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3) >
다닐렌츠의 주도(主都) 키르헨,
영주의 저택_
“바일, 그 친구가 그렇게 갈 친구가 아닌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흐으윽!!!”
오랜 벗의 죽음을 전해 들은 한 사내가 귀족이라는 스스로의 신분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곳 다닐렌츠의 영주,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이다.
“여,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뭘 하고 있느냐, 어서 영주님을 안으로 모셔라!”
혈육의 부고를 들었을 때 이상으로 괴롭고 슬퍼하는 남작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가신들이 앞을 다투어 주군의 상태를 챙기려 들었다.
“나는, 나는...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후우...!”
가신들의 걱정을 물리친 남작이 바닥에 엎드렸던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겨우겨우 영주의 권좌로 돌아가 자리한 남작.
그는 한동안 쏟아낸 눈물로 인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네 아비인 바일과 비록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형제처럼 서로를 믿고 의지하던, 그런 사이였다.”
“예, 영주님. 저의 아버님과 왕도에서 수학하시던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막역한 사이셨다고, 그리 들었습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화를 이어나가는 남작과 달리, 아주 의연한 태도로 말하는 니나.
하지만, 눈앞의 어린 소녀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니나가 쏟아지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거하는 곳이 너무나 멀었기에 직접 얼굴을 보며 대화하진 못했으나 다달이 전하는 서신으로나마 안부를 묻고, 우정을 나누었었다. 헌데... 지난 몇 달간 보낸 서신에 대한 답이 없어 의아했었지. 나는... 나는 리트베르크에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제 살길에 바빠서... 오, 주 아르닌이시여! 형제의 고난에 이토록 무심했던 저를 벌하소서!”
다시 한번 격정을 끌어올린 남작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만 봐도 그가 얼마나 벗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시간의 지난 뒤, 간신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 남작이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모두에게 선언했다.
“여기, 리트베르크의 온당한 지배자인 아르펜 가문의 후계자 니나 아르펜과 그의 손님들을 다닐렌츠의 귀빈으로 맞이하여 주인으로서 그 예를 다할 것이다. 다닐렌츠의 모든 가신들은 우리 영지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정성을 다해 예우하라!”
“알겠습니다!”
***
다닐렌츠를 찾은 귀한 손님으로서 정성을 다해 예우하라는 남작의 마음 씀씀이와는 별개로, 영주 저택의 규모가 너무 협소했기에 니나와 데론, 아드리안을 제외한 우리 용병대 전원은 키르헨 시내에 있는 여관에서 머물게 되었다.
“하... 맛 더럽게 없네, 진짜.”
여관 식당에서 시킨 멀건 야채 스튜를 떠먹던 엔리케가 못 먹을 것을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직업 특성상 길바닥에서 누워 자며 싸구려 육포로 대충 식사를 때울 일이 많은 것이 바로 용병들이었다.
그런 용병의 입에서 ‘맛 더럽게 없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그야말로 음식 맛이 최악이라는 뜻이다.
“보니까, 음식 맛이 없을 수밖에 없네요.”
나는 얼마나 오래 썼는지 손잡이 부분에 까맣게 변색 되어버린 나무 숟가락으로 접시에 담긴 스튜를 휘휘 저어보았다.
접시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묽은 스튜 국물에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수의 건더기가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아이씨, 이딴 걸 돈 받고 팔아? 진짜 확 엎어버릴...”
“가만 앉아 있어라. 소란피우면 모가지 따 버린다?”
“옙! 얌전히 먹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들썩거리던 엔리케의 엉덩이를 다시 얌전하게 만든 겔베르트가 숟가락을 놓으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에휴, 스튜 상태만 봐도 이 동네 사정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알겠다.”
“그러게요. 맨날 이딴 것만 먹다간 영양실조 걸리겠어요.”
“영양실조... 하긴, 영주라는 양반이 그 몰골이면 말 다 한 거지.”
겔베르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전날 저택에서 만났던 다닐렌츠의 영주,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작은 키에 마른 체구를 지닌 선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영지의 지배자이자 귀족의 신분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한 모습.
