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80화 (76/197)

< 영업 개시 (5) >

“오, 이거 고블린 가죽이네요?”

“예, 맞습니다. 얼마 전에 잡힌 놈들이라 가죽 상태도 좋습니다.”

“어이구, 엄청 많네? 가격도 착하고...”

“하하하, 그렇죠? 품질도 훌륭합니다.”

“음, 그래요... 일단 알겠습니다.”

“저기, 손님? 좀만 더 살펴보시죠!”

“나중에요. 나중에 다시 들를게요!”

“아저씨, 이건 놀 가죽이죠? 이건 얼마에 파나?”

“아, 놀 가죽이요? 그건 장당 8실버로 드리고 있습니다.”

“8실버? 우와, 엄청 싸게 파시네. 다른 곳보다 2, 3실버는 싼데?”

“예, 그렇죠? 저희가 물량이 꽤 되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합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구경 잘 했습니다.”

“아잇, 손님! 손니임!”

프롤린 시내에 자리한 시장.

우리 다닐렌츠 상단은 그중에서도 대장간들이 자리한 골목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몬스터 가죽 판매의 주요 고객이라 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어때, 장사가 좀 되나?”

장사 시작 후 한 반나절쯤 지났을까?

상단 마차에 기대어 직원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이번 상행의 실무진 리더 역할을 맡은 직원을 불러 물었다.

“어, 그게...”

내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 입술을 훔치는 직원.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으며 말했다.

“뭘 또 그렇게 긴장을 하고... 아이고, 편하게 말해요, 편하게. 내가 때릴까 봐 그래요?”

“아, 아닙니다!”

“차분하게 한 번 생각한 걸 얘기해보세요. 지금 상황이 어때요?”

“음... 사실, 생각했던 것만큼 저희 상단 물건이 잘 팔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나도 진작에 알아봤다.

와서 구경하는 사람은 많은 데 반해, 실제로 물건을 사서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거든.

“우선 몬스터 가죽 판매에 있어 가장 큰손이라 할 수 있는 대장간 주인들의 반응이 뜸합니다.”

“대장장이들이 우리 물건을 안 산다... 이유는? 우리 물건에 하자가 있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가져온 가죽이 시세보다 가격도 싸고, 품질도 나쁘지 않은데 선뜻 손을 대지 않는 거 보면...”

“흐음, 대체 이유가 뭘까요?”

우리 두 사람의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제가 대답 드리겠습니다.”

“...?”

“?!”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린 우리 두 사람의 시선 끝엔...

“오!”

“아니...?!”

아침에 보았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오셨군요.”

“다녀왔습니다, 상단장님.”

내 앞으로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내.

지저분했던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깔끔히 정리하고 돌아온 콜티츠 상단의 창고지기, 파스칼 긴터였다.

그는 다닐렌츠 상단으로 들어와 일하라는 나의 영입 제안(이라고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을 들은 후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요청했다.

콜티츠 상단과의 고용 관계를 정리하고 오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하시라고 말하고 보내주었더니만, 그동안 살던 월세방을 정리하고 너저분했던 외모까지 깔끔하게 만들어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에 그걸 다 했어?’

이 사람, 어제 내 앞에서 술 퍼먹으며 신세 한탄하던 사람이랑 동일인이 맞는가 싶다.

역시 원작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하던 네임드 캐릭터는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

“이야, 머리랑 수염 정리하신 거 보니까 아까랑 인상이 아주 딴판이시네요. 자세히 안 보면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하하,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는 것인 만큼 깔끔한 모습으로 시작하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예, 상단주님.”

다른 직원들과도 오전 중에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굳이 파스칼의 소개를 할 필요는 없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직원을 다시 일터로 돌려보낸 후, 나는 파스칼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상단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장사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자신 있는 건 사실 이쪽이죠.”

툭툭, 나는 내 허리춤에 걸린 검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파스칼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하하, 저 따라다니던 도둑 길드 깡패들이 상단장님에게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이 분은 장사보단 주먹 쓰는 것에 더 능한 분이시겠구나’ 하고요.”

“이런, 같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 정체를 들켜버렸군요.”

