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단 설립 (2) >
기본적으로 다닐렌츠는 군사력이 약한 도시였다.
보통 군사력의 미비로 인한 치안의 부재는 외부의 무력, 즉 용병들로 인해 채워지기 마련.
영지 내에 들끓는 몬스터와 도적들을 때려잡는 일만 해도 차고 넘쳤기에, 다닐렌츠는 용병들에겐 일거리가 아주 풍족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천혜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다닐렌츠는 참으로 용병이 먹고살기 힘든 땅이었다.
왜냐?
“... 다, 다닐렌츠는 용병을 고용해서 부릴 정도의 재력을 지닌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워낙 가난한 영지인지라...”
붉고 푸른 멍이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사내.
그는 다닐렌츠의 주도(主都), 키르헨의 용병 길드장이었다.
키르헨 용병 길드 내에선 왕처럼 군림했던 그였지만, 별안간 길드 사무소를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가 지금의 꼴이 되었다.
“시, 심지어 영주님조차도 용병을 고용할 돈이 없어 주도인 키르헨 주변에도 몬스터가 들끓는 상황입니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뭐하나 물어보자.”
“예,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너넨 그래서 뭐 먹고 살았냐? 네 말 들어보면 용병들이 굶어 죽기 딱 좋은 상황이잖아? 근데 그런 거 치고 여기 길드에 등록되어있는 용병들이 꽤 많던데?”
“어, 그게...”
겔베르트의 질문을 듣고 말끝을 흐리는 길드장.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쉰 겔베르트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서 작게 말했다.
“엔리케, 이 새끼 나랑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난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이 크네.”
“자, 잠깐만! 형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이 개새끼야!”
퍼억!
“꺼흐으윽!!!”
냅다 길드장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몸의 대화(?)’를 시작하는 엔리케.
퍽! 퍼억! 퍽!!!
“커헉! 어으윽!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 켁!!!”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엔리케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끼기긱-
처음 앉아 있던 의자를 끌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길드장의 앞으로 가져온 겔베르트.
다시 의자에 앉은 그가 끊겼던 대화를 재개한다.
“자, 다시 물어볼게. 이 동네 용병 새끼들, 그동안 뭐 하면서 먹고 살았어?”
“흐으윽... 흐으으으...”
“울지만 말고 이 새끼야. 사람이 물어보면 묻는 말에 빨리 대답을 해야지. 자,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 뒤지기 싫으면. ”
“아흐... 아, 알겠습니다아...”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 터진 입술과 깨진 코에서 흐르는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길드장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꿇어앉은 자세를 취한다.
“그게... 그게, 사실은...”
스륵-
대답을 주저하는 길드장의 모습에, 겔베르트의 뒤에 서 있던 엔리케가 허리춤에 꽂혀있던 자신의 단검을 천천히 뽑았다.
묻는 말에 빨리 대답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모습에 더는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길드장이, 눈을 질끈 감고 대답한다.
“도시 바깥에서... 돈을... 구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시 바깥에서 돈을 어떻게 구해?”
“어, 음... 그러니까... 외지인이나 화전민들의 금품을 갈취해서... 그렇게...”
“...!”
길드장의 답변을 들은 겔베르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용병 놈들이 도적질을 해서 먹고 살았다?”
“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도박장 관리라던가, 시장 상인들한테 자릿세를 받는다던가...”
“이런 미친 새끼들이... 그건 그냥 도둑 길드잖아!!!”
길드장의 말에 격분한 겔베르트가 발을 구르며 호통을 쳤다.
용병이란 놈들이 도둑놈들이나 할 짓거리를 하며 살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같은 용병인 겔베르트의 마음에 크나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겔베르트로 하여금 푸른 방패의 활동 등록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목적을 만들어냈다.
“야.”
“에... 예, 예?”
두려움 가득한 길드장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겔베르트가 말한다.
“너, 그 자리 내놔야겠다.”
“...!”
“키르헨 용병 길드장 자리. 오늘부터 내가 앉는다.”
***
“... 그렇게 된 거군요?”
길드 사무소 건물에서 만난 겔베르트에게 갑작스러운 ‘길드장 취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긴 한데,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결과였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겔베르트를 통해 키르헨, 더 나아가 다닐렌츠 전역의 용병 장악력을 높일 수 있다면 영지의 사업을 추진하는데 장기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미안하다, 데미언.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 하는데...”
“하하, 아니예요. 잘 하셨어요.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키르헨에서 활동하는 용병 놈들, 싹 한번 정리하기로 했다. 싹수 보이는 놈들은 푸른 방패에서 신입으로 받거나 길드 직원으로 넣을 거야.”
