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업 개시 (4) >
“아이고 머리야...”
앞뒤 안 가리고 들이부은 음주의 대가는 언제나 그렇듯 처참했다.
시야는 핑핑 돌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듯 울렁인다.
무엇보다도 사방에 가득한 술 냄새가 파스칼을 괴롭혔다.
사람 하나가 겨우 발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좁디좁은 공간.
이곳이 바로 콜티츠 상단의 창고지기, 파스칼 긴터가 사는 월세살이 단칸방이었다.
“어우, 으... 죽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탓에 밖은 어둡고 고요했지만, 곧 동이 트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는 아침의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후으...”
덜그럭,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물이 반쯤 채워진 물병을 집어 든다.
꿀꺽, 꿀꺽-
다급하게 들이켜보는 생명수.
쩍쩍 갈라져가던 목구멍에 잠시나마 생기가 도는 기분이다.
“아으... 돈도 없는 새끼가 대체 무슨 돈으로 그렇게 술을 퍼먹었냐. 파스칼, 파스칼아! 네가 진짜로 미쳤구나!”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다.
찰싹, 찰싹, 스스로의 뺨을 내리치며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갖는 파스칼.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어두컴컴한 술집의 불빛 아래서도 환히 빛났던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와 신비로웠던 녹색의 눈동자.
그리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운 목소리까지.
술집에 앉을 자리가 없다며 자신에게 다가와 합석을 부탁했던 수수께끼의 사내.
처음엔 돈 받으러 온 도둑 길드의 사람인가 싶어 경계했는데, 합석을 허락해준 대가로 술을 사겠다고 하여 냉큼 허락했던 기억이 난다.
“생긴 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 그 친구, 이름이 뭐였지?”
아니, 생각해보니 애초에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숙취로 깨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든 떠올려본 지난 밤의 기억.
이렇게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된 것도 인연이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자는 파스칼의 제안에 그 수수께끼의 어린 사내는 이렇게 답했다.
“하하, 다음에요. 다음에 우리가 또 만나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일지라도, 두 번째는 인연일 테니까요.”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일지라도, 두 번째는 인연일 거라니.
새파랗게 어린 얼굴을 한 주제에 어디 루덴스부르크 대학교의 나이 먹은 교수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뭐... 그냥 모르는 사람한테 이름 알려주기 싫었나 보네.”
여하간 재미난 간밤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응? 저게 뭐지?”
단칸방 문 앞에 못 보던 무언가가 놓여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파스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그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었다.
“... 종이?”
그랬다.
그 ‘무엇’의 정체는, 종이였다.
사락-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문 앞으로 다가간 파스칼이 허리를 굽혀 종이를 집어 든다.
“누가 문틈으로 밀어 넣은 건가... 욱! 으흡...”
숙취로 울렁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 뭐야 이거?”
그 내용은, 파스칼의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빚을... 빚을 다 갚았다고? 내가? 내가 빚을 갚았어? 언제?”
그 종이의 정체는 그가 도둑 길드에게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는 채무 변제 내용을 담은, 일종의 영수증이었다.
사채 특유의 살인적인 이자율로 인해 순식간에 40골드로 불어났던 그의 빚.
그 어마어마한 경제적 부담이, 하룻밤 사이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대체, 이게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돈을 갚은 적이 없는데?
넋이 나간 얼굴로 영수증을 바라보며 채 한참을 서 있던 파스칼.
자신에게 일어난 영문 모를 기적에 제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쾅쾅쾅!
“?!”
누군가가, 파스칼이 사는 단칸방의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어이, 아저씨! 아직 자고 있나? 일어나봐! 빨리!]
문을 열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
지난 몇 달간 지겹도록 그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던 도둑 길드의 깡패 놈들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돈을 갚으라며 갖은 협박을 해대던 놈들.
하지만 그런 놈들조차 잠은 소중했는지, 새벽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는데...
“근데 오늘은 왜...? 아, 혹시?!”
파스칼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채무 변제 영수증으로 향한다.
설마 이것 때문에 온 것인가?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다.”
애초에 빚을 갚은 적도 없는데 이런 게 있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다른 사람한테 줘야 할 변제 영수증이 나한테 잘못 온 건가...”
잠깐이나마 누렸던 기적의 달콤함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현실의 씁쓸함이 채운다.
쾅쾅쾅!
