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2) >
휭- 스각!
“끄아악!!!”
어설프게 칼을 들이밀던 도적놈 하나가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든 검에 옆구리를 길게 베이며 비명을 질렀다.
팍, 하고 시뻘건 피가 튀어 올랐지만 정작 그 살풍경을 만들어낸 소녀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
검(劍)과 피(血).
소녀의 가문은 그것으로 일어나 왕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문(名門) 중 하나가 된 곳.
“후읍!”
짧게 숨을 들이쉬며 발을 움직이는 소녀의 얼굴엔 그저 자신의 검에 대한 단단한 자신감만이 느껴질 뿐이다.
카아앙- 푹!
“아아악!”
또 한 명, 소녀에게 성급한 몸짓으로 달려들던 도적 하나가 푸른 밀밭 위에 길게 피를 뿌리며 엎어졌다.
상대가 거칠게 휘두른 검의 옆면을 때려 크게 팔을 열어젖히고, 훤히 드러난 가슴에 검을 빠르게 찔러 넣는다.
가히 섬전(閃電)과도 같은 공격!
가공할 속도의 찌르기로 유명한 그뢰네마이어 가문의 검술을 물려받은 이다운 멋진 솜씨였다.
“이런 씨... 씨발! 이게 어떻게 된...?!”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당황한 두목 녀석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다.
하나 대 열아홉의 대결.
누가 봐도 이쪽이 불리한 압도적 열세(劣勢)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또래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큰 키를 지닌 이 벽안(碧眼)의 단발머리 소녀는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눈부신 실력을 선보이며 적들을 차근차근 쓰러뜨렸다.
“아악! 내 팔!!!”
“뒈져엇! 읏, 끄악!”
“억! 다리! 다리를 찔렸어!”
스가각! 촤악! 푹, 푹, 푹!
눈부신 속도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소녀의 검.
잠깐 사이에 벌써 아홉 명이나 되는 도적들이 소녀의 검에 찔리고 베여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야이... 뭐해! 이 병신들아! 혼자 하지 말고 다 같이 덮쳐!”
뒤쪽에서 부하들의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두목이 답답하다는 소리를 질렀다.
“아, 알겠습니다!”
“한꺼번에 하자! 한꺼번에!”
“난 뒤쪽으로 칠게!”
“썅! 그럼 난 옆이다!”
두목의 닦달에 황급히 대열을 정비한 도적들이 이번엔 한꺼번에 소녀의 앞과 뒤, 양옆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되겠냐.”
그런 도적들에게 둘러싸인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얼굴엔 털끝만큼의 걱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아린.
얼마 전 용병대 푸른 방패의 막내가 된 열일곱의 소녀.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나는 소녀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왕국제일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막내딸.
그녀가 누구에게 검을 배웠는지 알고 내 입장에선, 그녀가 저따위 도적놈들을 상대로 칼을 맞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슁! 쉬익! 카캉!!!
“으윽!”
“컥!”
두 개의 검을 피해내고, 나머지 두 개의 검은 쳐낸다.
서로 다른 네 방향에서 날아든 공격을 모두 의미 없게 만드는 소녀의 눈부신 대응.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린의 움직임은 재빠르고, 또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와, 우리 막내 죽인다!”
“미친, 개쩐다 진짜!”
“막내는 무슨, 그냥 누나 해라!”
“그래, 싸움 잘하면 누나지!”
“누나, 아린 누나아아아!!!”
이미 구경꾼으로 변한 푸른 방패의 동료들이 쏟아내는 응원의 목소리에 검을 휘두르던 아린이 질색하며 소리친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누나는 무슨! 징그러우니까 그만들 하세욧!”
“으헤헤헤! 우리 누나 화내니까 더 예쁘다아!”
“아린! 아린! 아린!”
“으으으, 진짜 싫어!”
정말로 기분이 별로였던 것인지, 적에게 휘두르는 아린의 검끝이 더욱 매서워진다.
촤악! 푹! 푹! 스가각!
“아아악!”
“시팔! 가슴! 가스음! 나 심장 찔렸다고!”
“사, 살려... 커억!”
거의 동시에 피를 뿜으며 나자빠지는 네 명의 도적들.
