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단 설립 (1) >
다닐렌츠 영지의 이름을 내건 상단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됐다.
영지 전반에 창궐 중인 몬스터를 잡아 수익을 올린다는 계획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는데, 다만 그 실행 조건이 까다로워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 일행의 등장으로 그 까다로웠던 실행 조건, 즉 ‘몬스터를 상대할 무력’과 ‘상단 설립에 필요한 자금’이 동시에 해결되었다.
조금 과장 섞어 표현한다면 다닐렌츠 입장에선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과 젓가락 정도만 들고 와서 앉으면 되는 상황.
당연히, 다닐렌츠로선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그대의 도움으로 우리 다닐렌츠가 오랫동안 생각만 해왔던 큰 사업의 첫 발걸음을 떼게 되었으니, 영주의 신분으로 감사함을 아니 표현할 수 없게 되었네. 이 고마움을 말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지...!”
군무관 발터 브라운을 통해 상단 설립에 대한 제안을 한 바로 다음 날.
나는 영주의 저택에서 남작을 접견하고 있었다.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고전적인 말투를 구사하는 구스타브 남작이다.
‘... 무슨 옛날 사극 말투 듣는 것 같네.’
하지만 말투야 어쨌건 그 전반에 깔린 것은 나에 대한 호감과 고마움의 감정이었기에,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남작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가 앞으로 발 딛고 살게 될 땅, 다닐렌츠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젊은이의 언변이라 하기엔 너무나 능숙하군. 과연 상급기사의 격을 지닌 이는 그 입심 또한 다르다는 것인가?”
“...!”
나를 보며 상급기사라 언급하는 남작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 곁에 서 있는 객장(客將), 데론 베르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데론이 살짝 민망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난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남작님께 말씀드렸다네. 자네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지닌 젊은이인지, 이 늙은이가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지 뭔가? 허허허!”
그 모습이 흡사 잘난 손주를 자랑하는 할아버지의 표정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그가 내 흉을 본 것도 아니니 딱히 기분 나쁠 일도 없었다.
“처음 베르켈 경의 말을 들었을 땐 믿지 못했다네. 이제 갓 성년이 된... 아니지, 자네가 버니언 산맥의 오우거를 잡고 상급기사의 자격을 획득한 것이 작년의 일이라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허, 그럼 열일곱의 나이에 상급기사가 된 것이군.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하다니...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도 믿을 수가 없네. 이거야말로 왕국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실로 대단한 일 아닌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남작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그대의 그 놀라운 재능을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 십분 발휘해주길 바라겠네.”
“이를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대의 성장에 우리 다닐렌츠가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곳엔 지금 자네 같은 영웅이 필요하다네.”
그늘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문 남작이 못다 한 말을 잇는다.
“다닐렌츠의 모든 신민을 책임지는 영주의 자리에 앉은 자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도움을 구하겠네.”
“...”
“부디 나를,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도와주게나.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카릴베르크라는 가문의 이름뿐인 무능한 사내의 간절한 부탁일세.”
한 지역의 지배자인 영주씩이나 되는 이가 보여주는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낮춘 모습.
물론, 내가 보기 드물 정도로 어린 나이에 상급기사라는 대단한 경지를 이룬 인재라는 사실이 그러한 남작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 그보다, 남작의 성격 자체가 그런 이유가 더 크지.’
타고난 성품이 선하고, 늘 영지민들의 안녕을 위해 고민하는 보기 드문 태도를 지닌 귀족.
비록 그 지닌바 능력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면 되니까.’
내 입장에선 알아서 잘하는 능력자보다는 내 능력을 믿고 지지해줄 남작 같은 이의 존재가 훨씬 더 기꺼웠다.
그렇기에, 나는 흔쾌히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다닐렌츠의 영광을 위해 제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
내가 영주의 저택에서 구스타브 남작과 만나고 있던 그 시각_
“그래... 우리 길드에 가입하고 다닐렌츠에서 활동을 하고 싶으시다?”