[문 안 열어? 부수고 들어간다? 빨리 열라고!]
“지, 지금 문 열게요!”
철컥, 끼이익- 쾅!
“아이씨! 급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어?”
파스칼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득달같이 방 안으로 들어온 도둑 길드 소속의 깡패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성질을 부린다.
“미, 미안합니다. 자고 있었던 터라...”
“아, 맞다. 그랬지? 그건 좀 미안하네. 술은 좀 깨셨고?”
“예? 아니, 제가 어제 술 마신 건 또 어떻게...”
놀라서 묻는 파스칼의 말에 깡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걸 어떻게 모르나? 내가 아저씨 술집에서 업고 여기까지 데려다 놨는데.”
“예?”
눈앞의 깡패가 술 취한 자신을 업고 집에 데려왔다는 말을 들은 파스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말에 비하면 깡패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 일은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었다.
“어, 변제 영수증 확인했네? 그래, 아저씨 이제 빚 다 갚았으니까 우리 서로 볼 일 없을 거... 아니지, 또 돈 빌릴 일 있으면 보겠구나? 으흐흐! 혹시 또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라고!”
“예? 빚을 다 갚아요? 제가요? 대체 언제...”
“정확하게 말하면 아저씨가 갚은 건 아니지. 어제 아저씨랑 같이 술 마시던 그 잘생긴 ‘분’ 있잖아, 눈동자 초록색이던... 그분이 대신 갚았지.”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제 자신과 함께 술을 마셨던, 그 정체불명의 금발 사내가 자신의 빚을 갚아주었다고?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어... 그, 어...”
“엄청 놀란 모양이네? 그러게, 우리도 놀랐어. 보니까 서로 처음 본 사이 같던데...”
“그, 그분은 누구십니까? 어디에 계시죠?”
파스칼의 입에서 나는 지독한 술 냄새 때문이었을까?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던 깡패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파스칼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받아.”
“... 이게 뭡니까?”
“아저씨 빚 대신 갚아준 분이 우리한테 부탁하셨던 거야. 그쪽 손에 들려서 가져다 달라고 하시더군. 도시 광장 서쪽에 있는 ‘사슴뿔’ 여관 알아? 거기로 가져다주면 돼.”
“그 여관에, 제 빚을 대신 갚아주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리로 오라고 했을 거고... 아!”
아주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듯, 깡패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으씨, 제일 중요한 얘기를 빼먹을 뻔했네. 이거, 해뜨기 전까지 그분한테 가져다줘야 하거든? 그러니까...”
“...?”
점차 밝아오는 창문 밖의 풍경을 곁눈질한 깡패가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뻘리 여관으로 출발해. 지금 당장!”
***
아두웠던 새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온다.
“아이고, 졸려...”
“으흐, 피곤하다!”
“잘 잤어?”
“잘 자긴, 네가 코 골아서 밤새 설쳤다 인마!”
“어이쿠, 내가 엄첨 피곤했나보네... 미안허이!”
완전히 동이 트기 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다닐렌츠 상단의 직원들.
여관 1층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간 그들이 누군가에게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아이고, 간밤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어, 일어들 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상단 직원들의 인사를 받은 이들은, 바로 밤새 돌아가며 상단 마차를 지켰던 가시나무 용병대의 용병들.
차가웠던 새벽 공기에 내내 시달렸기 때문인지 빨갛게 변한 코끝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반갑게 직원들의 인사를 받는다.
“하하, 고생은 무슨... 이게 우리가 하는 일 아닙니까?”
“원래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힘든 게 어디 가는 건 아니죠. 마차 지킨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서 좀 쉬시고 출출하신 분들은 식당에서 아침 챙겨 드십시오. 계산은 저희 쪽에서 할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용병들과 자리를 교대한 상단 직원들이 밤이슬을 피하려 마차에 씌워두었던 천막을 벗기는 등 본격적인 장사 준비에 들어간다.
“이쪽으로 벗기자고. 자, 하나, 둘!”
“이걸로 충분할까? 잔돈이 좀 모자랄 것 같은데...”
“야, 여기 식당 종업원한테 말해서 말들 먹일 여물 좀 더 내어 달라고 해라. 애들 허기져 보여. 이따 하루종일 시장 바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밥이라도 잘 먹여야지!”
오늘은 ‘신생(新生)’ 다닐렌츠 상단이 처음으로 상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
시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흥분과 중압감을 느끼며, 직원들은 바쁘게 손과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
“잘들 하고 있네.”