파스칼의 말을 들으며 농담으로 대답하다, 문득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파스칼 씨. 이렇게 장사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 없는 상사를 모시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와 달리 한껏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파스칼 역시 몸가짐을 바로 하며 대답한다.

“제가 모실 상사가 장사에 대해 잘 아는지 모르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장사는 제가 잘 아니까요. 저에게 중요한 건, 저를 믿고 제게 상단의 일을 맡겨주실 수 있는 상사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헌데...”

다시 얼굴 가득 미소를 피워낸 파스칼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 이제, 그런 분을 만난 것 같네요.”

***

나는 파스칼과 함께 시장을 벗어나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몬스터 가죽을 사고파는 업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품목은, 바로 오크 가죽입니다.”

콜티츠 상단의 허름한 창고에 몇 년간 처박혀있던 울분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걸어가는 내내 파스칼은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투머치 토커’인 그였다.

“고블린이나 놀의 가죽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구성이 부족해 갑옷이나 투구 같은 무구들을 만드는 것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방어구를 만들려면 최소한 오크 이상의 중형급 몬스터 가죽이 필요하죠.”

“음... 그럼 고블린이나 놀 가죽은 많이 잡아봤자 필요가 없다?”

내 질문을 들은 파스칼이 고개를 흔든다.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고블린이나 놀의 가죽도 쓸모가 많습니다. 전투용 장구를 만드는 것에만 적합하지 않을 뿐이지, 일상생활에 쓰는 정도의 가죽 제품들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질감이 좀 뻣뻣하지만 소가죽보다 나은 점도 많으니까요.”

“그럼, 왜 사람들이 우리 상단의 가죽을 사지 않는 겁니까?”

“그건, 프롤린 시내 대장간들에 가죽을 공급하는 콜티츠 상단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콜티츠의 눈치를 본다?”

“예. 프롤린 시내에 공급되는 오크 가죽은 모두 콜티츠 상단을 통해 들어옵니다. 상단장님도 아시겠지만, 오크 가죽은 고블린이나 놀 가죽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죠.”

“아...”

내가 장사에 대해 하는 건 없지만, 파스칼이 지금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가 갔다.

고블린이나 놀 정도의 소형 몬스터들은 아주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놈들이 아닌 이상 힘 좀 쓰는 동네 청년들이 여럿 몰려가면 어찌어찌 사냥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오크는 달랐다.

고블린이나 놀에 비해 덩치도 훨씬 크고, 지능도 높은 중형 몬스터인 오크.

놈들은 인간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억센 근육과 막강한 체력, 맹수들조차 주눅 들게 만드는 포악함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은 병사나 베테랑 사냥꾼일지라도 함부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오크는 기본적으로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몬스터.

나타났다 하면 최소한 대여섯 마리는 기본으로 뭉쳐 다니는 게 오크들의 습성이었다.

규모가 작은 소형 용병대들이 오크 사냥 의뢰는 함부로 받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즉, 오크 가죽을 구하려면 막대한 무력(武力)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나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그럼 콜티츠 상단은 그 권력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까?”

“예. 콜티츠 상단은 루테니아 영지군이 몬스터 토벌을 할 때마다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단독으로 처리, 판매하여 그 수익의 일부를 가져갑니다.”

“아하?”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단에겐 어마어마한 이익이죠. 독점이라는 조건이 지닌 힘이 있으니까요. 콜티츠 상단이 루테니아 영주에게 뇌물을 바치고 얻어낸 권리입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건 오크 가죽 얘기잖아요? 고블린이나 놀 가죽이랑은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내 질문을 들은 파스칼의 눈빛이 조금 차갑게 변한다.

대체 뭔 대답을 하려고?

“만약 어떤 대장간에서 콜티츠 상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산 고블린이나 놀 가죽을 쓴다는 얘기가 나오면, 그 즉시 콜티츠 놈들은 그 대장간에 오크 가죽 공급을 끊을 겁니다.”

“...!”

“오크 가죽으로 만든 기본적인 무구조차 팔지 않는 대장간이라면... 바닥에서 장사 못 하죠. 그게 무서워서 대장간의 주인들은 콜티츠 상단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합니다. 이건 몬스터 가죽뿐만 아니라 다른 품목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허! 가진 놈이 더하다더니, 이건 뭐...”

