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업 개시 (3) >
내가 술집 ‘프롤린의 정원’을 찾아온 것은, 어떤 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흐음... 진짜 여기 있으려나?”
왁자지껄한 술집 이곳저곳을 살폈다.
내가 알고 있는 원작 소설 속 모습 그대로를 갖춘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 저기 있네.”
원작 소설 속에 표현된 내용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사내 하나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비쩍 마른 몸에, 키는 또 껑충하게 크다.
얼굴만 보면 부잣집 도련님처럼 하얗고 곱상한 인상인데, 다듬은 지 한참을 되어 보이는 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지저분한 느낌을 주었다.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투박한 만듦새의 옷엔 대체 뭘 하다 왔는지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와 막노동꾼의 분위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기묘한 느낌의 사내.
그리고 나는, 저 사내의 이름을 알고 있다.
“술 마실 친구 하나 없는 것까지 원작이랑 싱크로 완벽하네. 그럼 일단... 인사부터 해볼까?”
마침 또 일이 잘되려고 그런 것인지, 사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말고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앉아도 될까요? 술집에 자리가 없어서...”
“... 음?”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이가 다가와 자신이 있는 테이블에 앉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하, 죄송합니다. 합석을 좀... 대신,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어, 합석은 상관없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는 사내.
가만히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 성년 지난 거 맞습니까? 아무래도 어려보이는데, 얼굴이 엄청 앳되고... 미성년자는 술 마시면 안 되잖아요?”
“예에? 하하하!”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원칙을 따지며 바른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이 원작 속에 묘사된 성격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올해로 성년이 됐습니다.”
“아, 예... 뭐 그럼... 괜찮겠죠.”
묘하게 기운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여기, 맥주 두 잔 가져다주세요!”
***
“그래서... 후우! 내가... 여기, 왔어요! 왔는데에... 이게 참,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더라고요...!”
술을 대체 몇 잔이나 먹는 것인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사내가 흐트러진 말투로 신세 한탄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그렇군요. 고생이 정말 많으셨네.”
나는 적당히 듣기 좋은 대답을 해가며 계속해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오늘 처음 만난, 심지어 새파랗게 어린 얼굴을 한 나를 상대로 몇 시간 째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평소에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듯싶었다.
“근데 씨이... 기껏 가문에 큰소리치고 나와서 한다는 일이... 하아! 상단 창고지기예요, 창고지기! 푸후우...! 내가, 이러려고 십 년 가까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교수들 뒤치다꺼리하고오... 그렇게 산 게 아닌데에...!”
혀가 아주 제대로 꼬부라졌다.
안 그래도 덥수룩해 너저분했던 사내의 머리는 신세 한탄하며 계속 쥐어뜯은 탓에 더욱 엉망이 되었고, 눈동자는 초점이 나가 있다.
그러더니만,
쿠웅-!
결국,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고야 만다.
“아이고, 세게도 박았네. 내일 아침에 이마 좀 아프겠다.”
결국 술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진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남아있는 술잔 속의 술을 비우기 시작한다.
“술 취해 떠드는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찾던 그 양반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탁-
깨끗하게 비운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당신들은 이 아저씨한테 무슨 용건인데?”
“...?!”
한껏 싸늘해진 내 시선의 끝에, 험상궂은 인상을 한 세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
파스칼 긴터(Pascal Ginter).
올해 나이 서른넷이 된 그는 왕국 북부 블레딘베르크 영지의 유명한 기사 가문인 긴터 가(家)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검술보단 책을 보며 공부를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보통의 기사 가문이었다면 검을 휘두르는 것에 영 흥미가 없는(더불어 재능도 없는) 자식의 미래를 크게 걱정했을 테지만, 파스칼에겐 그를 대신해 가문을 이을 형님이 둘씩이나 있었다.
이런 사정 덕분에 파스칼의 부모는 막내아들에게 굳이 검을 들라 요구하지 않았다.
하여 파스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가문 대대로 검의 재능을 이어온 무가(武家)인 긴터 가문에서 나왔다기엔 기이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파스칼.
더 많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파스칼은 성년이 되자마자 왕국 북부 최대의 영지인 라이에른-팔츠의 주도, 루덴스부르크(Ludensburg)로 유학을 떠났다.
