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업 개시 (2) >
남작령 루테니아(Rutenia)는 다닐렌츠 남동쪽으로 경계를 맞댄 영지였다.
영지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왕국 북서부 변경지역과 중부를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한 덕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바로 그 루테니아의 주도(主都)인 프롤린으로 향하는 가도 위.
남작령 다닐렌츠를 상징하는 하얀 늑대 깃발을 단 상단 마차 두 대가 쉴 틈 없이 덜컹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아, 진짜... 돈 많이 벌면 도로 정비부터 해야지. 어우, 멀미 나서 죽겠네.”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속이 뒤집힐 것 같았기에, 나는 더는 참지 않고 상단 마차에서 내려 걷는 쪽을 택했다.
“으... 죽겠다.”
“상단장님! 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허옇게 변해 마차에서 내려온 나를 본 한 사내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묻는다.
이번 상행의 호위 임무를 맡은 가시나무 용병대의 대장, 푸크만이다.
“아, 예. 멀미가 좀 나네요.”
“하아, 이런... 그게, 상단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 영지에 나 있는 길의 상태가 원체 좋지가 않습니다. 해서 마차를 타면 워낙 흔들리는 게 심한 터라...”
마치 도로의 상태가 안 좋은 이유가 자신의 탓이라는 듯, 한없이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푸크만이다.
“그러게요. 다닐렌츠에 처음 올 때는 걸어와서 몰랐는데, 똑같은 길을 마차를 타고 와보니 이건 뭐 지옥이 따로 없군요.”
“... 이런 건 저희가 먼저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좀 걷다 보면 속이 괜찮아지겠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님.”
“혹시 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나 저희 대원들한테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대화를 마친 푸크만이 나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현재 그와 나의 사이는 엄연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그러니 저런 깍듯한 태도가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참, 고개를 너무 숙여서 바닥에 머리가 닿겠네. 적당히 하시지...”
재밌는 사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대하는 푸크만의 태도가 이렇지 않았다는 거다.
***
총원 11명으로 구성된 가시나무 용병대.
그들은 푸른 방패가 용병 길드를 접수하기 이전 키르헨에서 활동하던 용병대 중 가장 임무 완수율이 높고 행실도 나쁘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 착실했던 과거의 이력을 인정받아, 가시나무 용병대는 새로이 키르헨의 용병 길드장 자리에 오른 후 서슬 퍼런 숙청 작업에 들어간 겔베르트의 ‘살생부’에서 살아남는 쪽에 이름이 적힐 수 있었다.
“어, 푸크만. 왔나?”
“예, 길드장님. 부르셨습니까?”
연락을 받고 잽싸게 달려간 용병 길드 사무소.
푸크만은 길드장 겔베르트를 보자마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휴, 뭘 그렇게 허겁지겁 뛰어와? 누가 보면 내가 되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겠네.”
“아,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에 바짝 긴장이 묻어 있구만.”
“...”
“자자, 일단 여기 앉아.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고, 일 때문에 불렀어.”
“아, 그렇습니까.”
“그래. 우리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품위 있게.”
“옙, 감사합니다.”
나이도 몇 살 더 많았고, 용병 경력 자체도 푸크만보다 선배 격인 겔베르트.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순수한 실력 그 자체만으로도 겔베르트는 충분히 푸크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수년간 키르헨의 용병 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존의 세력들을 단 며칠 만에 깨끗이 정리해버린 사나이.
그의 길드장 취임에 불만을 품고 떼거리로 몰려온 용병들을 무기도 쥐지 않은 맨손으로 모조리 땅바닥에 눕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후 푸크만은 겔베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얼마 전에 너희가 죽어라 때려잡았던 그 몬스터들, 대강 작업이 된 모양이다. 상단에서 가죽을 내다 판다데?”
겔베르트가 툭 던지듯 내어놓은 그 말의 의미를 푸크만은 바로 알아들었다.