“이게 바로 콜티츠 상단이 오랜 세월 동안 프롤린 제일의 상단 자리를 지켜온 방식이죠. 치사하고 비열하지만, 효과가 확실한 방식입니다.”

“이런...”

파스칼의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서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들의 권모술수, 이런 건 나랑 안 맞는 쪽인데 말이지.

그런 내 모습을 본 파스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이곳으로 상단장님을 모시고 온 겁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물었고, 파스칼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첫 고객이 될 분들이 계신 곳이죠. 자, 들어가실까요?”

***

이자벨(Isabel)은 루테니아 영지에 적을 두고 있는 보크 상단의 주인이었다.

‘보크(Bock)’라는 상단의 이름은 그녀의 고향인 루테니아 남부 지역의 마을 이름 보크에서 따왔다.

그녀의 부모는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였다.

그녀의 부모뿐만 아니라 보크 마을의 주민 중 많은 수가 가죽 다루는 무두장이 일을 해 먹고 살았다.

즉, 무두장이 일이 일종의 가업(家業)이자 지역을 먹여 살리는 산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가죽을 다루는 일보다 부모님과 이웃 어른들이 만든 가죽 제품을 좋은 값에 파는 일에 더 흥미를 보였다.

결국,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딴 작은 상단을 만들었고, 마을에서 생산된 가죽 제품을 매입해 도시로 가져다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무두장이인 부모를 둔 탓에 질 좋은 가죽을 알아보는 눈이 탁월한 그녀였다.

사업 초반엔 여러 실패를 겪으며 좌절도 했지만, 이자벨은 어렸을 적부터 열심히 길러온 상인으로서의 꿈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꿋꿋이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여, 상단 설립 5년 차가 된 지금에 와서는 꽤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궤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 이대로는 안 돼. 장사의 규모를 더 키우지 못하면, 결국 구멍가게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탁!

손에 들었던 상단 매출 내역서를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내던진 이자벨이 갑갑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싼다.

“팔 물건만 있으면 어떻게든 다른 도시나 다른 영지 쪽으로 활로를 뚫어 볼텐데...”

하지만, 팔 물건이 없다.

프롤린에서 유통되는 몬스터 가죽의 대부분이 콜티츠 상단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이라고는 그저 상단주인 자신을 포함해 열 명 남짓한 수준인 군소 상단 보크의 입장에선 콜티츠가 쓸어가고 남은 부스러기나 주워 먹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이 이상으로 상단을 키우기 위해선 부스러기 이상의 ‘큰 덩어리’가 필요했다.

“하아... 그렇다고 당장 우리가 칼 들고 몬스터 사냥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결 방안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깊어지던 그때...

“상단주님? 상단주님을 뵙겠다는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누군데.”

손님이 찾아왔다는 상단 직원의 목소리에, 이자벨은 별생각 없이 대답을 던졌는데...

“저, 그게... 마차 두 대 분량의 고블린과 놀 가죽을 판매하러 왔다고 합니다. 근데, 손님 말로는 그 정도 분량을 매주 공급할 수 있다는데... 이게 뻥인지, 진짜인지...”

“뭐? 그게 정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직원의 말에, 퍼뜩 놀란 이자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당장 들어오시라고... 아니, 아니야. 내가 나갈게!”

마음이 급하니 몸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간 이자벨.

그런 그의 눈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를 지닌 한 사내와 비쩍 마른 얼굴과 몸을 했지만 범상치 않은 눈빛을 지닌 또 다른 사내가 보였다.

“제가 보크 상단의 상단주, 이자벨입니다. 몬스터 가죽을 팔러 오셨다고요?”

“아, 이자벨 상단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다닐렌츠 상단의 파스칼 긴터라고 합니다.”

이자벨을 보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마른 얼굴의 사내.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앳된 얼굴을 한 금빛 머리 사내는 이자벨에게 인사 대신 다른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여기, 오크 가죽도 취급합니까?”

보크 상단과 이자벨의 인생을 바꿔줄, 엉뚱하지만 너무나 반가운 말이었다.

< 영업 개시 (5) > 끝

0