푸른 방패의 대장 겔베르트와 부대장 메이슨, 조장 엔리케는 키르헨 빈민가 뒷골목에 자리한 용병 길드 사무소에 들러 길드 가입 신청을 하고 있었다.
키르헨 용병 길드의 직원은 한눈에 봐도 삐딱한 태도로 찾아온 손님들을 대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나눠 먹겠다고 찾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장이라고 불리는 겔베르트의 멀끔한 옷차림이 길드 직원의 그 같은 태도를 부추겼다.
모름지기 용병이란 피와 먼지에 찌든 갑옷 차림과 험상궂은 외모를 미덕처럼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
헌데 눈앞의 사내는 때깔 좋아 보이는 튜닉에 망토를 걸치고,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옷차림은 일단 좆밥의 냄새가 나는데...’
다음으로, 길드 직원이 살핀 것은 겔베르트의 얼굴.
진한 눈썹에 네모진 턱, 뺨과 이마에 난 자잘한 상처들이 주는 인상이 무척 강렬했다.
하지만 그 상처들이 전장에서 싸우다가 얻은 것인지 술 처먹고 지 혼자 자빠져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아직은 판단 보류.
‘몸 상태들을 보아하니 적어도 힘쓰는 일을 해본 놈들이다.’
광산의 광부, 혹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다 파는 나무꾼일 수도 있다.
혹은 정말 용병일 수도 있겠지.
아직 상대의 정체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은 길드 직원은 대화를 조금 더 나눠보기로 한다.
“이 동네 봐서 알겠지만, 어지간히 못 사는 동네라서 용병들한테 돈 챙겨줄 부자 양반들도 별로 없어. 그냥 다른 일 찾아보는 건 어때? 짐꾼 같은 거 말이야.”
“우리가 용병 일을 하려는 건 돈 때문이 아니오.”
“돈이 아니다... 그럼?”
“이곳 키르헨으로 오는 길에 보니 수많은 몬스터를 보았소. 영지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신의 혈육들... 뿐인가, 남들 주머니 털어먹고 사는 도적들의 수도 한둘이 아니더군. 그런 세상의 나쁜 것들을 때려잡는데 한칼 보태려고 하오.”
“아이고, 대단한 영웅들 납셨네. 그래, 그 나쁜 것들 때려잡을 실력들은 되시고?”
빈정거리며 묻는 길드 직원에게 대답한 건, 겔베르트의 뒤에 서 있던 엔리케였다.
“아니, 이런 시발... 뭐 어떻게, 여기서 한번 보여줄까? 그럴 실력 되는지 안 되는지?”
“엔리케, 입 닥쳐라. 우리 겔.베.르.트 대장님이 얘기 중이시다!”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엔리케에게 경고하는 메이슨.
하지만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말투는 오히려 경험 없는 용병의 허세 같이 느껴졌다.
‘이 새끼들, 그냥 병신들이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니 대충 수준을 알 것 같았다.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린 길드 직원이 이제 대놓고 상대의 속을 긁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아주 놀고들 있다, 놀고들 있어. 뭐 실력을 보여줘? 이 새끼들이 여기가 무슨 동네 뒷골목 싸움판인 줄 아나...”
싸늘한 길드 직원의 반응에 기겁한 겔베르트가 다급하게 입을 연다.
“펴, 평소에도 말을 좀 거칠게 하는 친구인데, 장소를 못 가리고 실수를 좀 했소.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정말 미안하오!”
엔리케를 대신해 좀 전의 발언을 사과하는 겔베르트.
하지만 이미 시비 틀 건수를 잡은 길드 직원은 호락호락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쪽이 왜 사과를 해? 혓바닥 놀린 건 저 새끼인데. 사과할 거면 저 새끼가 해야지. 내 앞에 대가리 박고, 정중하게. 흐흐흐...”
“뭐 시발놈아?”
“엔리케!”
말리는 메이슨의 손을 뿌리치며 앞으로 나선 엔리케가 잔뜩 흥분해 소리친다.