남작 자체가 타고난 약골이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지의 식량 사정 자체가 그리 풍족하지가 않았다.
‘원작 소설에서도 남작은 입이 짧고, 육체적 활동을 즐기지 않는 학자 스타일의 인물이라고 했었지.’
그러니 오십도 안 되는 나이에 단명(短命)한 것이겠지.
“넌 다닐렌츠가 이렇게 상황 안 좋은 동네인지 알고 있었어?”
“저요? 저야 뭐...”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 속에서 맴돌았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내가 말끝을 흐린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겔베르트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가 뭘 알았겠냐. 그냥 니나 아가씨 돕고 싶은 마음에 따라온 거겠지.”
“예, 뭐... 그렇죠.”
“야, 뭘 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다들 네가 나눠준 돈 받고 신났더라. 용병 놈들이 그거면 된 거지. 안 그래?”
어젯밤, 나는 ‘신입’ 아린을 포함한 푸른 방패 용병대 전원을 불러모은 후 니나 일행을 보호해 무사히 다닐렌츠에 도착하면 주기로 약속했던 의뢰 성공 보수를 나눠주었다.
일 인당 백 골드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
도박 같은 것으로 어처구니없이 탕진하지 않는 이상 1, 2년 정도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충분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뭐, 사실 이번 일만 보고 드린 돈은 아니니까요.”
“이번 일만 보고 준 것은 아니다... 너, 뭔가 머릿속에 계획이 있구나?”
내가 늘어놓은 말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않는 겔베르트.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편견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이것이, 내가 겔베르트라는 사내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일단... 상단을 하나 세울까 해요.”
“상... 상단? 물건 파는 상단?”
“예. 그 상단이요.”
내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겔베르트의 눈이 커진다.
상단(商團)이라니, 칼과 창으로 대화를 나누는 용병 입장에선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단어다.
“어우, 잠깐만. 그 소리 들으니 막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데?”
“왜요?”
“왜긴 새끼야, 상단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신없는 건지 몰라서 그래? 그 복잡한 숫자 쓰인 장부 들여다볼 생각만 해도...어후! 난 못해. 아니, 안 해!”
“누가 대장한테 상단일 시켜준대요? 참나, 꿈도 야무지시네.”
“응? 아니야?”
“예, 아니에요.”
나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진다.
“야, 그럼... 다른 놈들은 안 돼 인마. 상단 말아먹을 일 있냐? 내가 너 빼고는 우리 용병대에서 제일 똑똑한 놈인 거 알잖아? 나 말고 누구한테 일을 시키려고?”
당장이라도 망해가는 상단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겔베르트.
하지만 나는 황당함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참나, 숫자 잘 보고 똑똑한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우리 용병대 사람들을 써요? 대장 말마따나 상단 말아먹을 일 있어요?”
“... 그게 무슨 소리야? 숫자 잘 보고 똑똑한 사람들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는 겔베르트에게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어요,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대장은 저를 잘 지원해주기만 하세요.”
***
겔베르트와 상단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반갑소, 다닐렌츠 영지의 군무(軍務)를 담당하고 있는 발터 브라운이요.”
우리는 영주 저택 1층에 자리한 접견실에서 다닐렌츠 영지의 군무관 발터 브라운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단단한 몸, 굳건한 인상을 지닌 전형적인 군인 느낌의 사내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용병대 푸른 방패의 겔베르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병대 푸른 방패의 데미언입니다.”
“음, 베르켈 교수님께 말씀 많이 들었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르펜 가주님을 도와 이 머나먼 다닐렌츠까지 고된 여정을 함께한 의롭고 실력 있는 용병대라고?”
“하하, 과찬이십니다.”
호의적인 눈빛을 보이는 발터의 말에 겔베르트가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겸손하게 답했다.
그나저나 나의 귀에 들린 의외의 단어가 있었으니...
‘베르켈... 교수님?’