먼저 당한 놈들을 합쳐 벌써 바닥에 널브러져 기어 다니는 놈들이 열셋이나 되었다.
하나 대 열아홉의 구도가 순식간에 하나 대 여섯으로 변하자, 의기양양했던 도적 두목 놈의 얼굴이 변한다.
그러더니 결국,
“야, 시발! 튀어!!!”
“흐아아아아!”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한 나머지 도적놈들.
특히나 두목 녀석은 애초부터 싸움엔 부하들만 앞세우고 자신은 좀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그랬던 놈이 작정하고 도망치자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아잇! 내 투창...!”
버릇처럼 투창을 던져 도망치는 놈들을 잡으려 했던 아린이지만, 그녀의 손때묻은 투창들은 말안장에 걸어두고 온 상태.
그렇다고 들고 있는 검을 집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이를 악물고 직접 발로 뛰어서 도망치는 놈들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슁! 슁! 슁!
순식간에 밀밭 위를 가로지르며 도망치는 놈들에게로 향하는 세 자루의 손도끼.
“으, 어으?!”
퍼석-!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던 녀석의 얼굴을 쪼개며 첫 번째 손도끼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퍽! 퍽!
“끄아악!”
“크헉!”
남은 두 도끼도 정확하게 각각의 목표에 도달하며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비명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남은 놈들의 숫자는 셋이다.
“히이익!”
옆에서 열심히 도망치던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빠지는 것을 본 두목 녀석이 헛바람을 집어삼킨다.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귀신같이 날아와 등판에 꽂히고, 뒤통수를 쪼개는 내 손도끼 투척술에 놀란 것이다.
“흐으윽! 이 시발!”
너무 놀라다 못해 눈물까지 질질 흘리는 형편없는 몰골로 발을 놀리는 도적 두목.
마치 술 마시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밀밭을 달려나가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장, 부탁해요.”
그러자,
“어, 걱정하지 마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화답하는 엔리케.
곧, 그의 손에서 세 발의 화살이 찰나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출발한다.
퉁! 퉁! 퉁!
언제봐도 그림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엔리케의 화살은,
퍽! 퍽! 퍽!
“아아악!”
“컥!”
“으윽!”
한 치의 오차 없이 도망치던 마지막 놈들의 몸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아, 참고로 두목 녀석만큼은 등판이 아닌 엉덩이에 화살이 꽂혔는데, 엔리케가 이 정도 거리에서 잘못 쐈을 리가 없으니 일부러 엉덩이를 맞췄다고 봐야 했다.
“저 새끼는 이상하게 엉덩이가 맞추고 싶더라고? 흐흐흐...”
원하던 곳에 정확하게 적중한 자신의 화살을 본 엔리케가 특유의 부러진 앞니를 보이며 웃음을 보인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짧은 감상을 전했다.
“하아... 그렇게 아무 데서나 개인 취향 티 내지 마세요, 이 변태 아저씨야.”
“뭐 인마?! 너 지금 뭐라고... 야, 인마! 나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오!!!”
뭐라뭐라 혼자 떠드는 엔리케를 뒤로하고, 나는 앞서 집어 던졌던 손도끼 세 자루를 챙기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부스럭-
그런 내 앞길을 가로막는 한 사람.
늘씬한 키에 진한 흑색의 단발머리,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짝이는 푸르른 눈동자.
얼굴 가득 튀었던 적들의 피는 언제 닦아낸 것인지, 새하얀 피부를 되찾은 소녀 아린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뭐야? 비켜.”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고 내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 큼!”
하지만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비키지 않는 아린.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는데...
“와아, 언니! 너무 멋있어요! 어떻게 혼자서 이렇게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거죠? 진짜... 최고다!”
어느새 말에서 내려 우리 곁으로 다가온 니나가 아린을 향해 찬사를 퍼부었다.
‘아, 하긴... 니나가 보기엔 얘가 엄청 멋있어 보이겠네.’
아마 니나의 입장에선 아린 같은 사람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여자 임에도 남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지닌 대단한 검사였으니까.
‘게다가 최근에 둘이 엄청 친해지기도 했으니까...’
