서 틈만 나면 줄지어 내려오는 몬스터들의 준동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다.
하여 북부 쪽의 영지민들은 그나마 영지군의 무력이 발휘되는 다닐렌츠의 주도(主都) 키르헨 주변에 모여 살거나 아예 영지 남부로 사는 곳을 옮기는 방법을 택해는데...
문제는, 남부 쪽의 치안이 개판이었다는 것.
다닐렌츠 영지군은 북부에서 내려오는 몬스터의 준동을 틀어막느라 다른 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안 주변 다른 지역의 온갖 범죄자들이 다닐렌츠 영지 남부로 몰려들었고, 점점 더 통제가 불가능한 난장판을 만들었던 거다.
“말 그대로 악순환인 거지. 치안이 개판이니 사람이 살 수가 없고, 사람이 없으니 농사를 못 짓고, 농사를 못 지으니 세금이 안 걷히고...”
“세금이 안 걷히니 군사력을 늘릴 수 없고, 그러니 나쁜 놈들 때려잡을 여력이 없는 거고요?”
“어, 그렇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상황인 거... 허읍!”
별생각 없이 누군가의 말에 대답하던 겔베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니나였기 때문이다.
“아, 아가씨! 죄송합니다! 데미언이랑 계속 대화를 하고 있던 탓에 그냥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느라... 어휴!”
“으응? 갑자기 거기서 제 탓은 왜 해요? 그냥 니나 아가씨한테 은근슬쩍 반말 한번 해보고 싶으셨던 건 아니고?”
“야이... 데미언 너 인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인마 어? 얼마나 니나 아가씨에게 깍듯하고... 어? 아무튼!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헤헤, 괜찮아요. 겔베르트 대장님이 제 목숨 구해주신 게 몇 번인데, 까짓 반말 정도가 대수일까요? 전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는 겔베르트를 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는 니나.
그런 니나의 모습을 보며 일행의 모두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짓는데...
“하하! 모두 정지! 오랜만에 손님이 왔네? 자, 다들 튀어나와! 일들 하자고! 으하하하!”
촤륵! 촤아악! 촤악!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주변 밀밭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며 등장하는 한 무리의 사내들.
“다닐렌츠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새끼들아! 크하하!”
“오늘 간만에 고기 좀 먹겠습니다, 형님.”
“가운데 말 탄 노인네는 돈 많아 보이는데요?”
저마다 칼이며 도끼, 창 따위의 흉험한 무기를 들고 우리 일행을 순식간에 둘러싸는 모습에서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온 녀석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흐흐흐! 형님, 여자도 둘씩이나 있습니다! 쓰읍, 벌써 피가 다리 사이로 싸악 몰리는 기분인데?”
“야, 시발! 저기 꼬맹이는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잖아!”
“미친놈이 뭘 모르네, 어린 애 살결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모르냐?”
“그건 맞지. 그리고... 쟤도 보니까 알 거 다 아는 나이 같은데? 으헤헤!”
“조용해 이 새끼들아! 형님 말씀 아직 안 끝나셨다!”
그 불청객들의 한 가운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쉴새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있었다.
“하아, 씨발! 요즘 장사가 하도 안되어서 이 짓거리도 그만해야 하나 싶었는데... 어쩜 이렇게 딱 필요할 때 나타나 줬을까? 응? 으하하하하!”
그는 딱 봐도 보통 아닌 덩치에 탄탄한 근육질을 지닌 것이, 힘 좀 쓰게 생긴 인상이었다.
‘어라? 꽤 하는 놈이네?’
슬쩍 ‘창조주의 눈’으로 능력치를 확인해보니, 도둑질해 먹고 사는 놈 주제에 레벨이 28이나 되었다.
단순히 남 주머니만 털어서 저 정도 레벨이 될 리가 없으니, 적어도 전직 용병이나 군인쯤 되는 녀석이리라.
‘거기에 거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부하들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놈이 보여주는 자신감이 대강 이해는 되었다.
들판에서 도둑질하는 놈치고 과하게 뛰어난 능력치에 꽤 많은 부하의 숫자까지.
놈은 영주의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 이곳 다닐렌츠의 들판에서 스스로를 대단한 맹수라 여기고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 가진 거 얌전히 내놓고 가라. 아니, 아니지... 거기, 기지배 둘도 내놓고 가라. 오늘 밤 아주 좋은 경험 시켜줄 테니까. 으하하하!”
그 착각도, 오늘로써 끝이다.
“... 막내야.”
“옛, 대장! 제가 조질까요?”
그 어느 때보다 신이 난 목소리로, 푸른 방패의 막내 아린이 대장 겔베르트의 부름에 대답한다.
“그래. 저 잡놈의 새끼들, 죄다 무릎 꿇려라. 십분 준다.”
“알겠습니다아아아!”
겔베르트의 명령을 받은 아린이 타고 있던 말 안장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뽑았다.
촤아앙-!
눈앞의 ‘가짜 맹수’들이 감히 본 적 없던, 진짜배기 맹수의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다닐렌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