“아, 상행 호위 임무입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구만. 맞아, 다닐렌츠 상단에서 루테니아로 상행을 나갈 거야. 호위 대상은 마차 두 대에 상단 직원이 일곱. 할 수 있지?”
“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푸크만과 그가 이끄는 가시나무 용병대는 루테니아로 향하는 다닐렌츠 상단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아, 가시나무 용병대가 와주셨군요.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상행 출발일 아침, 시간을 맞춰 상단 본부에 도착한 푸크만과 그의 부하들을 맞이해준 것은 다름 아닌 다닐렌츠 상단의 상단주인 데미언이었다.
“예, 상단주님. 저희 가시나무 용병대가 최선을 다해 안전한 상행이 될 수 있도록 지켜드리겠습니다.”
“하하, 말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시죠.”
“예, 그러시죠.”
딱 그 정도였다.
푸크만이 상단주 데미언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기본적인 예의만을 차린 수준이었다.
‘... 뭐, 나중에 길드장님한테 뒷말 안 나올 정도로만 하면 되겠지.’
이제 갓 성년이 되었다던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집안 자식이길래 그 어린 나이에 상단 설립 비용을 다 댈 정도의 재력을 가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푸크만의 눈에 데미언은 그냥 부모 잘 만나 인생 쉽게 사는 어린놈 정도로 보였다.
‘듣자하니 길드장 밑에서 용병 일도 몇 년 했다던데... 부잣집 도련님치고 특이한 이력이네.’
그래서 그런지, 지난 몬스터 토벌 작전 때도 두 사람은 격의 없이 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투 상황 벌어져도 짐은 되지 않겠군.’
존경하는 겔베르트가 밑에 두고 부리던 용병이면 적어도 기본은 한다는 뜻일 터.
몬스터나 도적들의 습격을 받는 상황에서 큰 도움은 못 되어도 발목 잡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크! 오크다!!!”
“전원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이이이이!!!”
“가시나무! 전열 정비! 전열 정비하고 집중해!!!”
상행을 출발한 지 반나절 정도 되었을까?
키르헨 남동쪽으로 한참을 내려가 만난 숲속에서 한 무리의 오크들이 튀어나왔다.
얼핏 봐도 열댓 마리 이상 되어 보이는 많은 숫자의 오크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오크의 숫자에 푸크만에 아찔한 위기감을 느끼던 그 순간,
푸화아아악!!!
“?!”
“이런 미친...?!”
푸크만과 그의 부하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 앞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칼질 한 번에 오크 여섯, 아니 일곱 마리가 동시에 머리통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야가 붉그스름하게 보일 정도였다.
“크륵?! 크와악!!!”
“크르르르... 크롸롹!”
이때다 싶어 숲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던 오크들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놈들이 믿고 있었던 수적 우위가 단숨에 의미 없게 되어버렸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이 새끼들, 숲속에 박혀 있다가 이때다 싶어서 뛰어나왔지? 근데 어떡하냐? 때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
오크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싱긋 웃는 사나이.
얼마 전 설립된 다닐렌츠 상단의 수장이자 얼마 전까진 ‘푸른 방패’의 이름 아래 싸움터를 누볐던 전직(前職) 용병 데미언.
그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오크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묻는다.
“참나... 기세 좋게 뛰어나올 땐 언제고, 이제 도망가려고?”
“크르륵! 크와아아!”
“크롸악!!!”
겁먹은 속마음을 숨기려는 듯 괴성을 질러보지만, 어딘가 맥이 풀린 듯한 오크들의 기세.
그 같잖은 짓거리를 더는 봐주고 있지 않겠다는 듯, 데미언이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다.
“내가 지금 업무 중이라 바쁘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줄게!”
휘우웅, 촤악!
“크롸아아아악!!!”
스걱! 스걱! 콰지직!
베고, 베고, 또 벤다.
단단한 근육질로 무장한 오크의 몸을 베어내는 것이 저렇게 쉬운 일이었던가?