찰떡같이 어울리는 단발머리에 늘씬한 키를 지닌 예쁜 언니가 심지어 싸움(?)까지 잘한다.
이거야말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마음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조건 아닌가?
‘여중이나 여고에 있는 운동부 친구들이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 엄청 많았다는 얘기가 생각나네.’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니나의 재잘거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언니, 나한테 검술 가르쳐 준다고 했던 거 진짜죠? 나도 언니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아, 그거야 뭐... 그래, 가르쳐 줄게!”
아린의 팔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는 니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데미언 오빠, 아린 언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오빠가 봐도 그렇죠?”
“음?”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니나.
그 눈동자 가득한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뭐야? 저 눈빛은?’
니나 이상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채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웃긴 것은, 표정은 엄청 도도하고 자신감 가득한 척을 하고 있는데 눈빛에는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다는 것.
마치 주인이 던진 공을 발 앞에 물어다 놓고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는데...
‘이 녀석, 나한테 칭찬받고 싶었던 건가?’
그럼 처음부터 어땠냐고 물어볼 것이지, 왜 나이 어린 니나를 통해서 돌려 묻는 거야?
게다가 표정은 또 왜 저리 도도한 건데?
역시, 금수저 물고 태어난 녀석이라 태도가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다. 아까도 몇 놈 놓쳤잖아?”
“...!”
“아니, 몇 놈이 아니지. 여섯 놈이나 튀었고, 심지어 거기에 두목도 있었어. 전투 시의 상황 판단력과 집중력이 너무 부족해.”
왠지 모를 심술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와버렸다.
“헐... 오빠! 그래도 언니가 우리 대신해서 열심히 싸웠잖아요!”
니나의 섭섭해하는 말투를 들으며 가슴 한쪽이 뜨끔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였다면 중간 즈음에 두목 녀석이 도망칠 걸 예상하고 그놈부터 노렸을 거다. 잔챙이 몇 놈 잡는다고 엉뚱하게 시간 보낸 거, 그거 되게 멍청한 선택이야. 다음부턴... 큼, 그러지 마라.”
괜히 밀려오는 어색함에 대강 말을 마무리 짓고 성큼성큼 걸어 아린의 곁을 지나쳤다.
“...”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서일까?
푹, 고개를 떨구는 아린.
마지막 순간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걸 본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 거겠지?
***
밀밭에서의 짧았던 전투 이후, 우리는 며칠 동안 그와 비슷한 상황을 다섯 번이나 더 겪어야 했다.
그중 세 번은 처음과 비슷한 도적놈들의 습격이었고, 두 번은 마을 근방에서 어슬렁거리던 놀(Knoll) 무리와의 충돌이었다.
우리 일행의 전투력이 워낙 빼어난 수준이었던지라,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사람이 사는 마을 근방에 이토록 많은 도적과 몬스터 무리가 들끓는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 이거, 손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
다닐렌츠 영지의 상황이 이 정도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데론이 턱을 쓸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 저희 입장에선 좋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 동네에 자리 잡으면 일거리는 끊길 일 없겠어요.”
데론의 말을 받은 겔베르트가 농담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도적 퇴치, 몬스터 토벌 등이 주요 생계 수단인 용병대장의 입장에서 꺼낸 그의 말에 데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것도 영주성에서 용병 수당을 제때 줄 수 있어야 가능한 소리 아니겠는가?”
“하긴, 그렇네요. 휴우...”
데론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며 갑갑하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마침내 도착한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
하지만 키르헨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다른 영지의 대도시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웅장한 성벽 대신 허름하기 그지없는 나무 장벽을 둘러쳐 만들어진 도시의 경계.
저 멀리, 도시의 한 가운데 돌과 흙을 쌓아 만들어진 완만한 언덕 지형이 자리했고, 그 언덕 위에 나무로 만들어진 2층짜리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왕도 카를리온 번화가에 자리한 어지간한 여관이나 식당 건물보다도 못해 보이는 건물의 정체.
저곳이 바로 다닐렌츠의 주인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이 기거하는 영주 저택이었다.
“... 확실히, 수당 받기 어려운 집구석인 것 같네요.”
한눈에 보아도 주머니 사정을 알만한 영주의 저택을 보며, 일행 모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다닐렌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