왕립 카를리온 대학교와 함께 왕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불리는 루덴스부르크 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파스칼.
그는 졸업 이후로도 몇 년간 더 루덴스부르크에 머물며 부족한 공부를 채운 뒤 부푼 가슴을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해온 명문 무가였으나,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형편 탓에 늘 더 큰 가문으로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던 긴터 가(家).
파스칼은 자신이 배워온 지식을 십분 활용해 가문을 중흥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날 때부터 무인으로 태어나 평생을 검의 길만을 걸어온 아버지와 형님들은 가문의 막내가 품은 꿈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족들과의 오랜 다툼에 지쳐버린 그는...
“가문을 떠나서 저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겠습니다.”
결국, 가문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봐 줄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던 파스칼.
하지만, 그의 높은 기대에 걸맞은 일자리를 찾은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오랜 기다림과 떠돌이 생활에 그는 점차 지쳐갔다.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북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파스칼.
그러던 그가 마침내 정착한 곳이 바로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이었고, 그중에서도 루테니아 최대의 상단이라 불리는 콜티츠(Choltitz) 상단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상단 창고에 들어오고 나가는 수많은 상품의 출납 내역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처음 그가 꿈꾸었던 일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자리.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고생과 방황으로 전에 없던 인내와 겸손을 배운 파스칼은 묵묵히 맡은 일을 해 나갔다.
주머니 속 송곳이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내듯, 자신의 재능이 빛을 발할 순간이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고, 지랄하고 있네. 야, 네가 공부를 얼마나 했건, 일을 얼마나 잘하건 그건 아무 상관 없어. 결국 이 상단의 윗선까지 올라가는 건, 콜티츠 가문의 피를 이은 놈들뿐이야! 꿈 깨 이 새끼야!”
언젠가 술자리에서 듣게 된 상단 동료의 폭언.
그 순간, 파스칼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상단에 들어온 이후 3년 내내 창고지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 그냥... 그냥... 아버지 말을... 들을 걸...”
무너진 제방의 틈으로 한꺼번에 물이 쏟아져 나오듯, 지난 수년간 애써 외면해왔던 후회의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그래서 술에 취하면 그나마 술기운에 기대어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원래도 술이 약했던 사람이 몸 생각을 하지 않고 술을 들이부으니 부작용이 더 컸다.
술이 덜 깬 상태로 어찌어찌 출근까지는 했지만, 멍한 정신 상태에 생전 안 하던 실수가 나왔다.
상단에서의 실수란 결국 금전적 손해로 직결되는 것.
그래 봤자 몇 푼 안 되는 손해이긴 했지만, 콜티츠 상단은 가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직원의 실수에 관대한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푼 두푼 자신의 돈으로 실수를 메꾸다 보니 모았던 돈이 다 떨어졌고, 파스칼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생활이 벌써 1년 여.
빛나는 꿈과 커다란 포부를 지니고 세상에 나왔던 재능 많은 청년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술에 찌든 한 명의 상단 노동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
“그래서, 이 아저씨가 생활비가 없어 그 쪽에게 돈을 빌렸다? 지금은 그 돈 수금하러 온 것이고?”
“그래. 그러니까, 네가 그 돈 대신 내줄 거 아니면 잔말 말고 비켜라. 괜히 다치기 전에.”
술 취해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내, 파스칼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왔다는 남자들.
험한 얼굴이나 거친 말투, 건들거리는 행동을 보니 대강 어디서 나온 놈들인지 알 것 같았다.
“얼마 빌렸는데?”
“뭐?”
“이 아저씨가 그쪽에 얼마 빌렸냐고. 한번 말해봐. 또 알아? 내가 대신 갚아줄지.”
“아니 근데 이 어린 놈의 새끼가 말을 싸가지 없게...”
“어이, 잠깐. 가만히 좀 있어 봐라, 새끼야. 여기 어린 도련님께서 돈 대신 갚아주신다잖냐. 응?”
일행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내 말투를 트집 잡으며 급발진하는 부하를 만류한다.
그래, 저게 바로 옳게 된 사채업자의 자세지.
돈만 받으면 과정이야 어쨌건 상관없다는 게 사채업자들의 기본적인 태도 아니겠는가?