사방으로 날리는 오크들의 팔다리.
어떤 녀석은 머리통이 쪼개져 쓰러졌고, 어떤 녀석은 상체와 하체가 깔끔하게 분리되어 무너진다.
다닐렌츠 상행단을 노리고 숲속에서 기세 좋게 튀어나왔던 오크 열여덟 마리가 토막 난 고깃덩어리가 되어 줄줄이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차 한 잔 마실 정도면 충분했다.
“후우... 아깝네. 이것도 다 돈인데.”
숲속 이것저것에 흩뿌려진 오크의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하는 데미언.
상단 마차에 가득 실려 있는 고블린과 놀의 가죽에 비하면 확실히 더 높은 갚을 쳐주는 것이 오크의 가죽이었다.
“확실히 오크는 숲속 깊은 데나 들어와야 있는 건가... 다음에 사냥 나갈 때 참고해야겠네.”
지극히 평온하고, 지극히 태연한 모습.
오크를 썰어 넘긴 것이 아니라 숫제 당근이나 감자 같은 식재료를 다듬은 듯한 차분한 음성이었다.
“흐음... 오크 가죽이 좀 아깝지만, 피 뚝뚝 흘리는 걸 마차에 같이 싣고 살 수는 없으니 과감하게 버립니다. 자아, 다닐렌츠 상단! 다시 이동합시다!”
***
“... 확실히 그 이후에 날 대하는 게 달라졌지.”
숲속에서 나온 오크들을 단숨에 토막 쳐 버린 이후, 나를 대하는 푸크만과 가시나무 용병대원들의 태도는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뭐, 그전에도 나한테 싸가지 없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놈들이었으면, 오크 써는 걸 보여주기도 전에 나한테 죽탱이가 날아갔겠지.
그냥 딱 고용주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만 지킨다, 이 정도였는데 내가 오크를 족치는 모습을 본 이후엔 무슨 왕족이나 귀족을 대하듯 쩔쩔매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가끔은 너무 과하게 긴장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 긴장하면 호위하는데 집중력도 올라가고 좋지 뭐.”
나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단주님, 저기...”
봄을 맞아 하나둘씩 피어나는 길가의 들꽃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한껏 예의를 차린 표정을 한 푸크만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음?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저기, 앞쪽을 보시면...”
“앞? 앞이요? 왜... 아하!”
손을 들어 우리가 이동 중인 길의 앞쪽을 가리키는(심지어, 그는 두 손을 ‘공손하게’ 함께 들고 있었다!) 푸크만.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 진 하늘 아래, 회백색 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도시의 성벽이 보였다.
“아, 도착했군요?”
“예, 맞습니다. 저곳이 바로...”
여전히 나에 대한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푸크만이 말한다.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입니다.”
***
“우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 식사부터 하시고 숙소에서 푹 쉬도록 합시다.”
“예, 상단주님.”
“고된 여정에 많이 힘드시겠지만, 가시나무 용병대 측에선 밤 동안 상단 마차의 경비를 부탁합니다.”
미안함을 한 스푼 정도 섞어 말하는 내 표정에 감동한 것인지, 푸크만이 고개를 저으며 냉큼 대답한다.
“힘들긴요, 그게 저희의 일입니다. 조를 나눠서 상단 마차 주변의 경계 근무를 세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해가 뜨면 우리 상단 직원들이 일어나서 장사 준비를 할 테니, 그 전까지만 마차를 지켜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나는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프롤린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보자, 이 근처일 텐데...”
나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번화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즐비하게 놓인 여러 가게의 간판을 들여다보았다.
“여긴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이십 분여.
마침내, 내가 찾던 그 이름을 새긴 간판이 눈앞에 등장했다.
“오, 찾았다!”
나무로 만든 낡은 간판 위에 새겨진 술집의 이름.
[프롤린의 정원]
술집 이름치고 무척이나 우아한 단어 선택에 작게 웃음을 흘리며,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는 술집의 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 영업 개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