너무나 뜬금없는 표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내 얼굴에 피어오른 궁금함을 읽은 발터가 묻기도 전에 답을 내어주었다.
“왕립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베르켈 교수님의 ‘기초 검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지. 당시 교수님은 사자기사단을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분이셨기에 그 강의를 들으려는 생도들의 경쟁이 아주 치열했다오.”
“아... 두 분께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이건 <로스트 킹덤> 원작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기에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도 깜짝 놀랐소. 만난 지 20년도 지난 옛 스승을, 이렇게 고향 땅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 하핫!”
옛 스승을 만난 것이 퍽 반가웠는지, 발터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리 영지 내에서 용병 활동을 하고 싶으시다고?”
“예, 그렇습니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발터가 멋지게 자란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쓸며 물었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부탁이 있었으니 내 뭐든 편의를 봐 드리겠소. 헌데... 용병대 등록의 경우야 시내에 있는 지역 용병 길드 사무소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 되지 않소? 내가 따로 도울 일이 있나 싶은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존 용병 길드들의 텃세에 시달리며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 그러니 우리 쪽에서 그런 불필요한 갈등 없이 빠르게 일이 진행되도록 적당한 압력을 행사해달라는 얘기군. 맞소?”
“음...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야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저희가 부탁드리려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금 다르다?”
“예.”
“흐음... 설명을 부탁하오. 내가 용병들의 생리엔 그리 밝지가 않아서.”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들이켜며 묻는 발터의 질문에, 겔베르트가 담담하게 답한다.
“용병들의 텃세는, 저희가 알아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금 시끄러워질 수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하, 극복이라...”
겔베르트가 꺼낸 ‘극복’이라는 표현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음을 보인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대답했다.
“뭐, 사람 죽지 않는 선에서 그쪽에 신경 끄라고 경비대 쪽에 일러두겠소. 그럼 되겠지?”
“예,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다.
“그래, 그러면 일 얘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지으면 되겠소?”
“아, 죄송하지만... 군무관님, 말씀드릴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음? 무슨...”
“자세한 얘기는, 여기 이 친구가 말씀드릴 겁니다.”
겔베르트의 소개를 받으며, 내가 입을 열었다.
“군무관님, 저는 앞으로 다닐렌츠 영지와 저희 푸른 방패 측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중요한 계획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영지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중요한 계획이라...”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놈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 규모가 큰 이야기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발터의 눈빛엔 진지함만이 가득했다.
아마도 우리를 소개해준 데론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 눈빛이리라.
“어디, 말해 보게. 그 계획이란 게 뭔가?”
“바로 다닐렌츠의 이름을 내건 상단 설립입니다.”
“... 상단?”
“예,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가늘게 뜨는 발터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시다시피, 다닐렌츠는 곳곳에서 창궐한 몬스터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몬스터는 그 자체로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생명을 학살하는 신의 형벌이죠.”
“... 계속하게.”
“하지만 그 몬스터를 제압할 충분한 무력만 있다면,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영지의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발터가 테이블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즉, 푸른 방패가 잡은 몬스터를 처분할 창구의 목적으로서 그 상단이 필요하다는 얘기로군?”
“맞습니다. 저희 용병대가 몬스터를 잡을 무력을 제공하고, 다닐렌츠 영지 측에서 상단을 운영할 인력을 제공해주신다면 고정적인 수익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음, 그래. 참 듣기 좋은 얘기군. 그런데 말이야... 이 계획엔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쯧, 하고 혀를 찬 발터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영지의 자금 사정이 정말로 좋지가 않다네. 자세한 내용까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 현상 유지에도 벅찰 지경이라고 이해하면 될 걸세.”
“음...”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 투입이 필요한 상단 설립이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 이백 골드 이상은 필요할 텐데...”
“가능합니다.”
“... 응?”
갑자기 튀어나온 내 말에 멍한 표정을 짓는 발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준비했던 그 말을 자신 있게 꺼냈다.
“상단 설립에 필요한 초기 자금 천 골드를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제안을, 영주님께 꼭 전달해 주십시오.”
< 다닐렌츠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