“음, 좋네요.”
“그렇다고 다른 용병대 다 조지겠다는 얘긴 아니고. 뒤 털어봐서 갱생이 안 될 정도의 쓰레기 같은 놈들만 조지고 나머지는 놔둬야지. 우리만 독점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과적으로 키르헨 용병 업계는 푸른 방패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원들 하나하나의 전투 역량이 넘사벽 수준이니까...’
풍부한 실전 경험에 더해 내가 쾨니히슈타인에서 돈을 퍼부어 장만해준 고급의 전투 장구까지 갖추고 있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다.
푸른 방패의 간부진은 물론이고, 평대원들조차 키르헨에서 활동하던 기존 용병들의 기량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
상황이 이러하니 푸른 방패와 기존 용병들의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되는 거다.
‘자연스럽게 키르헨 용병 업계는 푸른 방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닐렌츠 측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당한 군사력을 갖게 되는 셈이다.
아, 그렇다고 내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하겠다는 얘긴 아니고.
그저 머릿속에 구상 중인 여러 사업의 추진에 큰 도움이 될 거란 얘기다.
“아, 그리고... 푸른 방패 대장 자리는 메이슨 녀석한테 넘기기로 했다. 길드 상황이 너무 개판이라서, 그쪽 일만 하기도 벅차거든.”
“아하, 그럼 이제 대장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요?”
“어, 이젠 길드장이지. 나도 너처럼 푸른 방패에서 잘렸다.”
그 말을 전하며 씨익, 웃음을 보이는 겔베르트였다.
“무슨 소리예요, 잘리다니. 일개 용병대장에서 한 도시의 용병 길드장이 된 건데. 이런 건 영전했다고 해야지.”
“아, 그런가? 하긴, 너도 일개 용병에서 영지 이름을 박은 상단의 대장 자리로 옮겼으니 영전이 맞겠다. 하하하!”
겔베르트의 말처럼, 나는 푸른 방패에서 탈퇴해 새로 만들어지는 ‘다닐렌츠 상단’의 초대 상단장(商團長)이 되었다.
상단장은 상단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였고 상단주(商團主)인 다닐렌츠의 영주, 구스타브 남작을 제외하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 위치였다.
허나 남작이 나에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며 모든 권리를 위임했기에, 사실상 내가 상단의 유일무이한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긴, 내가 상단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다 댔으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게 맞잖아?’
아, 그리고... 푸른 방패에서 ‘잘린’ 사람이 우리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그나저나 막내는 영주님 저택으로 들어갔나요?”
“아, 내일 들어간다더라. 그 얘기 듣고 신나서 짐 싸던데? 니나 아가씨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게 됐다고.”
푸른 방패의 막내이자 홍일점이었던 아린.
나는 데론과 니나에게 아린을 니나의 호위로 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현재 니나의 호위로 있는 아드리안보다 아린의 기량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호위대상인 니나와 같은 여자라는 점이 더 큰 장점이었다.
남자인 아드리안은 알지 못하는, 같은 여자이기에 도와줄 수 있는 부분들까지 아린이 챙겨줄 수 있을 테니까.
데론과 니나는 기존의 호위를 담당하던 아드리안과 오랜 상의 끝에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아린은 니나의 새로운 호위가 되었다.
“어휴, 그동안 냄새나는 아저씨들 틈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아린과 니나 아가씨,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겁니다.”
“좋네. 안 그래도 서로 엄청 챙기는 사이잖아.”
“예, 아린이 잘 해줄 겁니다.”
아린의 아버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은 국왕의 곁을 지키는 왕국 최고, 최강의 검.
그런 아버지의 핏줄을 이었으니, 아린 역시 최고의 호위기사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도 나름 가업을 이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재밌네.’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에 피식 미소를 짓는데, 겔베르트가 질문을 던져왔다.
“너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냐? 정보 공유 좀 하자.”
“아, 예. 일단 한 달 정도 후엔 상단 건물 공사가 끝날 것 같고요, 상단에서 쓸 마차도 그때쯤이면 제작이 끝날 것 같습니다. 상단에서 직원들은 지금 계속 모집 중이고요.”
“음, 한 달이라... 슬슬 봄바람 불겠네. 그럼 그쯤 해서 몬스터 잡으러 나가는 거냐?”
“그렇게 되겠죠? 그 일정 맞춰서 푸른 방패랑 용병들 준비해주세요, 겔베르트 ‘길드장님’.”
나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대답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데미언 ‘상단장님’. 하하하하!”
***
한 달이 지났다.
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간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동안 나는 상단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리고, 도시 바깥 외진 지역에 몬스터 도축장 시설을 마련하고, 상단 마차를 제작하고, 상단에서 일할 직원들이 고용했다.