능글거리는 말투와 날카로운 독사의 눈빛을 함께 지닌 덩치 사내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저 양반이 우리한테 빌린 돈이 10골드야. 그중에 절반은 갚았고, 이제 반이 남았지. 벌써 두 달을 밀렸어.”
“뭐야, 그럼 5골드? 겨우 그거 받자고 셋이나 몰려온 거야?”
파스칼이 진 빚이 겨우 5골드라는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작의 파스칼은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서 모진 구타를 당하고, 결국 발목이 부러져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게 된다.
‘근데, 그게 꼴랑 5골드였어?’
크다면 크다고도 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평생 절름발이로 만들 금액은 아닌 것 같은데.
원작에서 늘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던 파스칼의 모습을 떠올리니 갑자기 화가 치미는 나였다.
“어허, 계산이 그게 아니지. 5골드라니. 이자는 뭐, 무덤 속에 묻힌 선조들이 대신 내주나? 원금에 이자까지 더해서 계산해야지.”
“이자... 하긴, 도둑 길드한테 사채를 끌어다 썼으니 그게 한두 푼은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꺼낸 내 말에, 덩치 사내가 빛내며 묻는다.
“음? 도둑 길드? 우리가 어디서 왔다고 아까 말했던가?”
“그걸 꼭 말해야 하나? 당신에 얼굴에 쓰여 있잖아? 도둑 길드라고...”
“허...”
나의 당돌한 대답을 들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덩치 사내다.
“아무튼, 원금에 이자까지 다 합치면 얼마인데?”
“다 합쳐서... 40골드다. 어때? 생각보다 얼마 안 되지? 고작 여덟 배 밖에 안 되잖아. 흐흐!”
실실 웃으며 파스칼이 진 빚을 내게 말하는 덩치 사내.
제 딴에는 내가 액수를 듣고 기겁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자, 여깄다.”
휭- 쩔그렁!
“...?!”
“헉!”
내가 집어던진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돈을 확인한 놈들이 기겁한 표정을 짓는다.
싯누런 금화가 가득한 주머니.
대충 봐도 파스칼에게 받을 돈보다 많아 보이는 금화의 양이었다.
“어, 으... 이게, 어떻게...”
“왜? 놀랐어? 내가 돈이 많아서?”
“...”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에게, 나는 오만하게 다리를 꼬아 보이며 말했다.
“그거, 40골드보다 좀 더 들어있을 거다. 돈 거슬러 줄 필요는 없고, 대신 뭐 부탁 하나만 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한 말투.
무려 40골드나 되는 거액을 투척해놓고도 흐트러짐 없는 눈빛.
거기에 더해, 나는 일부러 숨기고 있던 강자(强者) 특유의 기운을 눈앞의 사내들에게 서서히 흘려보냈다.
“큽...!”
“어, 으흣!”
파스칼을 겁박해 돈을 받으러 왔던 도둑 길드의 사내들은 내게서 풍기는 맹수의 기운을 본능적으로 읽어내고 곧바로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역시 하는 일들이 어두운 쪽이라 그런가,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빠르네.
“뭐, 아니... 무, 무슨 일이십니까?”
“너희들 이 양반 집 어딘지 알지? 돈 받으러 몇 번 가봤을 거 아냐.”
“예, 알고 있습니다.”
“업어.”
“예?”
내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재차 묻는 덩치 사내였다.
“업으라고. 취한 거 안 보여? 집에 데려다주게, 업으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야, 이 새끼야 뭐해? 빨리 업어!”
“아, 알겠습니다!”
내게 풍겨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비틀거리며 서 있던 부하 녀석들이 허둥거리며 테이블에 엎어진 파스칼을 일으켜 등에 업었다.
“앞장서라. 아, 그리고... 내가 필요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내일 해뜨기 전까지는 받아봤으면 하거든? 아까 돈 많이 냈으니 그 정도 가능하지?”
내 말을 들은 덩치 사내가 즉각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려운 건 아니고.. 여기 콜티츠 상단이라고 있잖아? 걔네에 대한 정보가 좀 필요해.”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져다드리면 될까요?”
“음...”
덩치 사내의 질문을 들은 나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 적절한 답을 내어놓았다.
“여기, 이 양반한테 내일 술 깨면 가져다줘. 그러면 될 거야.”
< 영업 개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