“대가리를 박아? 이 개새끼가 말이면 단 줄 아나... 야, 뒤질래? 너 싸움 잘해? 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엔리케.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꼴이 딱 시장 바닥 왈패 수준이었다.
그 모습에 크게 당황한 겔베르트가 엔리케의 가슴팍을 뒤로 밀치며 소리친다.
“엔리케 너 이 자식... 가만히 안 있어?”
“아니, 대장! 저 새끼가 먼저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실력이니 뭐니 하면서!”
“그래도 길드 사무소에 와서 이 무슨 행패냐! 예의를 갖춰!”
“에이씨! 아니, 형! 형도 봤잖아? 이 시발놈들이 우리 먼저 무시하는 거!”
“너 인마,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 가만히 안 있어? 우리 이제 용병대라고!”
언쟁을 벌이는 겔베르트와 엔리케의 모습을 보며 길드 직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용병대장한테 형? 하, 이 좆밥 새끼들이 진짜 장난치나...’
나름 공적인 자리라면 공적인 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용병대장과 대원이 형이니 동생이니 하고 있었다.
‘어디서 막일하던 놈들이 용병 일 한번 해보겠다고 설치는 거네.’
더는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생각이 든 길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휘휘 젓는다.
“하,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몰려와서... 야, 꺼져.”
급변한 길드 직원의 모습에 겔베르트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항변한다.
“아니... 꺼, 꺼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용병 길드에 등록하러 온...”
“좆까, 이 새끼들아.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들인지 몰라도 여긴 너희 같은 새끼들이 와서 기웃거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야.”
“이, 이... 어찌 그따위 막말을!”
실로 모욕적인 길드 직원의 말에 격분한 겔베르트가 뭐라 반박을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분을 참지 못한 엔리케가 위협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길드 직원에게 다가섰다.
“말 다 했냐? 어? 이 개새끼가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짝-!
“억!”
기세등등하던 엔리케의 고개가 옆으로 홱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길드 직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엔리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쳐버린 것이다.
뒤이어 그는 휘청거리는 엔리케의 배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퍼억!
“어흐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엔리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겔베르트와 메이슨이 바닥에 쓰러진 엔리케에게 달려들었다.
“에, 엔리케!”
“이건... 이건 너무 하지 않소!”
두 사람의 원망 어린 눈빛이 길드 직원에게 향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한 목소리뿐.
“야, 이 병신 새끼들 나한테 안 보이게 치워라.”
“예.”
길드 직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무소 이곳저곳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살벌한 분위기로 변한 길드 사무소 내부.
하지만, 반전은 바로 그 순간 찾아왔다.
“하, 대장. 이 짓거리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
길드 직원에게 걷어차인 배를 붙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엔리케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묻는다.
“...?”
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란 길드 직원들이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데...
“아니,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라.”
길드 사무소에 들어온 이후 내내 어수룩한 말투로 허둥거리던 겔베르트가 차갑게 변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 너희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다. 처맞고 나서 딴소리 마라. 이 좆만한 씨.빨.새.끼.들아.”
“이 미친놈이 지금 뭔 소리를...”
뻐어억!!!
엔리케의 몸에 손을 대었던 길드 직원의 가슴팍을 걷어차는 것으로, 용병대 푸른 방패의 ‘키르헨 용병 길드 접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
“... 어? 뭐가 어떻게 돼?”
영주 저택 근처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다닐렌츠의 군무관 발터 브라운.
그의 질문에 급히 달려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던 부하 병사가 재차 보고를 올렸다.
“그, 그게...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 겔베르트가 키르헨 용병 길드의 새로운 길드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허...”
놀라움과 황당함이 한데 섞인 한숨.
끼익-
자신의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댄 발터가 버릇처럼 콧수염을 쓸며 혼잣말을 흘렸다.
“애초부터 길드에 등록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하, 겔베르트 이 친구...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친구였네? 하하하!”
< 상단 설립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