덕분에 빵빵하던 내 돈주머니가 홀쭉하게 변했더랬지.
그 외에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눈빛이 검게 변할 정도였다.
아마 나를 돕기 위해 다닐렌츠 영주가 보내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일을 시간 안에 다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부탁하신 업무는 제가 잘 정리해서 내일까지 상단장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예, 서기관님. 감사합니다.”
“하하하, 뭘 감사씩이나.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그간 몇 년 동안이나 꿈만 꾸던 일이 상단장님이 오신 뒤 한 달 만에 이만큼이나 진행이 되는군요. 주 아르닌께서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 상단장님을 이리로 인도해주셨나 봅니다.”
새로 지은 건물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닐렌츠 상단 본부 2층의 접객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로,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검은색의 사제복과 목에 걸린 십자가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다닐렌츠 측에서 나를 돕기 위해 파견된 영지의 서기관이자 키르헨 성당의 주임신부, 세르지오(Sergio)였다.
그는 나보다 서른 살 이상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상단장님’이라는 존칭을 쓰며 나를 깍듯하게 대했다.
본래 성직자들이 그런 말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다닐렌츠 입장에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인 이유가 더 크겠지.
어지간한 영지에선 찾아볼 수조차 없는 상급 기사의 실력을 지닌 데다 다닐렌츠 상단의 설립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제공한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최대한 빨리 상단 일에 적합한 인재를 찾아서 서기관님의 고생을 덜어 드려야 할텐데...”
“하하하, 고생이라니요. 주 아르닌의 종으로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쓰임이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듣기만 해도 신성력이 차오르는 듯한 세르지오의 말을 들으며 미소 짓고 있는데,
똑, 똑, 똑-
누군가가 접객실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나는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접객실 너머 복도, 아니 상단 본부 건물 전체에 널리 뻗어있는 검성의 감각 덕분이었다.
하지만 의례적으로 누구인지를 물었고,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상단장님, 아드리안입니다.]
“어, 그래. 들어와.”
[예.]
철컥,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온 아드리안이 나와 세르지오를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상단장님, 몬스터 토벌 병력이 출발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아, 그래?”
나는 아린이 니나의 호위로 들어간 탓에 졸지에 백수 신세가 된 아드리안을 나의 비서 겸 호위로 고용했다.
또래 중 단연 발군이라 할 만한 검술 실력에 예의도 바르고, 눈치도 빨라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기에 제격이었다.
“이런... 서기관님, 제가 그만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예. 괜찮습니다. 저도 그만 성당에 가려던 참입니다. 같이 나가시죠.”
“예, 그럼...”
세르지오와 함께 상단 본부 건물 밖 마당으로 나와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여어, 상단장님!”
언제나 그렇듯 부러진 앞니를 내보이며 씨익 웃는 푸른 방패의 새로운 부대장 엔리케와,
“... 오랜만이다, 데미언.”
푸른 방패의 대장 자리에 오른 후 한층 더 묵직한 분위기를 지니게 된 메이슨,
“넌 어째 용병 일 할 때보다 상단 일하고 나서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많이 힘드냐? 어?”
그리고 키르헨 용병 길드의 수장, 겔베르트가 차례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 말 하시기는. 대장, 아니 길드장님도 얼굴이 말이 아닌데요?”
“어, 맞아. 아주 죽을 맛이다. 그래서 오늘 얘네 따라온 거야.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보려고.”
“길드장님께서 이렇게 솔선수범하시니 보기 좋네요.”
“아휴, 그럼. 우리 용병 길드의 최대 고객이신데, 잘 보여야지. 하하하!”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겔베르트가 자신의 뒤쪽에 긴장된 얼굴로 서 있는 몇몇 사내들을 소개한다.
“이쪽은... 우리 길드에 소속된 용병대의 대장님들. 자, 인사들 해.”
“처음 뵙겠습니다, 상단장님. 저는 가시나무 용병대를 이끄는...”
“용병대 키르헨의 방패에...”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용병대 핏빛 늑대의...”
땅에 이마가 닿을 듯 격하게 인사를 건네는 용병대장들.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나에게 저런 극진한 태도를 보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겔베르트가 얼마나 사전 교육(?)을 잘 시켰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런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고, 모두에게 전하는 짧은 연설을 마친 뒤 아드리안이 끌고 온 말 위에 올랐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자, 이제 돈 벌러 가봅시다!”
***
신성력(神聖歷) 783년 3월,
키르헨 용병 길드 소속의 4개 용병대로 구성된 몬스터 토벌군, 총원 68명.
출병(出兵).
< 상단 설립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