사슴뿔 여관의 2층에 자리한 어느 객실.
나는 창문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상단 직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언제 오려나... 아?”
저기 오네.
멀리, 우리 상단이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엉망으로 떡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멀리서 보니 더욱 티가 나는 마른 체구.
지난밤 나와 술자리를 가졌던 콜티츠 상단의 창고지기, 파스칼 긴터였다.
“저 양반, 어제 술을 그렇게 먹어 놓고... 힘들지도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뛰면 안 될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파스칼이 갑자기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근처 골목길로 달려 들어간다.
그리고...
[우윽! 우웨에에엑!!!]
내가 예상했던 상황이, 곧바로 이어진다.
“... 이럴 땐 귀가 좋은 것도 문제네.”
골목길 너머에서 들리는 파스칼의 힘겨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파스칼이 오는 것을 보고 여관 1층으로 미리 내려가 있던 나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웃는 얼굴로 다가가 인사를 전했다.
“제가 어제 말씀드렸죠?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일지라도, 두 번째는 인연일 거라고.”
“...”
“이제 인연이 되었으니, 통성명을 하죠. 반갑습니다, 다닐렌츠 상단의 상단장을 맡고있는 데미언이라고 합니다.”
“... 사, 상단장님이요?”
예상치 못했던 나의 정체에 놀란 파스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데, 내가 한 걸음을 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파스칼 씨. 어제 술 많이 드셔서 속이 말이 아니실 테니, 해장부터 하시죠. 오늘 아침으로 나온 스튜가 아주 따뜻하고 좋더군요.”
“어, 예예.”
감히(?) 뿌리칠 수 없는 제안에 이끌려 홀린 듯이 식당 테이블에 앉은 파스칼.
“이건, 저한테 줄 물건이겠죠?”
“예? 어, 예예. 여기 있습니다.”
사락-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 뭉치, 즉 콜티츠 상단의 정보가 담긴 도둑 길드의 문서를 건네받아 살피고 있는데, 푸석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던 그가 힘겹게 입술을 떼어 내게 묻는다.
“대체 왜... 왜 제가 진 빚을 갚아주신 겁니까?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데...”
말 그대로 술 먹다가 처음 만난 사이인데, 40골드나 되는 빚을 갚아준다?
파스칼의 입장에선 내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거다.
아니면 그냥 돈 많은 미친놈의 치기 정도로 보겠지.
하지만...
‘... 파스칼 긴터, 당신이 모르는 게 두 가지 있어.’
그중 하나는, 어제 나를 처음 만난 파스칼과 달리 나는 파스칼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거는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는 내용이고.
내가 지금 파스칼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두 번째 비밀뿐이었다.
“누가 그럽니까? 내가 빚을 갚아줬다고? 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
“예?”
멍청하게 되묻는 파스칼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저는 빚을 갚아준 게 아니라, 파스칼 씨의 시간을 산 겁니다. 그 깡패 놈들에게서요.”
“시, 시간을 사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이 양반, 술이 덜 깼나.
영 상황 파악을 못 하는 파스칼을 위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파스칼 씨, 지금 콜티츠 상단으로부터 받는 봉급이 얼마죠?”
“보, 봉급 말입니까? 월에 180실버 입니다만...”
내 기세에 눌린 것인지, 민감한 돈 얘기를 술술 털어놓는다.
“180실버라... 흠, 거기에 120실버를 더해 총 300실버를 파스칼 씨의 월급으로 챙겨드리겠습니다. 그중에 100실버만 가져가시고, 200실버는 저한테 돌려주시죠.”
“아니, 지금 무슨 소릴...”
“제가 파스칼 씨를 대신해 도둑 길드에게 상환한 금액이 40골드, 은화로 4000실버이니... 매달 200실버 씩 밀리지 않고 갚는다고 치면 20개월, 1년하고도 8개월이면 다 갚을 수 있겠군요?”
“...?!”
그제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깨달은 파스칼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지금 하고 계신 콜티츠 상단의 일, 그만두시고 다닐렌츠 상단으로 와서 일하십시오. 딱 20개월 채우고 저에게 진 빚을 갚은 다음, 그 뒤에 다닐렌츠 상단에 남든 떠나든 하시죠. 선택은 자유입니다.”
< 영업 개시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